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7. 천륜을 어긴 골육지정(骨肉之情) - 2

금박(金舶) 2015. 5. 22. 15:59


  어느덧 성루 위에는 백제기가 내걸렸다. 얼마후 해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백제의 대방왕 여계와 사비왕 여암이 말을 타고 들어와 입성하였다. 그날 저녁 불기성내 현청에서 회의가 열렸다. 사비왕 여암과 대방왕 여계는 왼쪽에 상을 놓고 앉고 독천왕과 공천왕은 오른쪽에 상을 놓고 앉았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석성왕 여귀와 사비공주 그리고 여비가 상을 따로 놓고 앉았는데 석성왕은 사비공주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옆에는 투항한 부성주 장화가 따로 상을 놓고 앉았다.

 

  서로 긴장감이 돌고 있었는데 불기현 관군을 제압한 것은 백제군이 아니라 산채의 식구들이었고 불기현성의 성문을 열게한 것도 산채의 위엄이었다. 그런데 성 망루 위에 내걸린 깃발은 백제국의 백국(百國) 깃발이었다. 대방왕 여계가 먼저 말을 열었다.

 

  "산중호걸들이 노고가 많으셨소. 기왕지사 일은 저질렀는데 장차 뒷수습은 어찌 할 것이요."

 

  이미 불기산채가 친나라에 반역한 것이 되었는데 산중호걸들이 끝까지 지켜낼 수 없으면 백제의 힘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이 지역을 백제에게 양보하라는 소리였다. 독천왕이 대꾸했다.

 

  "뭐, 왕후장상이 따로 있소. 이렇게 시작해서 오왕도 되고 월왕도 되고 제왕도 되고 연왕도 되는 것이지."

 

  독천왕은 백제군의 위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사비왕 여암이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우리 백제군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불기현성을 뒤집을 생각이었소?"

 

  "뭐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소. 일은 우리가 저질렀고 당연히 우리가 책임질 것이오. 게다가 당신들이야 본래 타고 온 배가 있으니 언제라도 다시 타고 떠나면 그만 아니겠소. 전황이 불리해져서 위급할 때 떠나갈 수 있는 당신들과 끝까지 이곳에 남아야 하는 우리들인데 어찌 당신들만 믿고 이만한 일을 벌였겠소?"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비왕 여암은 대화를 자르고 당장 호통을 쳐서 위엄을 과시하고 싶었지만 욕심이었다. 이제 이 지방의 돌아가는 사정을 깨달았다. 평온한 불기현성의 성내 분위기, 아니 징집을 피하여 산채로 숨었던 천여명의 장정들이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와 벌어진 성안팎의 잔치 분위기로 보나 뭐로 보나 이 불기산 산적들과 맞서서는 백제군이 비록 눈 앞에서 순간적인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그 승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또 그만큼의 많은 손실이 있을 것이었다. 여비와 결혼하여 양 진영의 중간에 선 사비공주가 조정자로 나섰다.

 

  "탁상공론은 그만하고 요점을 말하지요. 불기현성과 불기산이 가까우니 불기산의 형제들은 불기현을 스스로 다스리도록 하세요. 불기현성은 소천왕이 새로운 현령으로서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우리 백제는 청도 섬을 갖고 그곳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또 불기현 서북쪽의 옛 즉묵현성을 새로 고쳐서 백제성으로 쓰는 것이 좋겠어요. 그곳을 백제 성양군(城陽郡)이라고 새로 이름부쳐서 석성왕(여귀)이 태수가 되어 다스리는 것이지요."

 

  그녀의 제안은 참으로 절묘하게 여러  사람을 만족시켰다. 불기현을 불기현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고 자신의 꼬마신랑인 소천왕을 현령으로 임명하여서 불기산 산채 식구들에게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기현의 한 구석으로 편입되었던 옛 즉묵현을 되살려서 그곳을 백제의 자치군인 성양군으로 삼고, 성양군 태수 위치에는 대방왕의 아들인 석성왕 여귀를 두는 것이다. 그리되면 석성왕 여귀는 이곳의 태수로서 이곳의 현령인 여비보다 명목상으로 위에 서는 것이다.

 

  또한 중국에는 군을 다스리는 주의 자사가 있는데 이 자사의 반열에 자신의 오라버니인 사비왕 여암을 두면 되었다. 당시 고구려왕은 중국에서 고구려왕겸 영주자사라고 칭했고 근초고제황은 동진에서 자사보다 아래인 백제왕겸 낙랑태수라고 칭했다.

 

  "그리고 장차 장광군이나 고밀군, 낭야군 등을 쳐서 통합하면 동청주(東靑州)를 이곳에 설치해서 여암 오라버니가 동청주자사에 오르시는 것이죠. 그리고 서주, 청주, 연주 등을 통합하면 대방왕이 백제 좌현왕이 되어 대륙백제의 사주자사를 통할하는 것이에요."

 

  사비왕 여암이나 대방왕 여계는 사비공주의 계획안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한번 대륙에 웅지를 펴보자. 듣고있던 공천왕이 하품을 했다.

 

  "달걀을 까서 병아리를 치고, 닭을 수 백 마리 키워다가 소 한 마리 바꾸는 것은 시간 문제군. 땅을 그만큼 따먹었으면 이제 황제될 사람만 정하면 되네."

 

  백제에게 침략당한 가야국에서 바다 건너온 공천왕은 백제와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그러니 백제 황제를 내세울 수 없으므로 해본 말이었다. 사비공주가 정색을 하였다.

 

  "그건  안되요. 백제 중평제황이 우리에게는 하나뿐인 태양이에요."

 

  "아니, 뭐, 이쪽 땅덩어리가 더커지면 이곳에서 백제 제황을 선출하고 저쪽은 우현왕이라고 부르지 뭐."

 

  공천왕이 비꼬느라고 한 말이지만 사비왕 여암에게는 그 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본래 백제의 원자, 즉 근초고제황의 황태자인 사비왕 여울의 장손으로  태어났으나 지금은 숙부였던 근구수제황과 숙부의 아들 중평제황에 의해서 황좌에서 한발 밀려난 여암이었는데, 새로운 백제 제황 즉위 기회가 중국 땅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앞서 근구수제황은 황태자가 아님에도 일본 정벌에서 공을 세운 다음에 여암의 부왕 여울이 연나라에 억류되어 황태자로서 실권한 틈에 스스로 황태자로 영전하고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사비왕이 입을 열었다.

 

  "공주의 지계가 과연 십년 앞을 내다보고 있구나. 불기산의 형제들이 받아들이면 좋겠소. 그리고 장차 본왕과 우리 백제군과 동고동락하면서 앞으로의 모든 전투를 같이 치러서 영광을 같이 나누는 것이오"

 

  하지만 독천왕이 손을 저었다.

 

  "우리에게는 고작 현령 자리 하나 먼저 줄테니 목숨을 걸고 협력하라는 것이오? 그 위에 태수, 자사, 좌현왕 층층이 백제 사람을 모시고? 영광을 같이 나누자면 그래서는 안될 것이오. 지금 산채의 군사가 일천이요, 관군의 포로가 일천 사백인데 포로 중에서도 잘하면 천 명은 우리 군사가 될 것이오. 그런 반면에 백제 군사가 고작 이천여 명이오. 그러면 서로 반반인데 승진할 자리가 공평하지 못하다면 동의할 수 없소."

 

  그러자 사비왕 여암이 말을 고쳤다.

 

  "그 말도 맞소. 장차 나라의 기틀을 세우자면 외직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직도 있어야 하는데 어디 한 두사람으로 될 일이겠소. 나는 장차도 대방왕을 보좌하여 공명같은 승상 노릇을 할 터이니, 독천왕이 장차 백제 정서대장군의 소임을 맡으시오."

 

  "그럼 불기현령으로 소천왕을 추대하고 성양군 태수로 석성왕 여귀를 추대하고 내가 좌장군을 맡아 본토의 병력을 통할할 것이니 백제 사비왕은 훗날 승상을 하고 지금은 우장군을 하시오. 그리고 차후의 인사는 공평하게 협의하여 진행하도록 합시다."

 

  사비왕 여암이 상을 차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 그가 벌떡 일어서자 칼을 빼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암은 활짝 웃었다.

 

  "좋다. 그럼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황소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고 형제의 맹약을 맺자."

 

  부여인들은 소를 잡아서 생피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좋소."

 

  독천왕도 마주 일어서서 술잔을 쳐들자 부성주 장화가 벌떡 일어나 지시를 내렸다.

 

  "얘들아, 황소를 잡아 대령해라. 허연 놈(白牛)으로 찾아봐라. 그리고 두 분 나리. 이미 불기성에서 봉화가 사방으로 퍼졌으니 저쪽 청주에서 군대를 파병해올텐데 그 대책은?"

 

  독천왕이 대답했다.

 

  "내일 당장 장광군을 치고, 또 동모군을 치고 동래군까지 쳐야 되겠지. 그리고 남쪽으로 낭야군을 치고 동해군을 쳐서 양자강에 내려가 동진과 우호를 맺어야지. 우리가 동진과도 일단 연합하면 친나라 장안에서 쉽사리 우리를 치러 오겠나."

 

  "아무튼 연합이 중요하니 내일 남쪽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고 또 동쪽 본국에도 전령을 보내어 백제로부터 증원군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소."

 

  사비왕이 화답하자 대방왕이 만족스러워 하였다.

 

  "두 분 말씀이 다 옳소."

 

  그때 부성주 장화가 다시 나섰다.

 

  "여러 나리들. 죄송하지만 불기현령 자리는 이곳 토박이인 소관에게 내려주시면 잡혀 있는 관군 포로들이 모두 나리들을 위한 병사로 귀화시키기가 쉬울 것입니다. 어차피 제 목숨도 나리들과 운명을 같이하는데."

 

  부성주가 소천왕의 현령 자리를 달라고 하자 장내에는 긴장이 흘렀다.

 

  "항복해서 목숨을 살려줬더니 어딜 넘봐?"

 

  석성왕 여귀가 호통을 치고 공천왕도 장화를 노려보았다.

 

  "당장 저 놈을 끌어내서 목을 잘라 버려."

 

  그러나 관병 천사백명을 회유하여 아군 전력으로 삼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독천왕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때 별안간 여비가 환호를 질렀다.

 

  "맞다, 맞아. 본 소천왕은 현령 같은 자리는 골치 아픈 것이라서 재미도 없고 욕심도 없소. 나는 대신에 독천왕과 같이 전쟁에 나가는게 좋겠어. 상누이도 같이 나가고."

 

  여비가 사양하고 나서자 사비공주와 독천왕이 입을 벌렸다. 대방왕 여계가 여비가 어려서 책임을 질 수 없으니 그렇게밖에 말 못하는 줄 알고 동조를 했다.

 

  "소천왕의 뜻이 설령 그렇다고 해도 탁발장군의 허락이 없이는 될 수 없소."

 

  즉 백제로서는 장화가 현령이 되어도 좋은데 그 자리가 백제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천왕은 여비를 바라보았다.

 

  "지금 불기현령 자리는 소천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늘 아침 큰 일을 치른 산채의 온 가족에게 보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경솔히 말하지 마라."

 

  여비는 그러나 이미 현령에 뜻이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산채 식구들이 힘을 합쳐서 그런 것도 맞는 얘기지요. 또 내가 여러 사람이 추대해 마련한 자리를 그냥 마다한다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룻밤만은 불기현의 현령 영감 노릇을 하고, 내일 아침 일찍이 사직하여 부성주에게 물리겠소. 그러니 내일 아침부터는 부성주가 현령이 되어 관군을 회유하고 또 이곳 주민들을 두루 살펴서 편하게 해주시오."

 

  사비공주는 비로소 여비가 작은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여비에게 현령 자리는 너무 작아. 장차 중원의 왕 자리를 마련해놓고 앉혀야지.

 

  "탁발장군. 소천왕이 그러기를 바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사비공주가 동의하자 독천왕도 동의하고 말았다.

 

  "그럼 좋다. 둘보다는 셋이 좋으니까. 산채 식구와 백제 식구, 거기에 불기현의 본래 식구가 모두 통합하는 것이야. 장화 부성주, 내일 아침부터 불기현 성주를 맡으시오."

 

  부성주 장화가 만족하였다. 물론 백제인들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기필코 관군들을 회유하고 또 현민들이 협조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 왕자 여울을 찾는 일은 어떻게 하지요? 내일 장안으로 밀정을 보내어 소식을 전하고 모시도록 할까요?"

 

  사비왕이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