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중평제황의 친정
벽려혼은 풍패로부터 낙릉성의 상황을 보고 받고 우사였던 왕구를 소개 받아서 왕구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왕구는 풍승상과 마찬가지로 오른팔이 없었다. 벽려혼의 부왕이었던 벽려울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바쳐진 오른팔이었다. 그러나 벽려혼은 이미 왕구의 아들 왕통을 죽이고 왕륭을 불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왕구를 위로하였다. 게다가 왕구의 외손자인 벽려흥까지도 불구가 되었으니 보상을 하여야 했다.
벽려혼은 낙안국왕에 벽려흥을 봉하고 낙안국 내사에 왕구를 봉하였고 낙안국 내사였던 모도를 평원국 내사로 옮기도록 조처하여 벽려흥과 왕구 일가를 낙안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이때 사비공주가 찾아들어왔다. 사비공주가 들어와서 아무 말없이 벽려혼을 노려보니 풍패와 왕구가 눈치를 보고 조용히 물러나갔다. 사비공주는 그들이 나갔어도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서 말이 없었다. 벽려혼이 서먹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했다.
"앉으시오. 군사가 다시 돌아오니 반갑구려."
"나쁜 놈."
사비공주의 대답은 욕이 먼저였다. 더 나쁜 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원통했다.
"막말을 하는 것을 보니 부인이 되기로 작정했구려."
벽려혼이 욕을 듣고도 싱글벙글이었다. 하지만 사비공주에게는 음흉하게만 보였다.
"웃지 마라. 다시 나를 능욕하면 너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했다."
사비공주가 극언을 하니 벽려혼은 섬뜩했다. 이토록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여자를 부인으로 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벽려혼은 다시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지난번 일로 화가 정말 많이 났었구려."
"그렇다. 이 화가 다 풀리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니 화가 풀리기 전에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사비공주가 다시 결혼을 거절하였다.
"알겠소. 그럼 없던 일로 하겠소."
벽려혼이 사비공주의 서슬에 겁을 먹고 그의 제안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 화가 풀어질 것 같던 사비공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를 어떻게 없던 일로 한단 말이야? 이미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어떻게 이제와서 없던 일로 해?"
벽려혼은 혼란되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그동안 사비공주에게 너무 심했었나?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남자가 한번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비왕 여암은 당연히 창주자사로 옹립하고 그렇게 해서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지."
벽려혼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공주가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순간에 벽려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그럼 나는 비싼 값만 지출하고 받는게 없지 않소?"
벽려혼이 다시 제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사비공주는 이제까지 소리를 질러서 벽려혼의 혼을 빼놓고 잘해왔는데 벽려혼이 다시 계산을 하고 있으니 막막했다. 사비공주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에는 당연히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너의 목숨을 지켜주마. 내 손으로 너를 당장 죽이려던 것을 용서하고 살려주겠다."
벽려혼이 옆이마를 긁적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목숨 지켜주는 것으로 창주자사를 달라는 말이오? 나는 절대로 그 비싼 값을 낼 수 없소. 그러니 역시 없던 일로 하겠소."
사비공주는 맥이 빠졌다. 이제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녀가 약자였고 벽려혼은 야단맞고 있지만 현재 강자였다. 사비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 평생 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너의 목숨을 지켜달라는 말이냐?"
"바로 그렇소. 평생 동안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내 목숨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시오."
벽려혼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사비공주에게 강요하고 한번 더 속이고 있었다. 그녀가 승낙하면 그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이제 그를 죽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사비공주는 그의 목숨을 지켜준다는 것이 전장에서 군사로 따라다니며 벽려혼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응낙하였다.
"좋다. 내가 평생 너의 목숨을 책임져 주겠다. 결코 전장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겠다."
"옳지, 그럼 되었어."
벽려혼은 만족하였다. 그러나 사비공주는 무슨 말을 하러 왔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뭐하려고 혼자 여기에 들어왔을까? 벽려혼은 풍패와 왕구, 사마 공천왕과 단관과 봉의, 필치 그리고 여암과 사비공주를 모두 한 자리 모아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기로 하였다. 벽려혼은 그 자리에서 선언을 하였다.
"모두 들으시오. 이곳과 가까운 발해군 남피성에 백제 창주를 설치하고 초대 창주자사 창해왕에 백제에서 오신 사비왕이 오르실 것이오. 창주 이하에는 낙릉, 발해, 평원, 장무등 사군을 두며 낙릉군 태수에는 경운공 단관을 임명하고 평원국 내사에는 모도를 임명할 것이며 발해군 태수에는 봉의를, 그리고 장무군 태수에는 석성왕을 임명하는 바이니 이 분들은 창해왕을 잘 보좌하여 연나라로부터 창주를 잘 방어토록 하시오. 그리고 군사였던 사비공주를 과인의 부인으로 맞이하기로 하였소이다. 그리하여 우리 청주와 백제 창주는 피로서 결연을 맺는 것이외다."
모든 사람들이 전승 분위기와 화해분위기에 만족하고 즐거운 잔치를 이어나갔다. 사비왕 여암은 특히 더 만족하였는데 백제 진영에서의 그의 위치가 한층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벽려혼이 약속했던 기주자사 닉릉왕에 오르지 못하고 낙릉태수 경운공에 머물게 된 단관이 불만이었다. 연회가 파하자 벽려혼은 사비공주의 손목을 붙잡고 그의 처소로 끌고 갔다. 사비공주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왜 이러시죠?"
"몰라서 물어? 평생 나를 지켜주기로 했잖아? 나는 잠잘 때가 제일 무서워. 누군가 옆에서 지켜줘야 되지."
사비공주는 약속을 생각하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 사이에 벽려혼은 침대로 사비공주를 끌고 가려했지만 사비공주가 손을 뺐다.
"그럼, 전하는 주무소서. 저는 문 앞에서 경비를 서지요. 그게 저의 본연의 임무지요."
벽려혼이 다시 웃었다.
"하지만 부인, 우리는 부부요. 먹고 자고 같이 하는 것이외다."
"그건 저의 임무가 아니지요. 제가 한 약속만 지킬 것입니다."
사비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벽려혼이 다시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하든간에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그대는 평생 나를 지키시오. 그게 약속이었소이다."
사비공주는 그제서 그녀가 속은 것을 깨달았다. 교활한 놈. 이제 벽려혼이 강제로 그녀를 어떻게 하여도 그녀는 원망할 수가 없다? 원망은 해도 보복할 수가 없다? 사비공주는 다시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하, 그렇다면 본 공주와 잠자리까지 원하십니까?"
"그건 부부간에 당연한 일이 아니오?"
벽려혼은 사비공주의 체향을 맡으면서 몸이 달기 시작했다. 그러나 벽려혼의 머리가 흐려지는 만큼 사비공주는 머리가 점점 맑아졌다. 이럴 때 정신을 차려야지.
"정히 본공주를 진짜 부인으로 삼고 싶다면 전하께서도 맹세를 하십시오."
"맹세? 무슨 맹세?"
벽려혼이 되묻자 사비공주가 말했다.
"앞으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맹세입니다. 전하 곁에 아무리 수많은 여자가 있어도 기왕에 부인으로 삼은 부림공주와 본공주 이외의 여자에게는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고 지켜야 합니다."
벽려혼은 잠시 멈칫했다. 제왕이 삼처사첩은 보통인데 부인 둘로 마감을 하라는 요구였다. 벌써부터 투기를?
"맹세하지. 이제 새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겠소이다. 그럼 되었소?"
벽려혼이 사비공주를 다시금 침대로 끌어당기니 사비공주가 못 이기는 체하고 끌려들어갔다.
"만일 전하께서 맹세를 어기시면 본공주는 전하 곁을 떠나겠습니다. 전하를 평생 지켜드린다는 약속도 물론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하게 맹세해 주십시오."
"맹세하고 말고. 맹세한다니까."
벽려혼은 사비공주를 확실하게 그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맹세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벽려혼이 다른 여자들을 모두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사랑의 맹세라는 게 대개 그때뿐인 것이다. 나중에 사비공주가 왕손을 출산하게 되면 그때 가서 젊은 희빈을 서넛 들인다고 해서 그녀가 과연 떠날 수 있을까? 선녀도 아이 셋만 생기면 날아갈 수 없다는데.
하지만 사비공주는 벽려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은 벽려혼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데 억지로 믿는 척하는 것이고, 벽려혼이 만일 맹세를 배신한다면 가차없는 보복을 할 것이었다. 보복이라는 것이 떠나는 것 말고 또 없을까? 가장 큰 보복은 사랑을 주는 척하다가 도로 빼앗는 것일텐데. 하지만 사비공주는 이렇게 벽려혼의 뜻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벽려혼이 방심하여 등불을 밝히는 사이에 사비공주는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달려갔다. 옷을 벗은 벽려혼이 미처 쫓아나갈 수 없었다. 방심했다가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벽려혼은 혼자 침상에 누워서 문밖으로 몸을 내빼고 얼굴만 방안으로 들이고 이야기하는 사비공주를 맥없이 바라보았다.
"신나는 결혼식입니다. 백제 제황이 도착하면 그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 후에 합방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절대로 합방할 수 없습니다. 그게 황실의 법도입니다."
사비공주는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내일부터 부인으로 부르더라도 그것은 그것이고 그녀의 마음은 결혼 후에나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합방 했었잖소?"
벽려혼이 조용히 물으니 사비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악몽이었는데 오늘로서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다시 기억하게 하지 말아요."
사비공주는 그렇게 해서 다른 방으로 도망갔다. 벽려혼은 괜한 맹세만 하고 손해가 컸지만 그렇다고 사비공주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차피 결혼하기로 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비류혼(沸流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 중평제황의 친정 - 3 (0) | 2015.08.31 |
---|---|
#31. 중평제황의 친정 - 2 (0) | 2015.08.29 |
#30. 공주의 운명 - 3 (0) | 2015.08.27 |
#30. 공주의 운명 - 2 (0) | 2015.08.26 |
#30. 공주의 운명 - 1 (0) | 201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