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강책(제7부)

제 073 회 호민 정여립(鄭汝立)

금박(金舶) 2017. 11. 13. 13:11


광해왕은 혼자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마음은 이이첨에게 들은 말에 격동 되었기에 차분할수 없었다. 아래에 말하여 임진, 정유 왜란의 기록들을 가져오라 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광해왕은 서책(書冊)을 오래 읽는 습관이 있었으며, 또 눈병이 잦은 편이어서 어의는 서책을 너무 많이 보지말라고 하였으나 광해왕은 그것 말고는 가슴 속을 달랠 길이 없었기에 때때로 서책에 한없이 몰두하였다. 또 눈병이 오려나 눈에 뭔가가 느껴졌으며, 짜증이 솟았다. 광해왕은 눈병이 도질 때마다 소성대비(인목왕후)가 무당을 시켜서 자기의 화상(畵像)을 그리고, 바늘로 눈을 찌르고 저주를 퍼부어서 이런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광해왕은 김제남(인목왕후의 친부) 반역 사건에서 사건의 중대한 점에 의하여 친국(親鞫)을 많이 하였었다. 이때에 인목왕후가 무당을 시켜서 광해왕의 화상을 그리고 바늘로 눈을 찌른 일을 들은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김제남의 종(奴) 중에 하나를 심문하는데, 인목왕후가 무당을 시켜서 영창대군의 사주가 아주 좋다는 말을 저자거리에 슬슬 유포되도록 시켰다는 자백을 받았으며, 그래서 무당을 수소문하여 잡아들였는데, 그 무당은 심문에 대답을 하였다. 


"너는 누구냐?"


"장통방에 사는 당골 고성입니다."


"작년 겨울 어느날 오별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사주를 물은 일이 있느냐?"


"예, 그 때에 병오생(丙午生 = 영창대군)의 사주를 물었습니다."


"그때에 병오생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주도 물었을터?"


"예, 무술생(戊戌生 = 광해군의 아들 왕세자)과 을해생(乙亥生 = 광해군)도 물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국문에서 결국 인목왕후의 못된 저주행위가 낱낱히 밝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함께 국문장에 있는 대북의 신료들은 차마 더듣지 못하겠다고 자리를 피해 나갔으나, 광해왕은 참고서 끝까지 모두 들었으며, 을해생의 화상을 그린 후 눈동자를 바늘로 찔렀다는 말도 듣게 되었다. 광해왕은 선왕이 살아 계신다면 묻고 싶었다. '이런 경우에도 어머니의 대우를 해주어야 할까요?' 라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한동안 가슴이 아려왔었는데, 영창대군의 생모인 소성대비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광해왕은 어머니(소성대비)를 찾아뵙는 문안인사를 빼게 되었으며, 아는지 모르는지 재야의 신료들은 임금의 불효를 지적하여 꾸짖는 상소문을 줄기차게 올리고 있었다. '천륜은 어떤 죄로도 덮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광해왕은 서책을 펴서 읽는데 마침 왜란(倭亂) 전의 이야기였다. 왜란이 있기 이태 전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서 왜국의 정황을 탐지하려고 한 일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였다. 통신사의 정사(正使)에는 서인 황윤길이요, 부사(副使)에는 동인 김성일을 명하여 다녀왔는데, 어전회의 보고(報告) 내용이 정사는 왜국이 틀림없이 침공할 것이라 하고, 부사는 왜국이 침공할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왜적 침공 후에 기록에서는 김성일의 변명이 나와 있었는데, 자기도 왜국이 침공할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민심이 동요할까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읽고서 광해왕은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차석인 부사의 전쟁날 염려가 없단 말은 믿고, 전쟁날 것이라는 수석 정사의 말은 무시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세력은 서인이었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들이 그 우두머리였던 것은 광해왕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서기 1589년 임)가 있은 다음이며, 이 옥사로 일천 명이 죽거나 귀양갔으며, 이에 연루되었다 하여 동인들은 기를 펴지못하고 지내던 때였다. 그런데 서인인 황윤길 정사는 왜국이 침공할 것이라 했는데, 왜국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동인 김성일 부사의 말만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까? 정사보다 부사의 말을 더 옳게 여겼다니 더 이상하였다. 


만일 사관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 김성일은 거짓말을 해야만 하였을까 하고 생각을 하였다. 혹시 김성일이 왜국에 매수된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였다. 만일에 매수된 것이라면 정사인 황윤길도 함께 매수되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정사까지 매수할 수 없었다면 왜국에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사 황윤길을 죽여 없앴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국의 매수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왜 김성일은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왜란을 준비없이 있다가 당한 것이 과연 김성일 때문일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광해왕은 정사는 전쟁이 없다고 하고, 부사는 전쟁이 있다고 말했다면 즉 사관의 역사 기록이 반대라면 그게 더 타당하리라고 여겼다. 서인인 정사의 말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조정회의에선 결론지었을 것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광해왕은 생각하고 다시 생각을 한 끝에 확신이 왔다. 사실은 그 반대였으리라. 왜국의 통신사 정사인 서인 황윤길은 왜국이 침공할 염려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통신사 부사인 동인 김성일은 왜국이 침공할 것이라 주장하였던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함께 갔던 허성(許筬 = 허균의 이복 형임) 역시 동인이었으며, 왜국이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같은 동인인 김성일이 왜국에서 침공할 일은 없으리라 말했다고 생각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었다. 왜 서인들은 왜국이 침공할 염려가 없다고 거짓을 주장했던 것일까? 광해왕은 다시 숙고를 했으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무렵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정여립의 기축옥사였으며, 당시에도 정여립의 반역이 과연 사실이었느냐 하는 점은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정여립이 서인의 주장처럼 진짜 반역을 하려 했던가 아니면 동인의 주장처럼 왜적이 곧 침공할 것이므로 국난에 대비하여 군병을 양성하였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광해왕은 이 문제를 판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정여립이 군사훈련을 공개적으로 했느냐 아니면 비밀리에 했느냐로 판단한다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반역을 생각하였다면 군사 훈련시키는 것을 절대로 노출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니까. 


기록을 읽어보니 당시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도 진안 죽도로 낙향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즉 전주, 태인, 금구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을 신분 따지지 않고 모아서 육예(六藝 예, 악, 서, 수, 어, 사)를 수련하였으며, 군사훈련을 아주 공개적으로 하였으므로 관아에서도 모두 알고 있었고, 왜구들이 전라도 해변에 침입하였을 때에 전주부윤 남언경은 정여립의 군대에게 왜구를 소탕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정여립은 훈련을 하듯이 민병대를 끌고가서 그 왜구들은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 되어 있었다.(서기 1587 년 임) 광해왕은 서인 정철과 성혼이 주도하였던 기축옥사 즉 정여립을 반역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그에 연관된 동인들도 함께 몰아죽이는 참살사건을 일으키고서 그것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왜국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 거짓으로 보고했음을, 거의 삼십 년이 지난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서인에게 불행하게도 왜국의 침공이 너무 빨리 닥쳐와서 그들의 거짓말은 탄로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 삼 년만 늦게 왜적이 쳐들어왔다면 그들은 그 사이에 왜국의 사정이 변했던 것이라고 변명을 새롭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항민은 호민을 적국의 침공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여립은 호민이었으며, 호민은 항민에게는 원수보다 더 위험인물이었으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여야 하는 것이다.


[퍼옴, 선조(수정실록) 24년 신묘(1591) (만력19) 3 월 1 일자]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사(倭使) 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왔다.


당초 윤길 등이 지난 해 4월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은 당연히 영접사를 파견해서 사신 일행을 인도하여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김성일(金誠一)은 그들의 거만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의논하고 1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출발하였다. 일기도(一岐島)와 박다주(博多州)ㆍ장문주(長門州)ㆍ낭고야(郞古耶)를 거쳐 계빈주(界濱州)에 당도했을 때에야 도왜(導倭)의 영접을 받았다. 왜인은 일부러 길을 돌아 몇 달을 지체하고서야 국도(國都)에 도착하였다.


사신 일행이 대마도에 있을 때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가 국본사(國本寺)에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국본사는 산 위에 있었다. 사신들이 먼저 가 있는데 의지가 가마를 탄 채 문을 들어와 뜰 아래에까지 와서 내리자 성일이 그의 무례함에 노하여 즉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니, 허성(許筬) 이하도 따라서 일어났으나 윤길은 그대로 앉아서 잔치에 임하였다. 성일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다음날 의지가 그 까닭을 듣고서 미리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시중을 든 왜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와서 사죄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왜인들이 성일을 경탄(敬憚)하여 보이기만 하면 말에서 내려 더욱 더 깍듯이 예를 지켜 대접하였다.


그들의 국도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해서는 큰 절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마침 평수길(平秀吉)이 산동(山東)으로 출병하였다가 몇달 만에 돌아온데다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 5개월을 지체한 뒤에야 명을 전하였다.


그들 나라에서는 천황(天皇)이 제일 높아 수길 이하가 모두 신하로 섬기지만, 국사는 모두 관백(關白)이 통괄하였고 천황은 형식적인 지위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깍듯한 예절로 받들고 의장(儀章)도 특별하여 부처를 받들 듯이 하였다. 관백이라고 한 것은 곽광전(?光傳)에 ‘모든 일을 먼저 보고받는다[凡事階先關白]’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때문에 수길를 대장군이라 부르고 왕(王)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후일 대군(大君)이라 칭하였다.) 이는 본래 천황을 국왕전(國王殿)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 가마를 타고 궁문을 들어가도록 허락하고 가각(?角)을 울려 선도하였으며 당(堂) 위에 올라가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 각기 은 4백 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주었다. 사신이 돌아가게 해줄 것을 재촉하자 수길은 답서(答書)를 즉시 재결하지 않고 먼저 가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성일(誠一)이 ‘우리는 사신으로서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일 답서가 없다면 이는 왕명을 천하게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고, 물러나오려 하지 않자 윤길(允吉) 등이 붙들려 있게 될까 두려워하여서 마침내 나와 계빈(界濱)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비로소 답서가 왔다. 그런데 말투가 거칠고 거만해서 우리 측에서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성일은 그 답서를 받지 않고 여러 차례 고치도록 요구한 뒤에야 받았다. 지나오는 길목의 여러 왜진(倭陣)에서 왜장(倭將)들이 주는 물건들을 성일만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하였는데,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광해왕은 읽은 대목이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으리라 짐작할수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와 정박하자 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馳啓)하면서 ‘필시 왜국 내정의 일이 번다하므로 다른 일을 도모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인견(引見)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고 하였다. 옆에 있던 윤길은 말하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성일이 위급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성일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동인(東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없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올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일 왜적이 나오게 되면 온 나라가 놀라고 혼란될까 두려워 그것을 대비하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작가의 말 : 선조실록은 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사초가 소실, 망실되었으므로 광해군 시절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소설에선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 당시에 있었던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쓴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