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사인묘(제6부)

제 052 회 대륙의 역사에서 코리족은 사라지다

금박(金舶) 2017. 3. 13. 11:54


"예, 똑 같습니다. 아마 모르고 그렇게 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계승한다고 그랬고, 원나라는 고구리를 계승한다고 그랬으니 아마도 명의 영락제는 고구리의 영락제 만큼 큰 영토를 차지하겠다고 호기를 부렸는지 모르겠어요.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에게 대규모 함대를 만들어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도록 했고요, 몽골초원에 수많은 암살단을 보내 황금씨족을 죽이려고 해서 우리 청랑대와 맞부딪쳤고요, 막판에는 23만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몽골로 북진, 침공하여(서기 1422 년임) 많은 피를 흘리고 패퇴하였으며, 그 자신도 우리 청랑대에게 죽게 되지요. 명나라에선 영락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지만... 이로써 고려와 그 이전 고구리 등의 여러 나라는 대륙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고려와 고려 이전의 모든 역사를 다 바꿔 버렸으니까요. 그리고 많은 책들을 거두어들여 불태워버렸습니다."


[정화(鄭和, 1371년~ 1434년, 본명: 마삼보(馬三寶))는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將軍)이자 환관, 무관(武官), 제독(提督),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이다. 영락제(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씨이고 이름은 삼보(三保)였다.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三保太監 혹은 三寶太監)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현재의 케냐 말린디)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전체 길이가 120미터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퍼옴]


"어떤 나라든 건국한 후 과거의 모든 책들을 거두어 불살라버리는 일이 한번씩 있었군요. 그런데 명나라가 건국될 그 때에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고리국도 북쪽으로, 아니 동쪽 조선반도로 쫓겨갔을 때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이 부분을 아시는지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청랑대의 기록에 남은 것을 읽어 보았지요. 나라의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게 되는 것을 알아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명나라의 태도 입니다. 명나라의 처음 즉 태조 주원장은 사실 도적떼의 두목이었지요. 나라가 어지러워 도적떼를 방치하게 되자 점점 세력이 커지고, 마침내 강남에서 3 개의 큰 세력으로 도적떼들은 모이게 됩니다. 귀주, 복건, 절강, 강서 등 4 개 성(省)에서 주원장은 장사성과 진우량을 극복하고 세력을 집결하여 명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 다음 4 개 성을 잘 위무(慰撫)하여 근거를 삼은 다음 먼저 멸몽흥한(滅蒙興漢)의 기치를 내겁니다. 그리고 원나라 지역부터 공격해 들어갑니다. 처음부터 고려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요. 당시 고려에 공민왕(恭愍王)이 재위하였는데, 그 왕은 원나라로 부터 독립적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써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노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탈환합니다.(서기 1356 년임) 이 쌍성총관부 탈환 전쟁에서 이자춘(李子春 이성계의 부)은 천호(千戶)로써 공을 세웠으며, 이때에 고려국 공민왕의 신하가 됩니다. 이 지역은 본래 고려의 영토였다가, 원나라에게 빼앗겼는데(서기 1258 년임) 백 년만에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이곳은 몽고와의 접경지대였으며, 서여진에서도 가까운 지역이지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니 간단하게 이야기 해주면 좋겠습니다."


"대형님께서 등주를 찾으신다 하여 고구리의 등주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보세요. 원나라의 역사에서 이때의 기록에는 명나라와 고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쌍성총관부 지역이 접경지대였으므로 근처에 도읍이 있었을 것이고, 도읍이 있으려면 필경 등주가 있어야 하며, 바로 전쟁이 벌어진 곳 가까이에서 공민왕은 전쟁을 지휘하였을 것입니다. 이말은 바로 고려의 서경이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고려국은 영토가 넓어서 도읍이 5 곳이었으며, 중동서남북 경이라고 5경제도를 택하고 있었지요. 그러므로 등주 역시 5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 서경과 서경에 붙어 있는 등주에 관한 것입니다."


"5경제도라면 왕이, 황제가 5 개 도읍지를 자꾸 오가며 나라 했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명나라 주원장은 처음에는 고려와 연합하여 몽골 원나라를 몰아내자고 구호(口號)를 내걸고 전쟁을 하다가, 원나라가 북쪽으로 물러나자(서기 1368 년임), 이제는 '명나라는 원나라를 이어받았다. 고려를 몰아내자.'고 구호를 바꿉니다. 원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을 점점 수습하여 나라를 갖추자, 고려에게 원나라가 과거에 지배하였던 땅인 쌍성총관부를 돌려달라고 말합니다. 쌍성 총관부의 땅은 본래가 고구리의 영토였다가 대진국의 영토였다가, 고려국의 영토로 된 곳입니다. 원나라에 잠시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온 곳이지, 본래부터 원나라의 것은 아니지요. 이로써 명과 고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됩니다. 당시 고려국에는 지방마다 강력한 호족들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크게 4 개의 세력으로 나눌수 있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적 세력, 친원파 구세력, 친명파 신세력, 세 세력 어느곳에도 참여하지 않고 지켜보는 방관자 세력, 이 4 가지입니다. 고려에서는 독립적 세력과 친원파 세력이 힘을 모아 명과 쌍성총관부를 지키자는 전쟁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명군과 접전을 하기도 전에 정벌군을 이끌던 친명 세력의 핵심, 이성계와 조민수 좌우도통사는 회군하여 고려국에 창을 겨누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팔도도통사 최영 대장군을 죽이고, 서경을 장악하며 우왕을 폐위시킵니다. 이로써 친명파는 고려국의 지배세력이 되었으며, 그 다음부터 명과 좋은 복속관계를 유지하지요."


[이성계(李成桂, 서기 1335 ∼1408) - 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화령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奏)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88년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원성은 자기가 들었던 내용을 부분적으로 말하면서 어떤 연결점을 찾고 싶어서 말을 던졌다. 


"혹시 그 사건 전후하여 고려의 황제가 동쪽 조선반도로 이주해간 내용은 없나요?"


"예, 그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혹시 고려국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일이나 그와 비슷한 일은 없나요?"


"당시 고려국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원나라가 불교를 많이 받아들인 것과 같이 불교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 서경의 옆에 있었을 등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서경의 북쪽에 흐르는 강이 위수(渭水)이며, 서경에서 일백 리 이내에 물이 닿는 곳에 등주(登州)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등주의 서쪽에 조선국의 이성계가 태어난 화주(和州)가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물자보급을 위해 꼭 필요했으므로 고려국에서 등주를 뺐어야 했지요. 그래서 고려국은 서경을 낙양으로 후퇴시킵니다. 원나라는 화주를 등주로 통합시켰다가, 쌍성총관부를 세우고 등주를 없앱니다. 백 년후 고려의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되찾아 등주와 화주 이름을 되살립니다. 그리고 얼마후 화주를 화주목(和州牧)으로, 다시 화령부(和寧府)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런데 화주는 본래 고구리의 땅으로 당시 장령진(長嶺鎭)이었다가 박평군(博平郡)이었는데, 고려국 초기에 그 땅을 차지하여 화주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장령진이란 바로 진령산(秦嶺山)의 처음이란 뜻입니다. 진령산은 위수 아래에 동서 횡으로 길게 누운 산맥(山脈)입니다. 화산(華山)으로 부터 서쪽으로 하서회랑의 남쪽 성벽을 시작하는 곳까지 길이가 이천 리인 장대한 산맥입니다."


[화주(和州) -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장령진(長嶺鎭), 혹은 당문(唐文)(‘당(唐)’은 ‘당(堂)’으로도 적음),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칭하였으며, 고려 초에 화주(和州)로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화주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화주방어사로 강등시키고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고종 때 이 일대가 몽고에 편입되어 쌍성총관부가 되자 화주도 덩달아 등주(登州)에 합병되었다. 뒤에 통주(通州)에 합병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 군대를 보내 수복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다. 18년(1369)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키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횡강(橫江)이 있다.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국역 고려사: 지, 2011. 10. 20., 경인문화사)]


"그러니까 화주의 동쪽에 있는 고구리의 땅이 바로 산의 동쪽, 땅에 오르는 등주라는 이야기이군요."


                                    [그림 섬서성 위남현 부근]


"그렇습니다. 바로 고려국의 서경이 고구리의 서경이라 짐작되고, 고려의 등주 역시 고구리의 등주란 말이지요."


"결론을 짓자면 고구리의 등주를 찾으려면 좀 범위가 넓지만 서안에서 진주로 가는 도중에 왼쪽으로 높은 산을 본 적이 있어요. 불과스님이 태백산이라 가르쳐주신 산인데, 그 산을 우선적으로 산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의 동쪽인 건 확실한데 그 이상은 직접 발품을 들여야 할 일입니다."


"대형님께서 등주를 찾아서 기어코 찾는 것이 무엇인가요? 정말 궁금합니다."


"에 ... 그게 말하자니 너무나 ...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하기로 하지요. 징기스칸이 고리국 호태왕이라는 분의 공적비를 본 후에 어떻게 하셨는지 그 뒷 이야기는 없는가요?"


"징기스칸은 그 공적비에서 호태왕의 공적을 읽어보셨겠지요. 그 비에는 고리국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고리국을 개국하신 추모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추모왕은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나옵니다. 나라 다스리는 일에 별 재미를 못느끼시고 ..."


"잠깐, 고리국 추모왕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랐다고요? 정말 그런 기록이 나왔단 말입니까?"


"예, 징기스칸은 그 말을 믿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가 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나이가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 하겠지만, 징기스칸은 마침 고리국의 왕자 중에 도력이 높다는 전진교 개창자 중양자(重陽子)의 소식을 듣고,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  제자 중의 한분을 청해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전진교의 장교(掌敎)인 장춘자(長春子) 구처기를 만나지요. (서기 1222 년임) 그리고 묻습니다. '선도(仙道)에 사람이 죽지않고 신선이 되는 비법이 있느냐?'고요. 구처기는 '옛날 황제국에 그런 방도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선이 되신 분들은 죽지않았으니 황제의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도가 끊어져서 방도가 없어졌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징기스칸은 구처기에게 징기스칸의 모든 나라에서 도교를 관장하는 특권을 내려줍니다. 그리고 이후로 징기스칸은 불사(不死)의 욕심 즉 영원한 삶에 대한 욕심을 버립니다. 징기스칸은 그래도 아쉬움이 있었는가, 자기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방법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묘는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징기스칸은 무덤이 없다는 것인가요?"


"예, 있다면 아주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졌을텐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신선이 정말 되셨을까요?"


진원성은 몇일 간의 대화를 통해서 구찰 부회수가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을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진원성 일행이 낙양 북쪽 게르촌에 도착하자, 흑응회 낙양부에서는 많은 회원과 가족들이 마중나와 환영해 주었다. 구찰 부회수와 진원성 대형이 나란히 말을 타고 촌의 입구에 들어서는 모습은 기존의 회원들에게는 물론이고, 준갈이 부족과 함께 온 몽골족 회원들에게는 더욱 보고싶었던 그런 그림이었을 것이다. 몽골족들은 생활의 차이를 배워가면서 중원의 문화를 몸에 익히는 지난 1 년의 힘든 세월을 보냈었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기에 미곡 운반이나 보호사업의 경호 등 몸으로 떼우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늘진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무웅 부회수는 한번 해보았던 일이기에 아주 빠르게 보호사업과 미곡저가판매 사업을 안정시킬수 있었다. 게다가 낙양성 주변의 만성들은 이미 적목단 시절의 안정된 보호와 다시 한동안의 불안했던 때를 거쳤기 때문에 보호비가 약간 올랐지만 흑응회의 보호를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또 과거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매달 은자 이백 량 씩이 하남부의 추관에게 당례처럼 전달되었으며, 이것으로 하남부의 추관은 조무웅 부회수와 이미 이물(異物)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어져 있었다. 미곡저가판매의 일도 지난 해의 한해(旱害)를 한바탕 겪은 때문인지, 관아의 지지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쉽게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