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7. 천륜을 어긴 골육지정(骨肉之情) - 3

금박(金舶) 2015. 5. 23. 15:47


  "그렇지. 그 분은 바로 본왕의 부왕이시다. 따라서 부왕을 찾는 일이 아주 급하다."

 

  그 소리에 놀란 독천왕이 물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야? 누구를 찾는다구?"

 

  부성주 장화가 아는 척을 하고 대신 대답하였다.

 

  "탁발장군도 한때 연나라 수도 업성에 계셨으니 아실 것이오. 연나라  때에 백제에서 온 사신이었던 여울이 바로 여기 계신 사비왕의 부왕이라고 하는데 소관이 찾아드리려는 것이오."

 

  장화의 설명을 듣고 독천왕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요? 그때 산기시랑 여울이 귀하의 부왕이라는 것이?"

 

  사비왕 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 분이 여기 있는 우리 남매의 부왕이시오."

 

  "그가 사비왕 남매의 부왕? 그것 참."

 

  독천왕이 혀를 찼다.

 

  "탁발장군. 본왕의 부왕을 잘 아시오? 나는 본래부터 부왕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탁발장군은 아시겠군요."

 

  "남들 아는 정도지요. 그 이상으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소. 직접 만나볼 기회가 곧 있을테니."

 

  독천왕은 갑자기 말을 흐려버렸다. 그날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어울려서 밤새워 술을 마시며 놀았다. 자정 무렵이 되어 여비는 사비공주의 손목을  붙들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일어섰다.

 

  "그럼, 형님들. 재밌게 노시오. 본인은 하룻밤 현령으로서 현령의 방에 들어가겠소."

 

  석성왕 여귀가 사비공주를 붙들고 싶어 따라 일어났는데 여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비왕 여암도 그들의 결혼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왕 가약을 맺었다니, 상(翔)아 네가 저 어린 녀석을 잘 키워 보거라."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던 여귀는 닭쫓던 개 모양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여비가 현령의 침대에 누워 사비공주의 옷을 벗기려는데 덜컥 독천왕이 신방에 뛰어들었다. 사비공주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어젯밤처럼 그녀를 감시하러 다시 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여비야, 잠깐 보자."

 

  독천왕의 얼굴이 꽤나 심각했다.

 

  "왜요?"

 

  "따라와"

 

  사비공주는 여비가 멈칫거리자 '다녀와' 라고 말했는데, 그 길로 두 사람은 긴 이별을 하였다. 아니 여비와 사비공주로서는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독천왕, 무슨 일이에요?"

 

  여비는 밤이 되자 다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독천왕이 신혼의 밤을 잠깐이라도 빼앗자 여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독천왕은 그를 사대천왕이 모인 곳에 데려갔다.

 

  "너는 네 부친에 대해서 아니?"

 

  "아뇨, 몰라요."

 

  "대랑이 말 안 해줬어?"

 

  "아뇨, 하지만 독천왕도 알 것 같아서 며칠전부터 독천왕에게 물으려던 참이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그게 참으로 곤란하게 되었다."

 

  "뭐가 잘못되요?"

 

  그때 흑천왕이 잘 모르고 끼어들었다.

 

  "아, 그래 독천왕은 연나라 장수였으니까 소천왕의 장인인 여울을 업성에서 봐서 잘 알겠구만."

 

  그 말을 듣고 여비가 다시 물었다.

 

  "독천왕이 나의 장인 여울이라는 사람을 잘 알아요?"

 

  "잘 안다."

 

  독천왕이 돌아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때까지도 여비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를 깨닫지 못했다.

 

  "장인은 지금 살아계신가요?"

 

  "그럴게다. 죽었다는 소리를 못들었으니까."

 

  "그럼, 대체 어디 있을까요?"

 

  "오왕 모용수와 장안성에 살고 있을 거야."

 

  "오왕 모용수라면?"

 

  독천왕은 선비족 탁발부 출신으로서 연황실인 선비족 모용부의 통치를 받아 연나라 태보 모용각의 휘하 장수였다. 태원왕 모용각이 367 년 사망하기전까지는 업성에서 지냈으므로 연나라 사정을 소상히 알았다.

 

  "본래 오왕 모용수는 연나라 황제 모용황의 5째 아들이었는데, 모용황의 4째 아들인 태원왕 모용각과 함께 연나라를 받치는 양대 기둥이었다. 모용황의 손자인 모용위가 황제가 되고서 태보 모용각이 죽자 사람들이 모용수를 시기하고 죽이려고 해서 오왕 모용수는 도망쳐서 친나라 부견왕에게로 도망갔다. 그후 부견왕 밑에서 조카의 연나라를 쳐서 연나라를 없애고 중원을 통일한 후에 친나라 천하에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거든."

 

  여비가 묻자 독천왕은 어렵게 어렵게 대답하였다. 말은 해야겠는데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왜 장인이 모용수와 살고 있죠?"

 

  "그것은 모용위 황제 때에 백제 사자인 여울이 국교를 맺으려고 병인년(366년)에 연나라 업성에 들어갔는데 모용위 황제가 여울을 4 년간이나 인질로 억류하면서 오왕 모용수의 셋째딸 모용빈을 주어 결혼시켰기 때문이지. 훗날 오왕 모용수가 동진 군사를  물리쳐서 이름이 높아지자 모용위 황제의 동생이자 태사인 모용평이 숙부인 모용수를 모함하여 죽여버리려고 했고 모용수는 달랑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부견에게 도망갔는데 백제의 여울 왕자는 모용빈과 업성에 남아서 계속 인질로 살았단다."

 

  "그래서요?"

 

  "그러다가 모용수가 부견의 친나라 군대를 끌고 연나라 수도였던 업성을 포위했을 때, 산기시랑 여울이 백제, 고구려 인질들과 힘을  합쳐 성안에서 성문을 열어주었고 업성이 함락되었다. 장안에서 나온 저족 부견의 친나라로 강북이 통일된 것이야. 그러니까 여울은 부견황제도 좋아해서 관직을 주었고, 또 오왕 모용수의 사위로서 지금까지도 위세 부리며 장안성에서 잘 살고 있겠지."

 

  여비가 그간의 사정을 거의 다 알게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장인은 백제 황태자였는데 왜 백제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사실 나는 업성이 부견의 친나라에 함락되기 삼 년 전에 업성을 떠났고 그후의 일을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에 이미 인질로 중원에서 보낸 4 년의 세월이 너무 길어서 말이다. 이미 4 년 동안에 황태자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지. 그후 여울은 장안성에서 모용빈 공주와 세 아들을 낳았단다. 여만, 여민 그리고 여관 이렇게 삼형제다. 어쩌면 그래서 친나라에 주저앉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독천왕의 짐작이지만 거의 사실이었다. 연왕 모용위는 백제 황태자인 여울을 억류하였다가 백제왕이 죽으면 그때 여울을 새로운 백제왕으로 돌려보내고 모용빈이 출산한 새로운 백제 황태자를 다시 인질로 연나라 도성에 잡아 두려고 했다. 백제에게 대를 두고 황태자를 연나라의 인질로 받치라는 간계였다. 그러나 백제는 연나라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 백제는 368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고 사비왕 여울의  동생이자 둘째 왕자인 한산왕 여수가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그 즉시 한산왕 여수가 비어있던 백제 황태자로 등극하였다가 374 년부터 383 년까지 재위하여 16대 근구수제황이라 하였다. 결국 여울은 연나라의 인질 책략  때문에 억류되어 백제 황태자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그래서 백제에 두고온 가족들을 다 버리고 장인은 결국 중원의 낭인처럼 사시게 되었군요. 아무튼, 하루빨리 장인을 만나보고 싶어요."

 

  여비의 장인이라는 말을 듣고 독천왕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휴"

 

  하지만 그가 왜 한숨을 쉬는지 여비는 아직 짐작도 못했다. 그때 장천왕이 독천왕에게 물었다.

 

  "대형. 대랑도 역시 업성에 살았었다고 했지? 대랑의 아버지는 누구야?"

 

  "대랑의 아버지는 나도 몰라. 아무튼 그때 대랑은 풍비(馮婢)라고 하였지."

 

  독천왕은 기실 업성에서부터 대랑을 알고 있었다. 대랑은 업성 오왕가에서 모용빈 공주의 시녀로서 자랐으며 풍비(馮婢)라고 불렸었다. 그리고 어느날 모용빈 공주가 백제사자 여울과 결혼했고 풍비도 공주를 따라서 당연히 여울의 집으로 들어갔었는데 어느날 풍비가 업성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독천왕은 훗날 불기산 산채에서 산적 두목을 하며 살다가 다시 풍비였던 대랑을 만났고 풍비가 이미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여비라고 하여서 여비의 아비가 산시시랑 여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풍비라면, 대랑이 시녀였다는 것이야? 도대체 누구의 시녀였지?"

 

  흑천왕이 다시 물었다. 독천왕을 뺀 나머지 삼천왕과 여비 넷이서 독천왕을 몰아부치는 꼴이었다.

 

  "그게 대랑은 처음부터 오왕 모용수의 딸인 모용빈 공주의 시녀였어."

 

  독천왕이 결국 대답을 했는데 여비는 아직 뭐가 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모용빈은 여울의 부인이고?"

 

 흑천왕이 다시 묻자 사비왕 여울과 그의 부인 모용빈의 시녀였던 풍비 사이에 불륜이 저질러진 것이라고 모두들 상상하게 되었다.

 

  "독천왕, 그럼 내 친아버지가 누구에요?"

 

  여비가 다시 물을 때 흑천왕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천왕을 끌고 밖으로 나가면서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