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공주의 운명
벽려혼은 사비공주가 그만두고 돌아간다하니 난감하였다. 벽려혼은 첫 번째 전쟁을 대과없이 마무리하고 서주 임기성의 관아 내원에서 몸을 풀었다. 벽려혼을 따라나와 낯설은 전장의 벌판에서 시달린 부림도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푹 쉬었다. 사비공주는 누구보다 피곤한 상태라서 임기성에서 정신없이 늦잠을 자고 오후 늦게 장광군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날 오후 일만 병사와 독천왕을 임기성에 남겨두고 모두들 각자의 임지로 떠나가는데 제성까지는 동행이었다. 그들은 장천왕의 새로운 성양군 치소가 된 제성에서 장천왕의 취임을 축하하느라 다시 밤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흑천왕은 교주가 된 이전의 성양군이었던 불기성으로 돌아가서 교주자사 동해왕이라고 칭할 것인데 아무래도 백제와 관계 정립이 문제였다. 벽려혼은 흑천왕에게 오천 군사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당장은 거현 공격 중에 살아남은 이천 병사밖에 줄 수가 없었다. 장광군의 대방왕이 흑천왕을 인정하지 않고 시비를 붙여오면 흑천왕이 단 이천 병사로서 맞아 싸우기 어려웠다. 흑천왕은 벽려혼에게 물었다.
"제왕 전하. 향후, 백제와 관계를 어쩔 것이오?"
벽려혼이 응답하였다.
"그야 친선 우호적으로 나가야지. 그들이 내 영역을 뺏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들이 장차 본토로부터 증원군이 오더라도 그 군대로서 서북의 연나라를 치러 간다면 그 길을 내줄 것이오. 그러니 동청주자사는 지금의 동청주에 속한 동래군, 동모군, 장광군 이외에 청주 땅을 욕심내지 말라고 전하시오."
벽려혼은 이미 백제와 결별 아닌 결별을 하였다.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자기 멋대로 싸워서 얻은 땅을 또 다 자기 멋대로 나누어주었고 대방왕은 동청주에 고립되어 있다. 코끼리같이 커진 벽려혼이 송아지만한 동청주자사 앞에서 굽실거릴 수 없었다. 그런 사정은 사대천왕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대방왕 전하에게 그 말을 오해없이 전하지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누가 할 것인지 흑천왕이 물었다. 마침 대방왕에게 돌아가기로 한 사비공주가 있었으니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려서 사비공주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일은 역시 사비공주가 좋겠소."
벽려혼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비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벽려혼과 말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그녀였지만 거절의 말은 분명히 하여야 했다.
"세상에, 이제 나는 청주 일에 관여하지 않겠어요."
"그럼 그냥 우리 실정을 전해 주시오. 군사가 청주를 떠나서는 안되지만 떠난다니 할 수 없구려. 그리고 북해군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그것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사비공주를 위한 일이오. 그대로 비워두고 기다리겠소."
벽려혼이 다시금 미끼를 던졌으나 사비공주는 냉담하였다. 그만 일어나서 자기 처소로 돌아가버렸다. 다음날 일찍 사비공주는 대방왕이 있는 장광군으로 떠났다. 뒤늦게 흑천왕은 백제 병사들 이천을 인솔하여 불기성을 향하고 벽려혼과 부림은 사마 공천왕과 단관과 같이 청주로 향했다. 벽려혼은 지름길을 택하여 기산(1032m)을 넘어서 청주성으로 들어갔다.
청주 광고성에는 아직 청주성의 일만사천 병사가 남아 있었는데 청주부장 풍운검 장정이 지휘하였다. 벽려혼은 청주성에 남아 있던 군사 중 사천을 청주부장 장정에게 남겨주고 청주 광고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주 병사 일만을 뽑아서 단관을 앞세워 다시 서북쪽 정벌에 나섰다. 이번에는 부림을 청주성에서 쉬게 하였고 대신에 풍패와 공천왕이 벽려혼을 따라나서서 제군 임치성으로 향했다.
청운검 장영이 위견을 대리하여 먼저 접수한 제군 임치성으로 행군하는 동안에 친나라 낙안군 태수 부장()은 군사들을 이끌고 도망쳐버렸다. 벽려혼은 그래서 싸우지 않고 낙안군을 얻어서 낙안군을 풍승상의 식읍으로 삼았다. 낙안군은 동래군처럼 백제로 떠나가는 청주의 바다 관문이었다. 게다가 낙안군에는 삼십 년 전의 전쟁에서 벽려울과 풍패을 따르다가 패전하고 백제로 돌아가지 못한 병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중 늙은 병사인 모도(牟度)가 제일 먼저 풍패을 알아보았는데 풍패은 즉시 그를 낙안국 내사로 임명하여 낙안성을 맡겨두었다.
낙안국 내사란 낙안국에 있지 않은 풍패를 대신하여 태수 대신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관직이라서 태수와 동급이었다. 그 다음으로 봉의(封懿)라는 장년의 병사가 인사를 하였다.
"너는 누구냐?"
"저는 본래 발해왕이었던 봉방(封放)의 아들인데 선친이 연나라에 목숨을 빼앗기자 이곳으로 도망와서 숨어살고 있었습니다."
발해군은 단감과 벽려울이 영지성에서 청주성으로 옮겨올 적에 같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 봉방이 스스로 발해왕이 되어서 단감과 협력하였었다.
"그렇구나, 다시 벽려왕을 따르면 너에게 발해군을 찾아주마."
"감사합니다."
벽려혼은 청주 서쪽 정벌이 너무 쉬운 것 같았는데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망친 낙안태수 부장과 제남군태수 왕암(?巖)이 합세하여 저항했던 것이다. 제남군의 치소는 역성(歷城)이었고 청운검 장영이 공격 선봉에 섰다. 대나무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올라가 성벽 위에서 싸우는데 치열한 공방전 중에서 학과 같은 풍패의 모습이 나타났다.
풍패는 그저 유유히 홀홀단신으로 성벽 위로 날아올라서는 외팔이지만 왼손에 잡은 비류혼도(沸?魂刀) 하나로 한 칼에 여러명을 베어버렸다. 벽려혼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풍패의 무공이 생각보다 고강하고 빠른 것을 보고 경탄하였다. 힘에서는 벽려혼의 치우검이 더 나을지 모르나 풍패의 무겁고도 이상하리만치 빠른 그의 벽류도법을 당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다.
풍패는 성벽 위에서 성루로 쫓아가서 제남군 태수 왕암과 낙안태수 부장의 합동 공격을 받았으나 어느새 "비류혼(沸?魂)"을 외치고 두 태수의 허리를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벽려혼은 풍패의 가공할 괴력을 바라보면서 비류혼도를 쓰는 벽류도법(碧?刀法)의 묘리를 언제 꼭 깨우치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더욱이 좌수도법이니 오른손의 취운검과 예측 불허의 조화를 이루어 그를 천하무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벽려혼은 제남군 역성이 함락되자 금위대장이었던 연호에게 제남태수를 맡겼다. 벽려혼은 일단 청주는 거의 전역을 다 차지하였으므로 다음 전략을 세웠다. 청주의 서북쪽은 기주(冀州)라고 하였다. 기주는 본래 전연황제 모용위의 수도였던 업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부견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친나라의 기주를 장락국 신도현에 옮겨 두었다가 다시 업성에 두었다.
이 기주에는 위군(魏郡; 업성-현재 하북성 한단시 남 臨-하남시 安陽), 여양군(黎陽郡; 하남성 학벽시 동남 ?縣), 광평군(廣平郡; 현재 하북성 邯鄲市 東), 양평군(陽平郡; 한단시 동, 광평 동 館陶), 양국군(襄國郡; 현재 邢台市 任縣), 조군(趙郡; 현재 석가장시 남 高邑), 중구군(中丘郡; 석가장 동남 趙縣), 거록군(鉅鹿郡; 형태시 동북), 장락군(長樂郡; 信都-북연황제 풍발의 고향, 평양고분 유주자사진묘의 고향.
현재 衡水市), 무읍군(武邑郡; 형수시 동북), 건흥군(建興郡; 형태시 동 廣宗), 평원군(平原郡; 德州市 南 平原), 낙릉군(樂陵郡; 덕주시 동북), 발해군(渤浿郡; 창주시 서남 南皮), 장무군(章武郡; 失?), 하한군(河閒郡; 보정시 동남), 고양군(高陽郡; 보정시 동남 고양), 박릉군(博陵郡; 정주시 동남 安平);, 청하군(?河郡;형태시 동, 건흥 동), 중산군(中山郡; 保定市), 상산군(常山郡;行唐 정주시 서) 등이 속하였다.[한자 없음 다수인 상태, 어쩔 수 없군요]
이 기주는 당시 낙양 동쪽 영양성(榮陽城)에서 북동류하여 천진(天津)으로 나가던 고대황하 하류의 하북평야 요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었다. 현재 연왕 모용수가 부비가 지키는 업성을 찾으려는 것도 명실공히 연나라 도읍을 되찾고 황하 하류 평원지대를 장악하는 기주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기주의 여러 군 중에서 장무군(천진)과 발해군, 낙릉군, 평원군, 연주의 제북군 등은 황하의 동남쪽에 있었으므로 첫번째 벽려혼의 공격 목표는 바로 낙릉군과 평원군이었다.
벽려혼은 제남의 역성에서 가까운 평원군으로 진격하였다. 벽려혼은 황하가의 평원군을 치면 낙릉군은 포위되어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평원군에도 이미 벽려혼이 신출귀몰하여서 청주성을 장악하고 동진군을 물리친 후에 서쪽 정벌에 나섰다는 소문이 전하여졌다. 청주 군대가 평원성에 이르자 10월이지만 차가운 비가 내려 병사들을 움추리게 하였다.
평원군 태수 필치(畢治)는 성벽을 높이 수축하고 농성을 하였다. 열흘이 지나도 평원군은 함락되지 않았다. 모용수가 업성을 공략하지 못하는 것처럼 평원성은 필치의 농성 전략이 완벽하였다. 벽려혼은 평원성의 병사를 반으로 나누어서 이웃한 낙릉군 공략을 따로 진행하였다. 낙릉 공격의 선봉으로 나선 것은 노익장인 풍패와 가기주자사인 단관이었다. 낙릉군 태수 부도(都)는 병사가 삼천뿐이지만 성문을 걸어 잠그고 북쪽의 발해군 태수 부자(資)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부자가 병사들을 데리고 낙릉으로 지원하러 오니 풍패의 군대와 백중세여서 낙릉성도 쉽게 공략될 수 없었다. 풍패는 낙안군을 통해 북해도에 사자를 보내어 우사(雨師) 왕구를 초빙하기로 했다.
한편 동청주 동모성으로 돌아간 사비공주는 동청주자사 대방왕 여계를 장광군성에서 만났는데 동래태수 여암과 동모태수 여귀도 함께 있었다. 사비공주가 그간의 전황과 조금은 제멋대로 이루어진 논공행상을 말하자 대방왕은 묵묵부답으로 듣기만 했다. 동래태수 여암은 땅을 쳤다.
"그 미친 놈이 겨우 오천 병력으로 청주성을 치고 또 동진군 이만을 물리칠 줄은 정말 몰랐어."
동모태수 여귀도 억울해 하였다.
"부왕, 그러게 청주성 공격을 서둘러서 우리가 했어야 해요. 부왕이 말리시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선수당하고 일이 틀어졌어요."
그러나 대방왕은 다시 눈을 들어서 모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그놈 뜻대로 되겠느냐? 곧 중평제황이 바다 건너 오신다는 기별이 왔다. 적어도 3만 대병이 제황을 따라 건너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자중하고 기다려라."
동청주자사 대방왕 여계는 자신의 군령을 무시하고 떠나간 사대천왕에 대한 원망도 깊었다. 그러나 그들을 도로 불러들일 수도 없었다. 이미 그들이 자사가 되고 태수가 되어 넓은 땅을 가졌는데 그들의 땅을 이유없이 도로 빼앗을 수가 없었다. 한 곳만 뺏아도 나머지 청주 모든 지방에서 대방왕에게 반기를 들 것이었다.
단지 머리만 쳐버리자. 벽려혼 하나만. 대방왕 여계는 중평제황의 군대를 빌어서 청주 광고성의 벽려혼을 쳐서 다시 백제 왕실의 기강을 세우고 대방왕 스스로 대륙백제 패왕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면 다시 사대천왕도 그의 발밑에 부복하리라고 생각했다. 사비공주는 대방왕의 분노어린 눈길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벽려혼과 대방왕이 중국 땅에서 싸운다면, 그것은 백제의 큰 손실이었다. 대방왕이 물었다.
"그래, 사비공주는 벽려혼과 붙어서 이제까지 나를 배반한 것이 아니었더냐?"
대방왕이 추궁하니 사비공주가 할말이 없었다.
"전하, 겉보기에는 그러하나 제가 돌아온 것을 보면 제가 백제인이 아닙니까?"
여암이 사비공주를 꾸중하였다.
"하지만 벽려혼 그놈을 너무 키워놨지 않느냐?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더 커지고 있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벽려혼은 가기주자사로 단관을 임명했는데 이는 황하 동남의 낙릉, 평원, 발해, 장무군을 치겠다는 것이옵니다. 그러고 나면 청주 제왕 벽려혼에 비하여 정말이지 동청주는 왜소해질 것입니다."
모두들 침묵하였다. 여귀는 부왕인 대방왕의 밑에서 꼼짝 못하고 그의 야망을 죽여왔으니 더욱 한숨만 늘었다. 사비공주는 한숨 쉬는 여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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