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행(제4부)

제 091 회 누르하치의 성장과정

금박(金舶) 2016. 11. 18. 09:32


밤에 달이 작아졌다가 아주 없어진 것으로 보아 7 월의 초하루 쯤일 터였다. 진원성 일행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헤르렝 강과 헤어져서 동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부터 우량한 만인대 지역을 넘어서 할하 만인대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할하 만인대의 소속이었던 밸구대리는 젤메조의 사정을 알고난 후 자기의 처자식들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으며, 그래서 자기의 부족을 몰래 찾아가서 처자들을 데려오거나 만나보기라도 해야할 마음이 되었다. 동남행 행보에서 다시 6 일이 지나자 밸구대리는 진원성에게 말하여 젤메조와 함께 2 일 후에 돌아오기로 하고 자기의 고향 땅으로 떠났다.


행로 중에 틈이 생기면 하라하슨은 몽천과 몽지 형제에게 중원 말을 가르쳤으며, 진원성의 수발을 드는 일도 가르쳐 맡겼다. 이제 진원성의 철편과 단도를 기름으로 깨끗이 닦는 것도 몽천 형제의 할일이 되었다. 진원성은 이 때에도 손과 발에 철편 방어구와 단도를 여전히 착용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들이 방어와 공격 수단으로는 필요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몸에 달고 있어서 정이 들었으며, 어차피 아침마다 수련을 할 때에는 그것들이 없으면 모래주머니라도 달아야 할 것이 진원성의 수련 욕심이었고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밸구대리를 기다리며 한 곳에 머무르는 동안 하라하슨은 밸구대리의 부족에 대해서, 또 주변 상황과 역사에 대해서 진원성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대형님, 밸구대리는 할하만인대 산하의 커얼친(科爾沁) 부족에 속합니다. 커얼친 부족의 산하 소부족에 속한 백성이었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거의 하루 길을 가야한다 합니다. 할하만인대에는 징기스칸의 동모(同母) 친동생인 카사르 (하사얼 哈薩爾)의 후손들이 이끄는 부족들과 징기스칸의 속하 대장군의 후손들이 이끄는 부족들도 상당히 섞여 있답니다. 징기스칸이 동생들, 대장군들에게 대흥안령산맥의 땅을 영지로 주었거든요. 그래서 이 부족들은 아직도 자기 부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자부심은 왕공(王公)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요, 밸구대리나 젤메조나 저 같은 백성들에게는 별무소용(別無所用)이지요."


"그들은 황금씨족 즉 쿠빌라이칸의 후예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황금씨족은 아니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은 대단합니다. 그 때부터 징기스칸의 동생 부족들은 대흥안령 산맥의 동쪽에서 살고있는 다른 부족 들을 속국으로 삼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다른 부족들의 지금 이름이 여진족(女眞族)입니다. 명나라에서는 여직(女直)이라고도 부르는데, 여직이나 여진이나 같은 말입니다. 우리 몽골족들은 여진족을 주얼치터(珠爾齊特)로 불렀는데, 그 뜻은 몽골족에게 여자와 공물을 바치는 신하인 속국이라는 의미이지요."[또는 몽골말의 노예라는 뜻의 쥬르첸, 쥬르첵에서 여진, 여직이란 말이 되었다고 한다.] 


"몽골족이 여진족을 속국으로 삼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속국은 여자와 공물을 왜 바치는 것인가요?"


"예, 힘이 약하니까, 습격받아서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리 알아서 바치는 그런 뜻으로 하는 것입니다. 명나라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인근의 작은 나라들은 모두 명나라에게 여자와 공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와 여진족들이 아주 강성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좀 문제가 복잡해졌지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난 모양이군요."


"예, 누르하치(奴爾哈齊)라는 족장이 나타났습니다."


"아! 누르하치..."


"여진족은 원래 세 개의 큰 부족으로 나뉘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들을 명나라에서는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부족의 아래로 다시 여러 소부족들이 있는데, 건주여진은 5 부(部)가 있고, 해서여진은 4 부, 야인여진 역시 4 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13 부가 있었지요.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한 부의 족장이었는데, 지금부터 이십 여 년 전에 건주여진 5 부를 모두 힘으로 통합하게 됩니다.(서기 1588년 임) 그 때에 명나라의 요동 총병(總兵 = 총사령관)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다는 이성량 장군이었고, 누르하치는 이성량 장군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이렇게 건주여진이 강력해지자 해서여진 각 부는 의견을 모아서, 또 자기들과 가까운 몽골의 커얼친부(科爾沁部) 등의 군병들 도움을 받고서, 모두 9 부가 연합하여 3 만 명 군병들이, 건주여진 누르하치를 습격하게 됩니다.(서기 1593년 6 월임) 그러나 누르하치는 공격군의 반에 불과한 자기 군병들을 잘 조직하여 훈련시켜 두었으므로 그들을 격퇴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5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합니다."


                                                       [그림 여진3부]


[건주여진은 오돌리(斡都里), 후리가이(胡里改路), 도은(桃垠), 발고강(拔苦江), 탈알령 (脫斡怜) 5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부족이며, 해서여진은 우라(烏拉), 후이파(輝巴), 하다(哈達), 예허(葉赫) 4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부족이며, 야인여진은 파아손(巴兒孫), 착화(著和), 홀라온(忽剌溫), 올랑합(兀良哈) 4 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부족이다.(한자 안맞는 것 다수 있음)] 


"그러니까 3만 명이 15000 명을 습격했는데, 자기들이 오히려 5000 명이 죽고 패퇴하였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누르하치는 전쟁귀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까지 전쟁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으니까요. 그때 총대장 격인 해서여진의 예허부족장은 누르하치에게 잡혔고, 누르하치는 그 사람을 반으로 갈라서 상체만 돌려보냅니다. 경고였던 것이지요."


"습격하여 졌다니 죽어도 할말 없지요... 요동이라면 요양, 심양이 있는 곳이지요? 내가 어렸을 때에 한번 가본 적이 있지요. 심양에는 내 동생이 살고 있는데 지금도 살고 있으려나... 어디로 옮겨 갔을지도 모르겠네요?"


"오! 대형님도 요동에 가보신 적이 있군요. 누르하치는 그 후로도 명나라와 관계를 잘 만들어 지냅니다. 이십여 년전에 왜국(倭國)이 조선국(朝鮮國)에 쳐들어와서(서기 1592년 임진년임),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지요.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러가지의 말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조선이 왜국과 내통하여 명나라 군이 들어가면 왜군과 조선군이 합동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나쁜 소문까지 나지요. 결국 명나라 황제는 조선국 도읍 한양에서 북쪽 끝 의주라는 곳까지 피난해온 조선국왕을, 사신으로 조선에 간 적이 있어서 그 얼굴을 알고 있는 신하를 보내서, 조선국왕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서야 왜국과 조선이 내통하는 것이 아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조선국 전토(全土)는 왜병(倭兵)들에게 유린당하고 말지요. 이런 때에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자기가 나서서 조선국에 구원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만... 조선국에서도 그 속을 몰라 반대를 하고, 명나라 조정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아서 결국 명나라 대군이 조선을 도와줍니다. 어쨋든 이일로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더욱 이쁨을 받고 그 이후로 요동의 차마사에서도 특별한 우대를 받게 됩니다."


"하라하슨은 참 아는 것이 많군요."


"예, 장사를 할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요. 또 새로운 소식도 빨리 알아야 하고요. 저는 장사를 본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자연히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왜국이 조선국에서 물러난 후에도 명나라의 우대를 계속 받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힘을 비축한 누르하치는 만력 27 년(서기 1599 년 임)에 건주여진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해서여진의 하다(哈達)부를 공략하여 합병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군대조직을 상비군(常備軍) 체제로 바꾸어 정비하게 되지요. 저는 대형님이 앞으로 큰 일을 하실 분이므로 이것을 말씀드립니다. 대형님도 상비군을 두는 것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두셔야 합니다. 과거에는 전쟁이 터지면 그 때에서야 만성 중에서 젊은 남정을 모아들여서 군대 훈련을 시킨 다음에 전쟁터에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먹고 살 것이 여유가 생기면 상비군을 두고 전적으로 전쟁만 담당하게 합니다."


"나라에 먹고 살 것이 여유가 생기면 상비군을 둔다고요?"


"예,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하다부를 공략 한 후, 4 개의 구사( = 기 旗)라고 하는 것을 군대조직으로 만듭니다.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산에서 사냥할 때의 조직인 니루(牛錄 우록)를 기본으로 해서 만든 것이지요. 남정(男丁) 300 명을 1 니루로 조직하고, 5 니루를 1 잘란(甲喇 갑라)으로 조직하고, 5 잘란을 1 구사(固山 고산 = 1 기 旗)로 조직하니, 하나의 구사는 7500 명이고요, 누르하치가 4개의 구사를 만들었으니 상비군은 총 3 만 명 규모가 되는 것입니다. 니루는 큰 산의 한쪽 방향을 포위해서 산짐승들을 사냥하기 좋은 곳으로 몰아가는 그런 조직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냥이 끝나면 잡은 짐승들을 사냥에 참가한 소부족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지요. 때로는 호랑이나 표범, 곰 같은 위험한 짐승들을 맞이하여 다치기도 하고, 어떤 남정은 이때에 용맹을 과시하기도 하였고요, 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상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공(功)에 따라서 사냥된 것들을 나누었단 말이지요."


"예, 이것이 누르하치의 니루였습니다. 평소 사냥을 하던 조직을 전쟁에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지요. 여진족들은 유목과 농경, 수렵, 채집 등을 하던 부족인데 누르하치는 부족을 병영국가 체제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진 하다부를 합병한 후에, 산하 소부족 들 중에서 흔쾌하게 합병해온 부족은 하나의 부족으로 받아들이고, 반항한 부족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렇게 해왔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지요. 과거에는 노예를 각 부족 그러니까 각 구사(기 旗)에 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이번에는 노예 중에 얼마 간은 여진족 전체에 속한 노예, 그러니까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가의 소유인 노예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공을 세우면 자유민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실상 여진족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자 포로들은 빠르게 여진족으로 동화됩니다."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


"예를 들어 적의 머리를 세 개 베어오면 노예 신분을 해방시켜 주었지요. 이 노예들과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잘란이나 니루 마다 얼마간 섞여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진정 무서운 부대였고, 결국 엄청난 승리를 계속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되면 정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진족 하에서는 조선족과 중원인 그리고 적이었던 여진인들이 함께 노예로 있었읍니다만, 그들은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노예였다가 자유민이 된 사람들과 같이 하나의 조직이었기에 큰 차별 없이 훈련을 하면서, 어서 전쟁이 나지 않는가 하고 전쟁 나기만 기다렸지요. 그래야 공을 세워서 자유민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평균적으로 여진족들은 전공(戰功)을 아주 후하게 내렸습니다."


"전쟁나기를 엄청 기다렸겠구만요."


"누르하치는 4 구사, 3만 명으로 군대가 갖추어지자 이 때에서야 자신감을 좀 얻었던 것 같습니다.(서기 1601 년임) 누르하치 자신이 구사 하나를 맡고, 자신의 친동생 수르하치(舒爾哈齊)도 하나의 구사를 맡고, 장남 츄잉과 차남 다이샨이 각각 하나 씩 맡습니다. 이 구사는 각기 색이 다른 깃발을 하나의 상징으로 삼게 됩니다. 즉  황기(黃旗)는 누르하치가 직접 통할하고, 남기(藍旗)는 동생인 수르하치가, 백기(白旗)는 첫째 아들인 츄잉이, 홍기(紅旗)는 둘째 아들인 다이샨이 맡게 되며 이 때부터는 색기(色旗)를 구사의 구분 호칭으로 삼게 되지요. 누르하치 아래의 여진인들은 전원이 색기 구분하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허투알라(興京 赫圖阿拉)에 도읍을 정하여 치소(治所)를 짓고서 옮깁니다.(서기 1603 년 임)"


"삼만 명의 상비군이라 ..."


"누르하치가 해서여진의 하다부를 합병하자, 해서여진의 다른 부들은 누르하치를 두려워하여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만력 29년 (서기 1601 년임)에 이성량 장군을 다시 요동도사로 보냅니다. 누르하치를 좀 억누르라고요. 그런데 누르하치는 과거의 인연도 있었고요, 이성량 장군을 잘 상대하여 더욱더 세력이 튼실해지게 됩니다. 다시 해서여진의 우라부와 싸움없이 결맹 합병을 하였고요(서기 1601년임), 과거에는 각 니루마다, 또 잘란마다 인원이 정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상당히 부족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꽉 채워지는 것이지요. 만력 35년(서기 1607 년임)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후이파부를 다시 공격하여 합병합니다. 이렇게 되자 만력 36 년 (서기 1608년 임) 명나라 조정은 이성량과 누르하치가 너무 밀착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이성량을 탄핵시켜 파직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누르하치는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동생 수르하치를 물러나게 합니다. 그 대신 수르하치의 장남 아민을 그리고 누르하치 자기 대신으로 아들 망구얼타이를 보일러(패륵 貝勒 = 의정왕자)에 임명하여 기를 관장하게 합니다. 이로써 4 기(旗)를 관장하는 4 대패륵은 다음 세대인 츄잉, 아민, 다이샨, 망구얼타이가 됩니다."


"내부를 정비하는 것이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누르하치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제가 늑대로 살면서 안문관 밖에서 장사꾼들과 연결을 만들고 요동 차마사의 이런저런 소식에도 귀기울여 들었던 것인데, 아마 지금에는 누르하치의 세력은 더욱 커지고 강해졌을 것입니다."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강성해졌단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