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좀 심하오. 나는 연기를 잘 못하외다."
벽려혼은 거복을 설득하였다.
"거현령, 여기는 청주 땅이오. 거현령도 청주 사람 아니오? 청주 사람들이 동진군에게 짓밟혀서야 되겠소?"
"그대들은 백제인이잖소?"
거복이 청주 본토인도 아닌 백제인에게 굴복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주인들을 그대로 쓰지요. 독천왕 탁발필은 불기산의 호걸인데 그 위명을 알 것이오. 청주의 위인인 고밀태수 모수지도 그대로 남아있고 제군태수 위견도 평창태수로 지위를 이어가고 있고. 그리고 거현성을 우리의 동완군성으로 만들어서 거현령을 동완태수로 임명하고 군사 삼천을 계속 부리도록 하겠소. 사실 저족의 친나라나 남만의 동진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차라리 백제와 청주 동래인은 혈통적으로 같은 부여의 피가 통하지 않습니까?"
독천왕이 벽려혼에게 제동을 걸었다.
"어어, 동완군수는 이미 공천왕으로 내정했는데."
"공천왕은 재주가 많아서 다른 자리도 얼마든지 있어요. 서로간의 긴밀한 협조를 위하여 공천왕은 청주사마를 시키는게 좋을 것 같소."
독천왕이 거현 현령을 회유하여 당장 써먹어야 하는 것을 알고 물러섰다.
"하지만 서주자사 낭야왕은 절대 양보할 수 없소이다."
"자, 거복현령. 내가 동완군수를 보장할 테니까 결정을 하세요."
벽려혼이 재촉하자 거복은 고민하다가 투항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럼 약속을 지키시오. 도중에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기 없소이다."
"아무렴. 청주 제왕이 약속한 일인데. 거현령이 공을 세우면 틀림없이 그 보답을 하지. 다시 돌아가서 고소를 멋지게 한번 더 속여준다면야 개국공신으로 대대손손 칠대까지 동완군수를 보장하지."
벽려혼의 제안대로 거복이 다르겠다고 하니 독천왕이 물었다.
"그런데 고소군과 돌아오면서 다시 여기에 이르면 고소를 이 자리에서 다시 죽여버릴까?"
"좋을대로 하시오. 그보다는 제성 안으로 유인하여서 제성 안에서 잡아보는 것도 좋겠소."
독천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복에게 말했다.
"앞으로 내 탁발을 존경하게 될거야."
독천왕의 탁발은 이미 사향의 머리를 터뜨리고 나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거복 현령이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아, 천만에요. 진작부터 이미 존경하고 있습니다."
거복 현령이 앞서서 말을 돌려서 거현으로 향했고 그 뒤를 독천왕이 따라갔다. 벽려혼은 장천왕과 단관의 병사들을 불러서 청봉령에 흩어진 동진 병사의 시체를 치우고 다시 동서 양쪽으로 매복을 시켰다. 독천왕과 거복은 한 시진을 달려서, 이미 거현을 떠나 북상중인 고소군의 긴 행렬을 만났다. 거복이 앞서서 고소 장군에게 다가갔다.
"고장군, 돌아왔습니다."
"거현령, 어찌 벌써 돌아왔소?"
거복이 얼굴이 환하지는 않았지만 고소는 기분이 좋은 참이었다. 그래서 거현령의 얼굴빛을 신경쓰지 않았다.
"동진군이 제성에 이르자 벽려혼의 군대가 패주하였습니다."
"아미타불."
독천왕이 역시 합장하면서 거복의 말을 믿게 하였다. 회음태수 고소는 거복과 독천왕을 너무나 빨리 다시 보고서도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래? 벌써?"
회음태수 고소는 동진군이 최정예이니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거복이 계속 거짓으로 복하였다.
"그래서 선봉장 사향 장군이 제성에 입성하여 성을 지키고 제가 먼저 고장군께 달려 왔습니다."
"음, 수고했소. 과연 전광석화처럼 해치웠군. 동진군도 청주군보다 빠를 수 있지. 암, 얼마든지 빠를 수 있구말구."
회음태수 고소는 여유가 생겼다. 이제 청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벽려혼의 군대는 오합지졸이 틀림없다.
"그런데 전하 벽려혼이 곧 반격해올 것이라고 하니 빨리 서둘러 제성으로 입성하십시오."
거복은 거짓말을 하느라고 식은땀을 흘렸지만 독천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탁발을 두드려서 거복에게 만족을 표시했다. 거복도 뒤를 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소는 승전 소식에 취해 기분이 들떴지만 서둘지 않았다. 예정대로 일만오천의 군대와 오후 무렵에 천천히 청봉령을 넘었다. 사비공주와 부림은 함께 말 하나에 올라타고 그 뒤를 쫓았고 독천왕이 뒤로 빠져서 그들을 호위하였다. 그러나 고소군의 선두가 청봉령에 들어서니 곳곳에 동진 선봉군이 흘린 피가 땅에 묻어서 채 깨끗하게 닦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게 뭐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회음태수 고소가 흥건한 피를 보고서 뒤돌아서 물었다. 동진군이 흘린 피에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소를 따르던 거복이 말했다.
"이곳에 약간의 백제군 정찰병이 있었는데 선봉군이 쳐죽이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고소는 무척 신중하였다.
"이곳에 왠지 살기가 흐른다. 모두 멈추어라."
고소는 전후 좌우를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필경 저들의 매복군이 있을 것이다. 선봉군은 요행히 지나가게 두었어도 우리 중군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여봐라, 군대를 뒤로 돌려라. 후퇴한다."
그러자 거현 현령이 급히 만류하였다.
"아니 고장군, 조금만 더 가면 청봉령을 다 넘는데도요?"
"그래도 아니다. 여봐라. 당장 후퇴한다."
고소가 후퇴 명령을 내리며 어느새 말을 뒤로 몰았다.
"후퇴, 전군 후퇴다."
고소의 고함은 매복중인 백제군에도 들렸다. 백제군의 계획이 반만 성공했고 반은 틀어졌으나 장천왕이 매복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쳐라, 공격이다."
양쪽 골짜기에서 매복한 백제 병사들이 동진군을 공격하여 화살 세례를 퍼붓고 장천왕이 다시 청주 기마병을 이끌고 쳐내려갔다. 동진군이 서둘러서 뒤로 쫓겨가는데 후미에 있던 독천왕은 돌아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고소를 찾아나섰다. 사비공주는 부림을 안고 말을 탄지라 몸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일단 동진 대병의 회군을 피하여 옆으로 비켜났다. 동진군은 다시 거현 방면으로 도망쳤고 그 뒤에는 회음태수 고소와 거현현령 거복이 뒤쫓아왔다. 독천왕은 고소를 발견하고 말 위에서 탁발을 준비하고 있다가 달려오는 회음태수 고소에게 소리없이 돌진하였다. 회음태수 고소는 독천왕이 탁발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멈칫하였다.
"너 이놈, 무슨 짓이냐? 거복, 나가서 막으라."
고소는 호위병사들과 함께 독천왕 쪽으로 돌진하였다. 거복은 독천왕 쪽으로 가다가 탁발의 반경을 비켜서 옆으로 돌아서더니 다시 거현으로 향해 달렸다. 그 사이에 독천왕은 호위병들을 헤집고 고소를 향해 탁발을 날렸으나 왼쪽 어깨쭉지를 빗맞추고 말았다. 회음태수 고소는 탁발에 맞아서 어깨뼈가 부서졌으나 말에서 떨어지지는 안았다. 고소는 도망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대머리놈, 두고 보자."
회음태수 고소는 내쳐 달려서 도망가고 독천왕은 고소의 수많은 호위병 때문에 가로걸려서 고소를 다시 잡을 수 없었다. 독천왕은 사비공주와 부림이 뒤에 있으니 그들을 추격하여 달려갔다.
"기다려라, 고소. 이 불기산 독천왕이 자비를 빌어줄께."
독천왕은 주위의 동진병사들에게 탁발을 휘둘러대며 길을 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의 불호 횟수가 동진군의 머리 떨어지는 횟수였다. 독천왕은 고소를 추격하다가 동진병사들이 가로걸려서 그만 다 잡은 고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럴 때는 활을 쏘아야 되는데 독천왕은 활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동진군은 가로걸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히 독천왕의 제사를 받았다. "아" "미" "타" "불" 독천왕은 불호를 더 짧게 끊지 않으면 안될 만큼 동진군을 쓰러뜨렸다.
사비공주는 겁에 질린 부림을 안고 북쪽으로 달려서 다시 독천왕을 만났다. 독천왕은 인질을 되찾자 손놀림을 멈추었다. 이번 매복 공격에서 동진군은 선두 천여명을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퇴각하였는데 거현성으로 퇴각하였는데 벽려혼과 장천왕의 병사들이 끝까지 추격하여 거현성에 이르기까지 이천여명을 더 베었다. 그래서 거현성으로 쫓겨 들어간 동진군은 아직도 일만이천이었다.
백제는 병사 육천여명으로 거현성 북문 앞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이만의 동진 대군은 일만이천 명으로 줄고 단 육천여명의 백제군에게 쫓겨서 거현성 안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백제군은 북쪽 성문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위협하였다. 회음태수 고소는 북쪽 성루에서 백제군을 내려보았다.
"저것들이 우리를 다시 성밖에 나오게 하려고 고작 오륙천 군사를 성 앞에 배치하여 유인하고 있구나. 하지만 안 속는다. 뒤에 일만명은 감춰놓았을 것이다."
독천왕은 거현성 앞에 이르러서 소리를 질렀다.
"이놈, 고소야.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
회음태수 고소가 다시 찾아온 독천왕을 알아보고 물었다.
"대체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불기산의 독천왕 탁발필, 신임 서주자사 낭야왕이다."
고소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저런 놈을 중으로 알고 속았구나. 아이고 어깨야. 고소는 어깨를 치료하고 싸매면서 선봉군으로 앞서간 사향을 걱정하였다. 동진국 태보 사안의 조카인데 그를 잃었으면 큰일이었다. 마침 거현태수 거복이 그의 곁에 있었다.
"거복,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거복은 꿇어엎드려서 진땀을 흘렸다. 어쩌다가 고소를 따라서 도로 성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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