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씨족 보호대의 이력
- 일명 청랑대(靑狼隊 :푸른이리부대)에 대한 이야기
* 몽골 초기의 역사
: 징기스칸이 태어날 시점에는 몽골초원에는 열두 개의 대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징기스는 몽골(몽고 蒙古)이라는 이름을 갖은 부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납니다. 징기스칸이 나중에 몽골초원을 통일하여, 그 때부터 몽골은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징기스는 여덟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어 가장(家長)이 되며, 어머니 호엘룬과 함께 원수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는 아주 힘든 고초를 겪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들판에서 타르박(몽골 큰쥐)을 잡아먹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열여섯 살이 되어 아버지가 정해준 아내 보르테를 맞이하였으나, 아내를 적들에게 빼앗겼다가 3 년 째에 다시 찾아옵니다. 보르테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돌아와 장남을 낳지만, 징기스는 차별하지 않고 쥬치('손님'을 뜻함)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아들 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며, 다른 씨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큰 포용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징기스는 보르테를 지키지 못한 것도 자기의 책임이며, 쥬치도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자식이라 선언하여, 보르테와 쥬치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이후 정실(正室) 보르테는 아들을 셋, 딸 하나를 더 낳게 됩니다. 차남 오고타이, 3 남 차카타이, 4 남 톨루이 그리고 딸 치치강이 있습니다. 장남 쥬치는 몽골 통일 전쟁에서 아버지를 도와 공을 많이 세우지만 나중에 쥬치는 징기스칸의 친자식들이 벌이는 계승자 논쟁에서는 발언권을 제약 당하기도 합니다.
몽골을 통일하고서(1206년 임), 쿠릴타이(몽골 부족장 대회의)에서 징기스는 칸으로 등극합니다. 이때 통천무(通天巫 = 천신 天神 텡그리의 대행자로써 큰 무당을 말함) 코코추로 부터 '하늘에는 유일하고 영원한 지배자 천신 텡그리가 있으며, 땅 위에는 유일한 군주인 징기스칸이 있을 뿐이다'라는 예언을 받습니다. 큰 정복자의 꿈을 갖은 징기스칸은 전투보다는 화친으로 세력을 키우려 하며, 이후 초승달 바다 기준 서쪽의 부족들인 오이라트(와라 瓦剌, - '숲의 사람들'의 뜻)와 6 회에 걸쳐서 통혼(通婚)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동서 몽골초원은 하나의 체제 하에 대몽골이 되지요. 그리고 오이라트 부족들 중 3 개의 천인대(몽골 특유의 군대체제로 천 명의 부대)가 징기스칸의 직할 만인대(몽골의 군대체제로 만 명의 부대) 소속으로 들어갑니다. 직할대는 열 개의 천인대로 구성되며, 전쟁을 하게되면 직할 만인대는 각 부족으로 흩어져서 각각 천인대 대장 또는 백인대 대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전 후에는 전쟁에 참여한 비율에 맞추어 각 부족 간에 공정하게 노획물을 분배하였지요. 징기스칸은 바로 공정한 분배에 의하여 신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 6 회의 통혼(通婚)
: 몽골(좌익 左翼: 초승달 바다를 기준으로 동쪽)의 제1 실력자는 징기스이고, 오이라트(우익 右翼: 초승달 바다를 기준하여 서쪽)의 제1 실력자는 쿠토카베키입니다. 양자간의 화친과 통합을 위해 이루어진 통혼입니다.[좌우의 기준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러므로 동쪽이 좌익이고, 서쪽이 우익이 됩니다.] 징기스칸이 동서화합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징기스의 딸 치치강을 쿠토카베키의 차남 토렐치에게 시집보냄.
두 번째) 쿠토카베키의 딸 오굴카이미슈를 징기스의 사남 톨루이의 장남 몽케에게 시집보냄.
세 번째) 징기스의 장남 쥬치의 딸 쿠루이에게치를 쿠토카베키의 장남 이날치에게 시집보냄.
네 번째) 쿠토카베키의 차남 토렐치의 딸을 징기스의 사남 톨루이의 사남 아리크부카에게 시집보냄.
다섯 번째)징기스의 사남 톨루이의 사남 아리크부카의 딸을 쿠토카베키의 차남 토렐치의 아들에게 시집보냄.
여섯 번째)쿠토카베키의 차남 토렐치의 딸을 징기스의 삼남 차카타이의 차남 카라후라구에게 시집보냄.
* 징기스칸 이후의 칸 승계 갈등과 몽골의 세계 진출
** 오고타이의 즉위와 몽케의 반발
: 징기스칸은 생전에 장남인 쥬치, 둘째 오고타이, 셋째 차카타이를 각지로 정복 전쟁을 내보내며, 그들은 각기 하사받은 영지를 정복전쟁으로 빼앗아서 자기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킵챠크한국, 오고타이한국, 차카타이한국이 이로써 분산성립할 근거를 갖게 되지요. 몽골에는 장자부터 지분을 떼어내주고 독립을 시키며, 마지막으로 막내에게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물려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징기스칸 사후(1227 년임), 몽골의 관습에 따라 막내인 톨루이가 칸의 지위를 승계하여야 하나, 징기스칸이 생전에 내비친 어떤 의중에 따라 쿠릴타이(몽골 부족장 대회의 - 칸을 선출함)에서 셋째인 오코타이가 칸에 오르게 되며, 이에 따라 톨루이가 상속 받아야 할 칸의 본토(본래의 몽골땅) 영지를, 톨루이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오고타이칸에게 양도합니다. 이로써 톨루이는 영지없는 왕이 되었으며, 이후 오고타이가 죽게 되자, 오고타이의 아들이 칸에 다시 오르나 2 년 만에 병사(病死)하고, 이 때에 다시 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가 열립니다. 이때에 징기스칸의 장남 쥬치의 아들 바투가 톨루이의 장남인 몽케를 칸으로 추천하여 칸에 오르고, 오고타이, 차카타이 측에서는 이 쿠릴타이에 불참합니다.
** 몽케칸과 아리크부카의 즉위
: 새로운 4대 칸 몽케는 즉시 쿠릴타이에 불참한 차카타이, 오고타이 족들을 공격하여 반대파를 죽이고 협조적인 사람들로 정부를 세웁니다. 그리고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에게는 토번과 대리, 안남 등지를 영지로 주고, 뺏어서 갖으라는 정복 전쟁을 지시합니다. 또 셋째 동생인 훌라구에게는 페르시아를 영지로 주고 정복전쟁을 시킵니다. 이렇게 훌라구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일한국을 세우게 됩니다. 네째인 아리크부카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아버지인 톨루이의 뒤를 이어 상속자가 되어야 할 것이나 좀 애매하게 되었지요. 이때에 몽케칸은 손수 남송(南宋)을 정복하려고, 전쟁을 시작하나 중원의 사천(四川) 땅에서 병사(病死)하며, 이 때에 톨루이의 4 남 아리크부카는 몽고 관습에 따라서 쿠릴타이를 열어서 칸에 오릅니다.
** 쿠빌라이칸의 재통일과 원의 성립
: 쿠빌라이는 이미 토번, 대리, 안남 등의 정복을 마치고, 몽골에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다가, 나중에 자기를 지지하는 족장들 만을 따로 모아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에 오릅니다. 이로써 몽골에는 칸이 두명으로 되며, 이로써 몽골이 분열된 것입니다. 이 분열이 대대로 쿠빌라이의 후손들과 아리크부카의 후손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빌미가 됩니다. 쿠빌라이의 지지자들은 주로 동부쪽(좌익)이었으며, 아리크부카의 지지자들은 주로 서부쪽(우익)이었습니다. 즉 몽골과 오이라트의 대리전인 셈이었지요. 쿠빌라이 칸은 중원에서 카라코롬(몽고의 수도)으로 올라가는 미곡이 우익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결국 물자부족으로 아리크부카는 차카타이한국으로 도피하다가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죽습니다. 쿠빌라이의 승리였지요. 쿠빌라이는 이후에 금과 남송을 모두 정복하여 없애고 중원에 원나라를 세우게 됩니다.(1271년 임)
[그림 대몽골제국]
*** 청랑대의 출범
: 쿠빌라이 즉위 후 부터 중원과 몽골 전체는 쿠빌라이 칸의 확실한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지배체제의 확립은 중원에서 나는 재물을 몽골 각 부족에게 배급하는 제도에 의하여 성립하게 되며, 이로써 쿠빌라이의 후손들이 각 지방의 지배자로 진출하고, 쿠바라이의 직계자손 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규칙이 이때에 세워집니다. 이렇게 쿠빌라이의 직계후손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줄여서 쿠빌라이의 후손만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물리친 후로 그들의 반격에 대비하여, 직할 천인대 중의 한 백인대를 골라서 황금씨족을 비밀리 보호하는 특명을 주며, 그들 부족에게 우룸치('좋은 목초지'란 뜻)의 초지(草地)를 영지로 하사합니다. 그 백인대란 바로 오이라트족 중의 우리 준갈이족 즉 청랑대(푸른이리부대)인 것이지요. 그 징표(徵表)로 우리는 푸른색의 옥반지를 하사받습니다. 본래 우리 부족은 오이라트 부족들 중에 몽골쪽(동쪽)에 가까이 있어서 준갈이(좌익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 왔지요.
*** 쿠빌라이와 토번 홍모파의 전신인 샤카파 간의 최왼(檀越) 계약 성립
: 쿠빌라이 황제는 토번의 불교를 국교로 삼고, 토번 샤카파 승려인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맞아들이며, 최왼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토번불교는 원나라 시절 후반기에는 횡포가 지나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결국 원나라 쇠퇴의 빌미를 만들기도 하지요. 청랑대는 토번불교 샤카파에서 기공무술을 하나 전해받습니다. 그것이 회밀음종(廻密陰宗)입니다. 그리고 최왼계약의 종료시까지 의무를 다할 것을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 청랑대의 역할
: 우리 청랑대는 우룸치의 목초지대를 영지로 받은 댓가로 항상 백 명 이상의 무공술자들을 키워서 황금씨족을 비밀리에 보호하였습니다. 때로는 토번불교의 라마로 위장을 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상인으로, 군병으로도 위장하여 임무를 수행하였지요. 황금씨족 내부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씨족 외부와의 싸움에서는 우리가 아주 많은 역할을 하여 도움을 주었지요. 칸에 오른 황금씨족들은 아마도 푸른 옥반지의 약속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명의 건국
: 명나라는 주원장이 건국하였으며(서기 1368년 임), 표면적으로 원나라를 계승하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에 남아있던 원나라 사람들과 세력을 거의 그대로 명나라의 신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지요. 원나라를 계승하였다면 원나라의 국새(國璽)를 넘겨받아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였고요. 원나라가 몽골 땅으로 돌아갈 때에 마지막 원 황제 토곤테무르(= 원 혜종 임, 또 명나라에서는 순제라 함)는 국새(= 전국옥새 傳國玉璽 진시황이 화씨벽옥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옥새)를 가지고 북쪽으로 물러났지요. 그리고 국새를 우리 청랑대에 보관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원장의 군병들은 국새를 추적하여, 원나라의 후예를 공격하며, 국새의 회수를 위해 노력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주원장은 표면상으로는 원나라를 승계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북쪽에 있는 몽골의 세력을 달단(??, 타타르의 음사 音寫, 타타르는 몽골 초원에서 징기스의 몽골과 대적 관계에 있었던 한 부족명입니다. 징기스의 아버지는 타타르족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이라 불렀고, 명나라 끝날 때까지 몽골이라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몽골과 전쟁한다는 것은 몽골의 승계를 받았다는 말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몽골의 일개 부족 중에 반란을 일으킨 타타르와 전쟁을 하는 것으로 명분을 만들어서 상대의 격을 낮춘 것입니다. 그러나 몽골에서는 우익인 오이라트(와라 瓦剌)를 제외한, 좌익의 몽골족들 모두는 원나라가 있기 전부터 불러왔던 그대로, 그들 스스로를 몽골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통칭으로 달단이라 부르는 것에 의하여 몽골족 전부를 달단이라 부르는 착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 몽골 아리크부카 일족과 오이라트의 분열
: 원 혜종의 장남 소종의 뒤를 이은 둘째아들인 토구스테무르칸은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진 후로 힘을 상실하고 있을 때에, 아리크부카(쿠빌라이의 동생, 톨루이의 4남)의 후손 예스테르는 오이라트 족과 협력하여 토구스테무르칸을 공격하여 죽이고(서기 1388년 임), 그것으로 황금씨족은 상당기간(서기 1388 년 - 1470 년 까지) 동안 칸의 자리에서 맘편히 있지 못하게 됩니다. 아리크부카의 후예들은 오이라트와 쿠빌라이 시절 이후 계속 한편으로 지내왔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아리크부카의 후손들이 칸의 자리에 오르지요. 그 다음 오이라트의 술수에 의하여 예스테르칸의 아들이 죽게 되며, 이때부터 아리크부카 후손은 오이라트와도 앙숙이 되고 서로 증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징기스칸의 손에서 만들어진 동서화합은 약 200 년만에 와해됩니다. 동서화합이 없으면 몽골초원 밖으로 뻗어나갈 수 없음을 후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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