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35. 얼음위에 타는 사랑 - 1

금박(金舶) 2015. 9. 15. 08:00


  #35. 얼음 위에 타는 사랑 


  벽려혼은 그날 밤 사비공주를 잊을 수가 없어서 도둑고양이 신세가 되었다. 살금살금 제왕부 별원에 머물고 있는 사비공주를 찾아갔다. 제왕부 별궁은 오얏나무가 많아서 이화원(李花園)이라고도 불렀다. 사비공주는 신흥성에 두고온 생부 여울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연못가에서 달을 보고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점점 대한(大寒)의 겨울 찬 바람이 불었고 그 많은 이화나무는 모두가 잎사귀 하나없이 추워 떨고 있었다.


  사비공주는 신흥성에서 청주로 돌아오는 길에 동평군 흑호루를 지났다. 사비공주는 흑호루에서 검은 연수강물을 쳐다보며 거기에 빠져죽은 여비를 생각하였다. 사비공주는 그를 위해 흐르는 강물에 술 한 잔이라도 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청주성으로 돌아오니 오늘처럼 쓸쓸한 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눈물 한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어느새 샘물처럼 눈사위에 고여서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홍학검 사비공주 여상도 운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도 운다. 사비공주는 취하도록 마시려고 매화주라는 술을 한병 들고 나왔다.


  혼자 마시려고 들고 나왔는데 흑호루 강변에 여비를 위해 술을 뿌려주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때는 어려서 술도 잘 못먹었지. 이제 귀신이 되었으면 술을 잘 마시겠지? 사비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술을 든 호리병으로 눈가를 훔쳤는데 그녀의 눈물이 호리병 속으로도 흘러들어갔다. 아차, 술이 짜지게 생겼어. 사비공주는 꽁꽁 얼어붙은 연못위에 짠 술을 부어버렸다. 눈물도 다 부어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밤바람이 세차지더니 어느새 하얀 눈이 내렸다. 하늘도 소리없이 우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눈을 맞으며 슬픔이 더하지는 않는다. 첫눈이든, 혹은 마지막 눈이든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동심이 되어버린다. 하얀 눈은 먼데서, 고향 하늘에서 찾아오는 선물이었고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섬세한 손길처럼 부드럽고 또 첫딸처럼 뽀송한 것이 반가운 것이었다.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렸다. 소녀의 발걸음처럼 봄을 재촉하는 눈이었다. 마침 대한(大寒)인데 동장군이라는 대한 추위를 그대로 덮어버릴 눈인가? 지금쯤 흐르는 흑호루 강물 위에도 눈이 쌓이고 있겠지.


  사비공주를 훔쳐보는 벽려혼의 머리 위에도 함박눈이 머리에 달라붙어 너무 추워져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이가 떨려서 아래위로 부딪쳤다. 사비공주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누군지 다 알아, 흰털원숭이. 어서 나와."


  벽려혼은 사비공주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이, 추워라."


  사비공주는 벽려혼을 돌아보았는데 그녀의 두 눈썹에도 하얀 눈이 맺혀 있었다.


  "왜 왔어?"


  사비공주의 목소리가 울먹이는 듯 하여서 벽려혼이 물었다.


  "공주, 목소리가 이상한데, 울었어?"


  벽려혼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이 내려다 보았는데 사비공주가 눈물로 엉클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사비공주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짧게 말했지만 사정없이 떨렸다.


  "괜찮아."


  그러나 정말로 괜찮은 것 같지 않았다. 벽려혼이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싸늘하였다.


  "이런, 꽁꽁 얼었구나. 왜 한 데 나와서 울어?"


  "아버지 때문에."


  사비공주는 아버지 탓을 하였다.


  "내가 아버지를 욕해서 그렇구나. 결국 나 때문이네."


  벽려혼이 그녀를 위로하자 한참 울고난 사비공주는 불같은 성정이 많이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게 아냐."


  "그럼 뭐야?"


  "살다보면 그냥 울고 싶은 날이 있어."


  사비공주가 감정 탓으로 돌리자 벽려혼은 그녀의 얼굴에 치우손을 곱게 문질러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얼굴도 차가웠고 거기에 반하여 벽려혼의 치우손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나 계속 울건데 이 추운 날에 옆에 있을려구?"


  사비공주가 물었는데 초저녁같은 적의(敵意)는 보이지 않았다. 추운데서 울다보니 뜨거운 눈물 속에 적의가 용해되어 버린 것일까? 그녀는 혼자 울며 밤을 지새기는 너무 외로우니 지금 벽려혼에게 어디 가지 말고 옆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벽려혼은 날이 너무 추워서 그녀를 안고 별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사비공주가 허락할 리 없었다. 벽려혼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으, 너무 추워. 못살겠다. 안에 들어가자."


  "절대로 같이 한 방에 들어가지 않을거야. 결혼 전에는 절대로 안돼."


  사비공주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꼼짝하지 않으니 벽려혼은 방법이 없었다.


  "너무 추운데 우리말이야."


  벽려혼은 그녀를 뒤에서 감싸안았다. 사비공주도 몹시 추워서 몸이 굳어서인지 도망가지 않았다. 이러다가 두 사람이 얼어죽어버릴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사비공주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고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벽려혼은 사비공주에게서 떨어졌다.


  "추위를 녹이는 비장의 방법이 하나 있다."


  벽려혼은 허리에서 취운검을 꺼내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무라구모"


  눈구름의 정기를 취운검의 검끝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회색 하늘에서 눈구름이 끌려와 충돌하였다. "꽈과광" 벼락이 터지며 번개가 취운검을 타고 흘러들었다. 벽려혼은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땅바닥에 뒹굴다가 일어났다.


  "이야, 몸이 따듯해지는데."


  벽려혼은 전신에 파란 전기가 번쩍거리면서 사비공주에게 다가왔다. 벽려혼이 사비공주의 손을 만지자 전기가 넘어가서 사비공주가 움찔하였다.


  "아 뜨거."


  벽려혼은 다시금 사비공주의 등을 감싸안았다. 그런데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연기가 나면서 사비공주의 옷이 타들어갔다. 사비공주는 옷이 타는 것도 모르고 단지 벽려혼의 손바닥에서 그녀의 몸으로 타고 들어오는 파란 전기 때문에 몸을 움찔거렸다.


  "이게 뭐야? 만지지 마."


  사비공주가 몸을 움츠렸으나 벽려혼이 더욱 끌어안고 그녀와 몸을 부볐다.


  "으아,"


  사비공주는 벽려혼에게서 전기가 마구마구 타고 들어가자 온몸이 추위가 아니라 전기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벽려혼은 그녀가 경련하듯 떠는 것이 재밌어졌다. 뒤에서 겨우 껴안던 벽려혼이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껴안고 눈밭에 굴렀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의 전기가 너무 심하게 찌릿찌릿하게 넘어오니 의식마저도 깜박깜박하였다. 얼었던 전신에 피가 다시 통하는 것은 좋은데 잠시잠시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으으." 사비공주는 신음을 흘렸으나 벽려혼은 그녀가 추위에 너무 얼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였다. 벽려혼은 더욱 열심히 그녀의 몸과 자신의 몸을 비볐고  어느새 그녀의 옷은 연기로 타들면서 조각조각 떨어져내렸다. 벽려혼은 그녀와 눈쌓인 정원에서 뒹구르다가 얼음 언 호수 위에 굴러 떨어졌다. 벽려혼은 옷이 거의 다 타버려서 터질듯한 가슴이 한데 드러난 사비공주를 내려보았다. 그도 부리나케 옷을 벗었는데 그의 옷도 그의 손이 닿으면 타들어갔다. 사비공주는 감전이 되어서 아직 입을 제대로 열지 못했다. 그냥 벽려혼이 옷을 벗고 다시 그녀의 위에 엎드려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얼음 위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지듯이 뒹굴렀다. 사비공주는 양 뺨에 얼었다가 녹은 눈물을 벽려혼의 얼굴에 부비고 또 부비면서 어느새 벽려혼의 따뜻한 심장 고동을 들었다. 살아 있구나.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슬픈 것인가? 아니, 사람이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당연히 기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백제 옛말에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고 했는데. 특히 눈내리는 밤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비공주는 잠시지만 회색 눈구름 사이로 별이 반짝 거리다가 사라졌다. 마침내 연못의 얼음이 녹아서 두 사람은 차가운 호숫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얼음 위에서도 뜨겁게 타올랐던 두 사람은 얼음 물속에 떨어져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이건 너무 춥다."


  벽려혼은 그녀를 안고 일어서서 별당으로 들어갔다. 별당에는 유리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벽려혼은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이불 덩어리로 덮고 그 안으로 미그러져 들어갔다.


  "아, 따뜻하다."


  "내가 녹여줄게."


  벽려혼은 그의 장기인 네 손으로서 그녀의 구석구석을 간지럽혔다. 겨드랑이 사이로 두 손이 들어가고 옆구리 밑으로도 두 손이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으로서 벽려혼의 네 손 공격을 당하지 못하였다. 벽려혼은 온 몸이 얼은 사비공주를 꼭 껴안았고 사비공주는 그 안에서 몸을 녹이고 기분좋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벽려혼이 대를 이어야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녀를 가만이 잠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벽려혼의 빨간 불덩어리가 그녀를 파고 들어서 사비공주마저도 빨갛게 불을 붙였다. 벽려혼의 욕심이 밤새도록 숯불처럼 타올랐다가 새벽에는 창백하게 다 타버렸고, 사비공주도 온몸이 하얀 재가 된  것처럼 하늘하늘 부서졌다. 거참, 피곤하다.  





'비류혼(沸流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35. 얼음위에 타는 사랑 - 3  (0) 2015.09.17
#35. 얼음위에 타는 사랑 - 2  (0) 2015.09.16
#34. 왕후지재 장약 - 4  (0) 2015.09.14
#34. 왕후지재 장약 - 3  (0) 2015.09.12
#34. 왕후지재 장약 - 2  (0) 201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