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30. 공주의 운명 - 2

금박(金舶) 2015. 8. 26. 13:20


  "석성왕, 그동안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와 동모군에서 보낸 일년이 억울하지요?"


  "억울하고 말고, 벽려혼이 나타난 것이 지난 구월 중양절(9 월 9 일)이 아니냐? 그런데 그는 스무날 남짓한 동안에 부왕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그게 말이 되냐?"


  사비공주는 벽려혼의 전공이 그렇게 우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우리 앞에 나타나기는 늦었어도 그만한 실력을 다 갖추느라고 늦게 나타난 것이겠죠."


  "정말 그놈이 실력 때문이냐? 운이 아니고?"


  사비공주는 자신이 벽려혼의 군사이기 때문에 벽려혼을 위해 열심히 변호하는 것인지 자기도 모르게 벽려혼에게 끌려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운이라는 것은 항상 실력있는 쪽에 따르지 실력 없는 쪽에 운이 따르지는 않아요."


  석성왕 여계가 물었다.


  "어쨋든 말이다. 저쪽 놈은 자꾸 몸집이 커지는데 여기에 맞설 무슨 대책이 없느냐?"


  사비공주는 비로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기 이렇게 엉덩이를 지고 앉아서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사비왕이나 석성왕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벽려혼보다 선수를 쳐서 장무군이나 발해군을 얼른 차지하면 또 몰라도."


  "뭣이?"


  대방왕이 전쟁을 하자는 사비공주의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대방왕은 사방이 포위되어 독자적인 행군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일 대방왕이 싸움을 한다면 일단 벽려혼의 청주를 치고 나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러기에는 힘이 부쳐서 중평제황의 증원군을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주를 치지 않고 중원 공격에 나선다니 의외였다.


  "우리 백제군은 훌륭한 수병들이 있습니다. 배로서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군에 상륙하여 장무, 발해군을 공략하여 가지면 청주 제왕과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암과 여귀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래, 우리도 나가야 돼."


  대방왕 여계가 노심초사하여 물었다.


  "그게 가능하냐? 만일 우리가 그곳 두 군을 쳐서 가진 다음에 벽려혼이 우리와 싸우자고 나오면 어쩔 것이냐?"


  "그때는 소녀가 나서서 중재를 하지요. 소녀가 두 분 오라버니를 따라가서 공성을 돕고 뒤에 벽려혼을 설득하면 그도 물러나서 장무, 발해 두 군은 두분 오라버니왕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벽려혼이 다 거둔 다음에 떼어달라해야 소용없는 일이고, 두 분 오라버니가 먼저 그 땅을 차지하고 볼 일입니다. 아마도 지금쯤 벽려혼이 제남, 낙안, 평원, 낙릉을 치기 바쁘니 두 군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고 또 두 군의 사정이 남쪽의 벽려혼으로 인하여 고립무원일 것입니다. 그러니 두 군을 쳐서 갖는 일은 이삭줍기처럼 쉬운 것이고 황하 하구를 장악하면 그 효용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답니다."


  사비공주는 이렇게 하여 대방왕의 군현을 늘려놓으면 그녀가 백제에 대해 진 빚을 더는 것이었다. 훗날 벽려혼을 설득하고 두 군을 오라버니들을 위해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기왕에 자기에게 주기로 한 북해군을 포기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벽려혼과 맞싸울 수도 있지. 둘이 맞대결을 해서 진짜 영웅을 가리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사비공주가 너무 놀라 껑충 뛰었다.


  "오라버니, 자중하십시오. 절대로 벽려혼과 일대일로 맞서서 오라버니에게 승산이 없어요. 그는 보통 괴물이 아니라서 싸우다가 보면 어느새 팔이 네 개가 되요. 일반 사람은 상대할 수 없지요."


  "설마?"


  "사실이에요. 그는 용의 날개가 있는데 그게 손과 같아서 맞춤 장갑까지 끼고 있을 정도로 요긴하게 활약을 해요. 결국 사비괴물이죠."


  대방왕 여계가 생각을 마치고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너희 둘에게 각각 오천 병사를 주겠다. 같이 움직여서 장무, 발해군을 치고 너의 발 아래에 두도록 해라. 그러나 약탈하지 말고 너희들의 영지로서 치세를 잘하여야 한다."


  여암과 여귀, 그리고 사비공주가 이끄는 백제 수병들은 발해군에 상륙하여 발해군성인 남피성을 공격하였다. 발해군 태수 부자는 낙릉태수를 도와서 낙릉군으로 가서 단관의 청주군과 대치 중이었고 남피성은 거의 비어 있었다. 여암과 여귀는 한나절 만에 남피성을 깨트리고 입성하였다. 여암은 스스로 발해태수가 되어 동래태수를 겸직하고 여귀는 사비공주와 북쪽의 장무군을 치러갔다. 장무태수 서곽은 급히 성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도망쳤다. 사비공주는 장무태수가 된 여귀와 백제병사 삼천을 장무군에 배치하고 여암과 함께 낙릉으로 향했다.


  낙릉으로 가는 길에 사비공주는 발해태수였던 부자의 병사들과 마주쳤다. 부자는 자신의 봉지인 발해군을 되찾으려고 낙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새로운 발해 태수인 여암과 맞서게 된 것이다. 여암은 발해 태수 부자와 맞서 그의 목을 베고 전승을 거두었다. 한편 낙릉성에는 단관과 풍패의 진영에 우사인 왕구가 북해도에서 삼백여 제자를 끌고 와서 참여하였다. 왕구의 제자들이 합세하여 성을 공격하니, 이미 부자가 빠져나간 낙릉성은 낙릉 태수 부도 혼자서 지킬 수가 없어졌다.


  풍패와 왕구의 새로운 공격에 낙릉성은 함락되었다. 뒤이어 사비공주와 여암이 칠천 병사를 이끌고 낙릉으로 협공하러 왔다. 사비공주는 낙릉성을 합공하여 함락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미 한발 늦었다. 게다가 풍패와 왕구는 백제군이 낙릉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닫아 걸었다. 풍패는 즉시로 평원성에 사람을 보내어 벽려혼에게 전갈을 보냈다.


  여암은 입성을 못하게 하는 풍패가 괘씸하여 거기서 군사를 돌려서 발해군성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사비공주가 성급한 여암을 말리고 성밖 백제진중에서 벽려혼을 기다리게 하였다. 벽려혼은 낙릉성 공격을 공천왕에게 맡기고 혼자 백마를 타고 황하가로 나가서 황하 물을 말에게 먹였다.


  저 건너는 연나라였다. 황하 동남쪽은 벽려혼의 것이다. 벽려혼은 폭이 백리가 넘어보이는 황하를 굽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건너는 내 말발굽 아래에 둘 수 없을까? 벽려혼은 계속 머리를 숙여 생각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지. 하지만 욕심은 화를 부른다. 여기서 말을 돌리자. 황하에 뜨는 태양은 저녁 노을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강물은 길게 드러누운 태양 빛으로 갈라져 보였다. 그 태양빛 아래 수면에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하는 야망이 반사되고 있었다. 누런 강물은 그 야망을 퉁겨내고 있다. 잡아보라는 듯이. 하지만 빛을 잡을 수는 없다. 황하 저 건너는 마치 저녁 노을처럼 느껴졌다. 아득한 중원제패의 꿈이 거기 있었다. 벽려혼은 꿈에서 깨어 저녁 기운이 짙어가는 평원성으로 향했다.


  청주사마 공천왕은 마침내 낙릉성을 함락시켰다. 벽려혼은 평원성에 입성하여 포로가 된 평원군 태수 필치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여 살려두었다. 평원성은 청주의 서북 전초가 되므로 벽려혼 자신의 식읍으로 삼고 임시로 공천왕에게 오천 병사를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다음날 벽려혼은 필치와 낙릉성으로 향하였다. 벽려혼은 낙릉성 앞에 포진한 여암의 백제군을 보고 그들의 진중으로 먼저 향했다. 사비공주가 기다리던 바라서 여암과 함께 벽려혼을 맞이하였다.


  "사비공주, 동모성에 갔던 일은 잘 되었소?"


  벽려혼이 먼저 아는 체를 하였다.


  "그저 승전 소식을 전하기만 하는 것인데 특별히 잘되고 못될 것이 있나요?"


  사비공주는 이제 그와 공식적인 말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녀문제로 말을 서로 안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대방왕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소?"


  사비공주는 거기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는데 벽려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대방왕의 속이 쓰리겠지.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백제군 일만이 바닷길로 황하 하구로 들어와서 석성왕이 장무군의 태수가 되어서 황하를 지키고 있어요. 사비왕은 발해군을 이미 가졌고요."


  사비공주는 그녀가 하는 통고의 말로서 벽려혼이 현재의 상황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벽려혼은 고민하였다.


  "발해태수는 전 발해태수 봉방의 아들인 봉의가 내정되어 있는데."


  그러자 여암이 벽려혼을 노려보았다. 지금 네가 나보고 도로 발해군을 내놓으라는 말이냐? 사비공주가 중간에 나서서 말했다.


  "제왕, 본공주에게 주려던 북해군을 내놓겠습니다. 본 공주는 별로 필요 없으니. 대신에,"


  "고맙지도 않소이다. 거기는 그대로 낙안군으로 둘 것이오."


  벽려혼은 사비공주가 없는 한 북해군이 의미가 없었다. 벽려혼이 딴청을 부렸지만 사비공주의 계략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대신에 사마 단관을 북해군 태수로 두시고 낙릉군에 두기로 한 기주자사는 사비왕께 주십시오."


  사비공주의 목표는 오라버니 여암을 대방왕이나 벽려혼과 같은 자사의 반열에 올리려는 것이었다. 벽려혼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소이다. 단관이 이미 가기주자사요, 거기서 가(假)자만 떼면 기주자사인 것을 모르시오?"


  이는 사비공주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비왕 여암이 청주제왕 벽려혼은 물론 동청주 대방왕, 서주 낭야왕 탁발필, 교주 동해왕 아진, 게다가 기주자사 단관의 아래에 머문다는 것은  백제 황실의 체면상 곤란한 일이었다.


  "만일 기주자사를 단관으로 하면 장무군과 발해군은 기주에서 떨어져나가서 동청주에 귀속될 것입니다."


  사비공주는 두 군을 벽려혼의 아래에 둘 수가 없으니 끝까지 맞선다는 것이었다.


  "그것참, 유감이군. 두 군이 바다 건너 동청주에 귀속하여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연나라가 공격이라도 해오면 천년만년 두 군을 지켜낼 수 있으시오?"


  "중평제의 대군만 도착하면 백제 군사는 충분해지니까 아무 문제없지요. 중평제는 겨우 두 군을 지키시겠다고 오시는 것도 아니라 연나라와 하북 땅을 놓고 싸우실 것입니다."


  사비공주와 사비왕 여암이 믿는 것은 백제의 증원군이었다. 중평제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청주 벽려혼과 일대 격전을 벌일 수도 있다. 병사 수에 따라서 상황이 반전하여 대방왕과 여암은 더 큰 힘을 얻고 벽려혼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벽려혼은 중평제의 백제 대군과 싸우느냐, 아니면 협상을 하고 공존을 하느냐는 선택이 필요하였다. 싸우자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하여 두 군의 백제군을 다시 바다 건너로 몰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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