광해왕은 그놈들이 산야(山野)에 묻혀서 조용히 있을 일이지, 지금도 사사건건 상소문을 올려서 자기의 갈 길을 막는 서인의 잔당들이 괘씸하기만 하였다. (광해왕은 재야의 학인들을 모두 서인의 잔당이라 생각했다. 동인들은 지금의 북인이 되었으므로.) 상소질이나 하는 놈들은 정말로 나라를 좀먹는 벌레들일 뿐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며, 광해왕은 서인 잔당들에게 속으로 심한 욕을 한차례 퍼부은 뒤로, 다시 다른 서책을 들었다.
그것은 원균(元均)에 대한 기록이었으며, 원균은 왜란에서 나가 싸우다 죽어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오른 장군이었다. 글의 첫 대목에 원균의 조상들에 대해 나온 것을 읽고서 고개를 가로로 두어 번 저었다. 그 다음 장을 넘기니 원균이 무과(武科) 과거 시험을 보는데 부정이 개입되어 있어서, 무과 합격을 취소한 사례가 있음이 나타났다. 이로써 광해왕은 바로 원균의 집안이 명문가 임을 알게 되었다. 명문가가 아니면 과거에서 부정을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명문가의 자제들에게만 간혹 있는 일이었으니, 이렇게 출발을 한 관리는 결코 명장(名將)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다음 장에는 원균이 왜란이 터질 때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재임하고 있을 때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임진년(1592 년임) 4 월 13 일 부터 왜적은 정병 20만 명을 전선 700 여 척에 나눠 태우고 조선정벌에 나섰으며, 이 때 원균은 휘하에 전선 83 척을 갖고서 지휘하고 있었다. 원균은 수많은 왜국 병선을 보고서 급히 전라좌도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4 월 16 일에 원균의 서신을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순신은 휘하에 전선 27 척 즉 원균의 3 할에 불과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담당 방어지역을 이유로 들어 지원을 갈 수 없는 형편이기에 원균의 지원요청을 묵살하였다. 군률에는 지휘계통에서 내려온 명령이 아니면 지역을 벗어나서 병력을 움직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군률에 따라서 일을 처리한 것이다.
원균은 새까맣게 몰려든 왜국 전선들을 보고, 왜군이 육전에 서투르니 육지에 올라서 왜군을 맞이하겠다고 말하며, 가지고 있던 전선 82 척을 모두 바닥에 구멍을 내어 바다에 가라앉혔으며, 본인은 몰래 배 한 척을 남겨서 어느 섬에 숨고 말았다. 그러나 나중에 원균은 이순신이 지원을 오지 않았기에 적을 맞아 싸울 수가 없었다고 변명을 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편지를 받을 그 시점에 원균의 부대는 어디로 흩어진지 오래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선발대로 상륙한 왜적의 손에 떨어졌으며, 원균은 이순신의 원군이 도착할수 없었던 그 시간에 벌써 어디에 숨어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왕은 눈을 감고 내가 원균이라면 어찌했을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전선 82 척을 구멍을 뚫어 가라앉힌 것은 장군으로 그렇게 판단하여 시행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들과 육지에 올라서 육지에서라도 왜병과 대적하여 싸웠어야만 할 것이다. 숨은 것은 큰 잘못이라 결론내렸다. '죽은 원균이 자기의 앞날을 볼수있는 천안통(天眼通)을 갖었다면, 원균은 부산 앞바다에서 배를 가라앉히지 말고 첫 번째 격돌을 만들어 내었어야 하고, 그 자리에서 장렬한 죽음을 택했어야 한다. 그것이 원균의 옳바른 인생이었다' 라고 생각하였다. 원균에게는 왜적이 미리 통보를 해주지 않고 쳐들어 온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미리 통보를 해주고 쳐들어왔으면 원균도 미리 죽음의 준비를 하고 아주 잘 싸울 수 있었을텐데... 쥐새끼 같은 왜놈들 같으니...
다른 서책을 펼쳤다. 왜국 군병들은 개전 20 일만인 5 월 3 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입성하였다.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일천 리 길이니 도중에 아무 일없이 진군을 하였다고 해도 별반 차이가 없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의병들이 저항하고 도중 관군이 맞서기도 하였지만, 칼로 대쪽을 가르듯 일격에 한양에 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왜란은 경상우도와 호남지역 만을 남기고 전국이 왜놈들에게 욕을 보이고 말았다. 점차 전국 각지에서 민초들이 일어나 의병이 되었고,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한 후에 전세는 일진일퇴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광해왕은 자기가 직접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공명첩을 팔아서 군량을 마련하고, 의병들을 모아서 민병대장을 세워 맡기는 등의 일을 했었다. 그때를 추억해보는 광해왕은 힘들고 고달펐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고 전심 노력했었던 당시의 행적들이 그립고 아련하게 떠올랐다.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여 왜군의 보충병력과 병참 투입이 지연되자 그 결과로 만들어진 교착상태였다. 그리고 왜군은 조선 전역에서 노략질을 대거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에 호남지역이라도 온전하게 남아있었기에 나라는 꼴을 유지할수 있었다.
개전이 된후 1년 5 개월이 되자 명국의 주도 하에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왜군은 점차 세력을 잃고 남하해가며, 협상이 지속되던 때였다. 부왕이신 선조대왕은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지만, 나이와 경력이 더 많은, 그리고 집안이 좋은(이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원균 장군을 이순신 장군 아래에 시종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원균은 좋든 싫든 이순신을 감시하고 이순신의 잘못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게된 것이다. 조정은 이순신에게서 받는 장계(狀啓)와 원균에게서 비밀리에 받는 장계(狀啓)를 비교해가며 전쟁의 진행을 판단하고 있었다. 광해왕은 혀를 끌끌 두어번 찼다. 이것은 조정에서 전쟁을 겪어본 지도자가 없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총사령관의 상징인 부월(斧鉞 살생권의 상징)이 무엇이던가? '부왕께서는 참 어리석으셨도다' 라고 속으로 한마디를 하였다.
처음 몇 차례의 승전보 이후 교착화한 전세는 빨리 전쟁 끝나기만 기다리는 조정에게 조바심을 안겨주었고, 부왕과 대신들 조차 승전보를 올리지 않는 이순신에게 불신의 화살을 쏘았다. 물론 원균의 비밀장계도 한몫 했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과감한 공격을 퍼붓지 못하고 안전제일의 전략만 고집한다는 비난이었으며, 조정은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見乃梁 거제도 인근 수역) 전선(戰線)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였다. 내가 이순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광해왕은 생각했다. 명나라는 조선조정에 확전을 자제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으며, 조선 조정도 표면적으로는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군령에서 에둘러 표현하였으나 빨리 왜적을 무찔러 쫓아버리라는 지시가 있었다. 왜적들도 처음과 달리 이제는 바다의 속사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순신의 전술에 대한 것도 파악하여 경계가 심하였고, 곳곳에 왜적의 간첩이 심어져 있을 것도 감안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잘해서는 이길수가 없고 상대가 실수를 해줘야만 서로가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조선수군이 패하여 치명적 패배가 되며, 그대로 바다를 왜적이 장악한다면, 바닷길로 통해가면 조선국 도읍 한성(漢城)은 견내량에서 열흘 길에 침공되지 않겠는가?
광해왕은 다음 장을 펼쳤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2월 25일에 이순신은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군령 위반으로 사형당할 것을,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광해왕은 이 대목에 이르러 눈을 감고, 이순신이 만일 이 때에 사형당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하고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이순신은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서 다시 백의종군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순천에 머물던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에 가다가 도중에 병으로 죽었으며, 이순신은 그 소식을 듣고도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못하고, 다시 남쪽의 전장으로 달려가야 하였다. 죄인 이순신을 남쪽으로 끌고가는 금부도사(禁府都事)는 이순신에게 '어서 가자' 고 제촉을 하였다. 이순신은 '천지에 나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차라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고 일기에 적었다한다. 광해왕은 '사는 것이 죄이런가?' 하고 생각하였다.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 명과 왜의 화의가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하는데, 이때에 원균은 7월 4 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왜군에게 습격받아 전선 백여 척을 몽땅 잃고 전사하게 되었으며,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도망칠 때에 함께 하였던 전선 12 척만을 남겼으며, 배설은 끝내 행방을 감추었다. (배설은 왜란이 종결 후 선산에서 잡혀 참수된다.) 광해왕은 '배설이 없었다면 12 척 그거마저 잃었을테니 하늘이 도와서 배설을 내었도다' 하고 생각하였다.
조정에선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7 월 22 일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게 되었다. 남해안은 왜적에게 이미 장악되었고, 왜 수군이 군량을 제때에 공급해주자 전라도 마저 왜적에게 침탈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배설이 남긴 12 척에 1 척을 더한 13 척의 전선으로 9 월 16 일 명량(鳴梁)에서 왜 전선 130 여척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명량해전이 있던 하루 전날 이순신은 부하장졸을 모아서 내일 새벽 출전(出戰)을 알리면서,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이것은 내일의 전투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전투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여기에서 광해왕은 이이첨에게 전해들은 허균의 호민론이 생각났다. 호민이 아니면 필사의 결심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은 호민이었으며, 부하 장졸들까지 호민으로 만들었구나. 허균은 이순신을 보고서 호민론을 생각해낸 것일까? 아니 정여립을 두고 호민론을 생각한 것이겠구나, 허균의 애비가 당시 동인의 당수(黨首)였으니. 정여립이나 이순신이나 둘다 죽음 앞에서 태연하였도다. 광해왕은 조만간 허균을 불러서 호민론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월 9일(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 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광해왕은 또 다른 서책을 열었다. 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현자총통(玄字銃筒)이었다. 화약을 적게 들이고서 포탄을 800 보(1200 미터), 약 2 리를 쏴보낸다고 적혀있었다. 조총(鳥銃)보다도 두 배나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으니, 이순신이 명량 바다에서 왜적의 전선을 무찌르는 데에서 가장 유용하였던 효자라 할 것이다. 광해왕은 성 서문밖 주조소(鑄造所)에서 총통을 만드는 장인들에게 내일은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내려보내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먹이면 나중에 우리 군병들의 피를 그만큼 덜 흘리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현자총통은 무게가 400 근이므로 일 년에 50 문(門)을 만들려면 철이 이만오천 근 정도 소모되는데, 저 못된 신하 놈들에게 감추고서 총포를 만들어야하니, 두 배로 힘이 들지만 이를 어쩌랴... 광해왕은 총통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철의 소모를 궁궐짓는 데에 들어가는 것으로 바꾸어 놓게 하고 있었다. 이것을 못된 놈들이 알면 어느 새 명나라에 고자질 하는 놈이 나올 것이며, 또 백성들 고혈을 짜서 대포는 뭐하려고 만드느냐고, 왜적들이 총질하듯 상소문을 쏘면서 벌떼처럼 달려들텐데...
[그림 왜란 - 현자총통]
어느 새 밤도 늦은 시간이 되었으며, 촛불 아래에서 광해왕은 신음성을 연거푸 지르며 한 시진 이상을 이런 저런 서책들을 읽다가, 아래에 필묵(筆墨)을 준비시켜 전교(轉交)를 써내려갔다. 이순신은 선조에 의하여 이미 의정부 우의정, 덕풍군에 추증(追贈), 추봉(追封)되어 있었으며, 광해왕은 이순신에게 다시 의정부 좌의정, 덕풍부원군으로 추증(追贈), 추봉(追封) 즉 가증(加贈)하도록, 명(命)을 전교에 적어내렸다. (이후 충무공 이순신은 정조 때에 한번 더 의정부 영의정으로 가증 되었다.)
한편 광해왕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이이첨은 밤늦도록 오늘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주상은 대화의 끝자락에 한마디를 하였는데,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일천, 그리 많지않는 수 이거늘'. 이 말 뜻이 무엇일까? 이이첨은 오래 숙고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광해왕의 가슴 속 깊이 들어있는 한마디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것은 조선국에서 일천 명만 옭아메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한마디였으며, 이이첨은 마음을 단속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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