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사인묘(제6부)

제 039 회 큰비가 제남의 천단을 허물었다

금박(金舶) 2017. 3. 4. 12:11


진원성이 새벽 수련을 하면서 소산의 천단이 지난 여름의 장마에 무너져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응신제를 올린 후 소산은 인근 만성들에게도 알려져서 소산에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졌다. 자연히 발자국이 많은 곳은 흙이 드러났고, 장마철에 비가 많아서 그 흙이 파헤쳐졌으며 결국 단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진원성은 이제 다시는 천단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되었으며, 응신제도 다시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실착이었다. 어떻게든 천단을 지켰어야 했는데 하는 아까움이 가슴 한 곳에서 우러났다. 시간이 된다면 요동의 범문정 아우에게 가서 혹시 남아있을 천단 그림을 가져와서 천단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 살펴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을지 알수 없었다.


9 월 1 일 진원성은 모처럼 매월 하는 월례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총관들 여섯 명과 함께 하였으며, 초무량 회수, 백시준 회우, 구찰 부회수, 각 대 대장 9 명 하여 총 19 명이 둘러 앉게 되었다. 먼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하였으며, 마지막에 진원성이 여행 결과도 알릴 겸하여 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회의 여러분들이 성실하게 일하시는 노고에 감사하고요, 몇 마디 말씀 드립니다. 이번에 강남 소주와 항주 그리고 영파에 갔다가 왔습니다. 영파에서는 관음보살님이 영험하시다는 보타산에도 들렸습니다. 아린총관과 하미총관이 관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셔서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증표로 은자 39만 량을 주셨습니다. 그 은자는 회에 이미 입고하였습니다. 보타산 동쪽 바다에 낙가산이라고 섬이 있는데, 그 섬은 누워있는 부처님 모형입니다. 제가 아침 수련을 마치고 보타산 봉우리에서 낙가산을 바라보는데 부처님이 일어서서 북쪽에 있는 섬을 가리키며 가보라는 것이에요. 제가 그 섬에 가보았더니 은자 39만 량이 있더군요. 그래서 주워왔어요."


"......"


"저는 그 은자를 피난처 만드는 데에 보태겠다고 관음보살님과 약속하였습니다. 피난처 만드는 데에 전토가 2만 경이 필요한데 그걸 준비하자면 적어도 은자 200만 량이 필요할 걸로 생각하였어요. 이제 팔십만 정도 모았으니 조금만 더하면 될 것입니다. 저는 흑응회 회원들 각자 이름으로 땅을 쪼개서 구입하면 나라의 눈치 뵈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아! 땅을 쪼개서,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피난처 땅을 준비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인데, 저는 이만 경 중에 미곡 등 먹는 것을 주로 하고, 그 다음은 입는 것 즉 면화농사를 이천 경 정도하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마대장님, 해녕총관에게 면포 이익 맞추기라는 것을 주었는데 함께 의논하여 보시고, 학숙 농사부에도 같이 상의를 해서 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대형님, 언제 땅이 준비 되나요?"


"그것은 아직 알수 없지요. 하지만, 지금부터 조그만 땅에라도 면화를 심어보고, 어떻게 면화를 키워야 할지, 또 면포 짜는 것도 준비를 해야지요. 피난처의 2만 경은 결코 넓은 땅이 아닙니다. 그 전토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피난민 25만 명이 살수 없어요. 그래서 무역을 꼭 해야합니다. 무역은 큰 장사가 되니까요. 무역은 전쟁입니다. 구찰 부회수님 전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타고 무엇을 쏘는 것인가요?"


"그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말을 타고서 활을 쏘는 것이지요."


"무역 전쟁은 말 대신에 배를 타고, 활 대신에 대포를 쏘는 것입니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역선이 필요합니다. 또 무역선을 바다에서 운행할 선부들이 필요하고요, 대포와 화총을 쏠 전투원이 필요합니다. 먼저 무역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무역선은 이십 장에서 삼십 장의 길이입니다. 목수대 정순덕 대장님, 요즈음 2 장원 짓느라 수고가 많지요. 집이라는 것은 땅 위에 있는 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배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배가 뭐라니 ... 배지요."


"배는 물 위에 있는 집이란 말입니다. 목수대는 땅 위에 있는 배도 만들고, 물 위에 있는 집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배를 물 위에 있는 집이라고 하는 말은 처음 들어서, 아무튼 땅 위의 집과는 달리 쉽지 않은 일이지요."


"물론 당장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배 만드는 곳에 회의 아이들 중에 야무진 아이들을 보내서 배를, 우선 고기잡는 배를 만들도록 해보세요. 일단 크지 않은 걸로 주문하고 우리 아이들이 배짓는 것을 배우도록 ... 길이가 열 장 정도 되는 범선을 하나 구입하여, 다른 아이들을 태우고 배를 운행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세요. 고기잡이도 하면서 바다의 지리를 배워야 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배가 만들어지면 가서 배를 끌고 오도록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점점 배를 크게 하면서 우리가 배도 만들고 배를 운행할 기술도 배우도록 해야합니다. 학숙에 배를 운행하는 것을 가르치도록 사부를 모셔오고 해운부를 만드세요. 또 배에서 대포를 쏘고, 총을 쏘는 것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은 좀 뒤로 미루고요."


"대형님 길이가 이십 장이면 엄청 큰 배일텐데..."


"그럼 조금 더 줄여서 해보면 되지요. 나중에 길이가 이십 장 되는 무역선이 열 척이 되려면 배 운행할 사람이 모두 한 척 당 30 명이니 300 명이 필요하고, 전투원이 한  척 당 50 명이니 500 명이 필요하고... 무역 일은 위험해서 인력 손실도 많으니 두 배로 인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1600 명... 이번에 강남에 가서 조그만 무역선을 타보았는데, 배 운항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해풍(海風)이고요, 그 다음은 조류(潮流)에요, 그 다음은 바다의 지리(地理)에요. 바다에 있는 암초를 모르면 운항을 할 수 없지요. 전투원은 경비대가 나중에 책임을 져야해요. 장대장님 알겠지요. 우리 무역선을 지키는 것도 경비대가 할 일이니까."


"......"


"당장에 모든 것이 한 번에 될 수는 없으니 조금씩 준비를 해야되요. 우선 고기잡이 배라도 중고선(中古船) 좀 큰 것을 사서 고기도 잡으면서 아이들 중에 배 운항을 배우도록... 당장 알아보고 배부터 한 척 사세요. 2 장원 매장 한 곳에 우리가 잡은 물고기들을 내다 팔도록 그렇게 하세요. 초 회수님 고기잡이 배는 당장 사세요. 알았지요? 그리고 배 운행(運行) 인력을 키워야 해요. 학숙에서 가르치실 사부님을 모셔와야 합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를 해야 전토 2 만경이 준비되면 빨리 그 다음으로 나갈수가 있어요. 다들 아시겠지요."


"우선 고기잡이 배는 한 척 사서 배 운행 일을 아이들이 배우도록 하죠."


"응철대는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대포도 만들어야 합니다. 무역선에는 대포를 달수 있게 허락해주고, 화약도 싣도록 나라에서 허락해주니까요. 처음에는 대포를 사와야 하겠지요. 내 아우가 황궁 병장국에 있는데, 나중에 대포에 대한 것은 다시 상의를 하도록 합시다. 아주 좋은 대포가 없으면 무역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바다에서 대포로 전쟁 하는 것을 지금까지 세 번 봤는데 세 번 모두 바람을 등진 편이 이겼어요."


"......"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피난처는 어디에다 만드실 생각이신지요?"


"가장 좋은 곳은 등주부인 것 같아요. 황지가 된 유휴지가 있다는 점과 바닷가이니 무역에도 좋고요. 또 이미 식민지가 있으니 어떤 기반이 되어있는 셈이고... 이번에는 모래, 9 월 3 일에 등주부에 갔다오려고 합니다. 식민지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둘러봐야지요. 이제부터는 식민지라 하지말고 산미대라 불러야 겠네요. 하국상 대장님도 이번에 처음 뵙게 되겠네요. 가는 길에 고향인 아린촌에도 가보고, 석도에도 가보려 합니다. 이번에는 석도총관과 소주총관을 데리고 갑니다."


"대형님, 이번에는 수행원들을 데려 가십시오. 산동에서는 이미 흑응회가 왠만큼 알려졌으니, 혼자 가시면 격에 맞지 않습니다."


"흐음... 알겠어요. 총관조 두 명을 데려가겠어요. 또 유래타와 경비원 2 명을 데려가지요."


회수부와 서기대 등은 2 장원 상가 계약을 모두 하여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내년 초에 상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도록 준비하는 데에 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선 흑응회가 맡아서 할 16 개의 상가 운영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부터 피난처라는 새로운 과제를 붙잡고, 회 전체의 일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각 대장들도 피난처에 대해서 먼 훗날 일로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흑대형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나 은자 39만 량을 가져왔다니 거기에서 부터 충격이 시작되어 어떤 목표로 흑응회가 변신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모습을 짧은 몇마디 말로써 보여주었던 것이다.


석도와 소주 총관은 여행 준비에 이틀 동안 바쁘게 되었다. 총관조들도 함께하는 여행이라 가지고 갈 것이 두 배가 되었으며, 다행이 마차를 하나 가지고 가게 되어 좀 대책이 되었다. 석도 총관은 그 중에서도 이층으로 잘 때에 쓰는 요상한 베게를 잊지 않고 챙겼으며, 가지고 있던 전궤(錢櫃)를 해녕총관에게 열쇠와 함께 맡겼다. 그 속에는 원래의 오만 량, 진원성이 이번에 다시 맡긴 이만 량과 월설이 명의 흑응전장 수탁증 일만 량과 합해서, 회표와 약간의 은자가 모두 팔만 량 들어있었다. 


진원성은 평소 가지고 다니는 전낭(錢囊)을 이번 여행 전에 정리하여 이만 량을 석도총관에게 추가로 맡겼다. 북경 여행 가지 전 18900 량을 가지고 있다가 북경 여행에서 900 량을 썼으며, 이번 강남 여행에서 900 량을 썼으며, 다시 보타산에서 39만6천 량 중에 39만 량을 회에 넣고 6천 량을 남겼으니, 전랑에는 24100 량이 들어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 4100 량을 남기고 이만 량을 석도총관에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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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


고려가 중원 대륙에 있었는가 아니면 한반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판별해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려가 타국과 왕래하는 내역을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오가는 데에 걸리는 날짜를 계산해보면 거리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거리에서 위치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데 왕(황제)이 행차를 한다면, 하루에 얼마를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좋을까요? 저는 마차를 기준하여 약 30 킬로미터를 적정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겠지만 저는 이것을 적절하다 판단하였습니다. 왕(황제)의 이동은 경호의 문제와 더불어 행궁이라 하여 이동시에도 사실상 통치행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선 참고로 조선시대의 동지사(冬至使 =  동지에 출발하여 명나라 북경에 가는 사신단의 호칭)가 북경(연경)에 가는 일정에 대해 알아봅니다. 한양에서 북경까지는 3100 리 길이며, 이동에 걸리는 시일은 40 일에서 50 일 이었습니다. 하루 70 리 행군이었지요. 돌아오는 길은 보통 늦어져서 60 일이 걸리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림 조선 동지사 행로]  


고려사를 보면 고려국 왕이 이동하는 것이 다수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애매하게 나와있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왕이 이동하는데 역사서에 왜 날짜 기록이 부실한 것일까요? 저는 역사 조작을 위해서 그렇게 했으리라 짐작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짜와 이동 위치가 정확하게 나온 기록도 드물게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충렬왕 5 년의 기록입니다. 충렬왕 5 년은 서기로 1279 년이며, 기묘(己卯)년입니다.


이때는 남송이 멸망한 다음 해이며, 충렬왕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대도 = 북경)에서 쿠빌라이 황제와 함께 있었습니다. 정월 신해일, 쿠빌라이 황제는 충렬왕에게 멸망한 송(남송)나라의 보물, 봉황이 그려진 병, 옥으로 만든 피리 등 90종의 물품을 내려주고, 다음 날 또 왕과 수행한 신하들에게 채색비단을 내려주었다고 고려사에 나옵니다. 충렬왕은 정월 경오일에 연경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며, 2 월 정해일에 개경에 돌아옵니다. 이 행차에 딱 17 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이 시일로 계산하여 보면 17 * 30 은 510 킬로미터가 나옵니다.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때의 수도는 여름에는 상도(上都) 겨울에는 대도(燕京, = 北京)이었다고 합니다.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황제이면서, 원나라의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고려사 대목에 나온 내용에서 계절은 정월 즉 아직 추운 때입니다. 그러므로 연경에 쿠빌라이 황제가 머물렀습니다. 연경에서 약 500 킬로미터의 고려 도읍지가 어디일까요? 저는 개봉(開封)이거나 약간 더 먼 낙양이라 추정합니다. 절대로 한반도의 개성은 될수 없지요. 북경에서 개성까지 말의 힘을 이용하여 17 일 만에 도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왕(황제)의 이동에서 도중에 무슨 일이 있어 늦어지는 경우는 가능하나 빠르게 이동하는 경우는 국가위난의 사태가 아니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고려의 개경이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조작인 것입니다. 하지만 식민사학자들은 이제 고려사도 이씨조선의 사관이 실수로 잘못 적은 것이라 주장할 테지요. 


<퍼옴>

국역 고려사 : 세가

충렬왕 5년(1279) 기묘년 

* 봄 정월

○ 왕이 원나라에 머물렀다.

신해일. 황제가 왕에게 멸망한 송(남송)나라의 보물, 봉황이 그려진 병, 옥으로 만든 피리 등 90종의 물품을 내려주고, 다음 날 또 왕과 수행한 신하들에게 채색비단을 내려주었다.(중략)

경오일. 왕이 연경(燕京 : 지금의 중국 베이징)을 출발했다.

* 2월

정해일. 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원문)

五年 春正月 王在元. 辛亥 帝賜王亡宋寶器·鳳甁·玉笛等九十事, 翼日, 又賜王及從臣彩帛. (중략) 庚午 王發燕京.

二月 丁亥 至自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