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49. 해하(海河)의 결전 - 6

금박(金舶) 2015. 11. 16. 09:28

  벽려혼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미인을 죽인 곳이지."


  낙릉궁주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각본을 바꾸어서 우미인이 손에 취운검을 들었어, 우미인이 초패왕을 죽일 차례야."


  낙릉궁주가 벽려혼을 협박하자 벽려혼이 말끝을 돌렸다.


  "조금 더 가면 제하(齊河)가 나오고 제하를 건너면 북상하는 제군(齊軍)이나 백제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이야."


  다시 어둠 속에서 추격해오는 선비족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벽려혼은 철벙대며 도해하를 건넜다. 하필이면 쫓겨온 곳이 초패왕 항우가 조각조각 잘라져 죽은 해하라서 벽려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용농이 한신은 아닐거야. 벽려혼은 자위하였다. 그가 언제 이런 망신을 당했던가? 치우동을 나온 이후로 이런 망신이 없었다. 낙릉궁주와 맞대결을 하여 처참하게 패배를 시인한 것은 그의 운세가 꺽이어서 하강하는 징조였던가?


  마침내 연나라 제일 용장인 모용농에게 쫓겨 별 잡스런 변명을 하면서 등을 보이고 밤새워 도망가고 있다. 설마 벽려혼의 운명이 오늘밤으로 다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타고 있는 말에도 있었다. 모용농과 그 기마병이 타고 있는 말들은 선비족 특산의 흉노말이라서 억세게 쫓아왔고 청주의 말은 본래 북방에서 수입한 종자이지만 청주에서 토착화되어 선비말과 같은 기백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이미 너무나 지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백의 마필이 철벙대며 해하강을 건너는 소리는 도해하 남쪽에서 진을 치고 숙영하던 백제군의 잠을 깨웠다. 사비공주와 대방왕의 일만 백제병과 장영의 삼천 제군 병사가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숙영하기 위해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제남태수 장영이 말을 타고 반대편 강안에서 그들을 마중 나왔다.


  "누구냐?"


  "청주병이다."


  "어서 와라. 우리는 제군이다."


  "우와 살았다. 치천공 장영 장군이다."


  청주 기마병들이 환호하였다. 벽려혼은 건너편에서 장영이 기다린다는 말을 듣자 머리가 빙글 돌았다.


  "장영, 빨리 병사들을 매복시켜라. 곧 큰 손님이 따라온다."


  사비공주도 어둠 속에서 뛰어나왔다.


  "모두 모닥불을 꺼라. 진을 치우고 숲 속으로 매복하라."


  "연나라 군대가 온다, 매복하라."


  공천왕도 벽려혼 앞에 나섰다.


  "강물 속에까지 병사들을 매복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알았어, 그럼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어보지."


  요서왕 모용농은 벽려혼을 추격하여 도해하에 이르러 어두운 강건너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냐?"


  "해하입니다." 


  "음, 이놈들이 여기서 모두 사나이답게 자결을 해야 되는데 비겁하게 강을 건너 도망가서 끝까지 고생시키는군."


  선비병사가 다시 물었다.


  "장군, 어디까지 추격하실 것입니까? 청주로 너무 가까이가면 위험합니다."


  "아예 청주 광고성을 치면 되지. 도망가는 겁쟁이 초패왕이 위험하다니. 하지만 매사 안전한 것이 제일이니 앞으로 강 하나만 더 건너고 거기서 못잡으면 돌아가서 낙릉성을 친다."


  그들이 추격하여 강을 반쯤 건넜을 때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른 공지에 횃불을 켜고 나 잡아가시오 하면서 쉬고 있는 벽려혼과 낙릉궁주 일행을 보았다. 그들은 오백 기마병도 백여명만 남기고 숨겨놓았다. 모용농은 강을 건너다 말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거기서 벽려혼은 태연하게 왼손으로 피리를 불었다. 벽려혼은 그동안 풍승상에게 배운 피리가락이 있었다. 낙랑가, 옥저가 등이 있었는데 벽려혼은 광릉산이라는 곡을 골라서 피리로 불렀다.


  광릉산의 곡조는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기생 장약에게 배운 것이었다. 처형된 동생의 시체를 끌어안고 나까지 죽이라고 외쳐 부르던 한 누이의 노래 광릉산은 처량 맞았다. 헤어진 장약을 생각하며 벽려혼이 광릉산을 부르니 더욱 구슬펐다. 게다가 똑같이 한 팔을 잃은 풍승상과 벽려혼이 오로지 한많은 왼손으로 부는 피리 소리는 보통 피리 소리와 달리 더욱 끊어질듯말 듯한데, 실제는 왼손 하나가 피리의 여러 구멍을 쫓아다니기 너무 바빠서, 더욱 애절하였다. 요서왕 모용농의 부하들은 멈칫하였다.


  "요서왕 전하, 어째 곡조가 으스스합니다."


  "저게 무슨 곡인지 아느냐?"


  "초가(楚歌) 같습니다."


  그들은 광릉산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초가? 음 항우가 듣던 사면초가(四面楚歌)란 말이냐? 하하하, 어서 가서 치자."


  요서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하시지요."


  한밤중에 귀신을 부르는 것 같은 피리 소리에 기분이 묘해져서 부하가 진언했으나 모용농은 듣지 않았다.


  "여봐라, 저들의 청주 말은 우리 선비 말과 틀려서 이제 기력이 다했다. 더 이상 도망가고 싶어도 못가는 것이다. 일전에 요서성에서 황하를 건너 저놈을 추격해서 목을 쳤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지금 이런 고생을 안해도 되는데 그때 저놈이 낙릉태수 단관을 단칼에 베어버려서 혹시 뭐가 뒤에 있나 하고 지레 짐작하고 마저 추격하지 않아서 오늘 이 고생을 하는 것이다. 한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다."


  "그래도 조심하시지요."


  괴기한 피리 소리에 병사들이 망설였다.


  "이놈들아, 나는 죽은 공명을 보고 도망가는 산 중달이 아니다. 저놈은 이제 시체와 다름 없는 놈이다. 어서 강을 건너서 잔당들을 치고 벽려혼을 베어버리자."


  모용농의 부하들은 스잔한 피리 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오싹했으나 모용농이 먼저 강으로 뛰어드니 그 뒤를 따랐다. 모용농이 제일 먼저 강을 건너서 공지에 나와 있는 벽려혼에게로 달려들었다. 나머지 청주 기마병들은 그들의 공격을 받자 다시 어디론가 어둠 속으로 내빼고 벽려혼과 낙릉궁주도 기병들의 뒤를 따랐다.


  "잠간, 벽려혼 게 섰거라."


  모용농이 말을 걸었다.


  "젠장, 도망도 내맘대로 못가냐? 아무튼 가는 사람을 왜 부르느냐?"


  "너는 더 도망갈 곳이 없다. 이제 한 판 붙자."


  벽려혼은 자신의 비류혼도가 아직 모용농 같은 절대고수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선비병사들과 싸우면서 벽류검법의 많은 부분을 익히고 터득하고 있었다. 청주 제왕 벽려혼이 모용농을 기다리고 서서 요서왕 모용농과 건곤일척으로 마주 싸웠다. 모용농은 장창으로 여기 저기 찌르면서 벽려혼의 파도같은 도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벽려혼의 비류혼도가 첫 번째 작은 순환에서 첫번째 큰순환으로 이어질 때까지 모용농은 그 묘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작은 순환이 시작되는 풍천소축을 맞아서 모용농은 수염이 잘리는 치욕을 당했다. 벽려혼은 모용농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전신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다 잡은 큰 고기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에 두 번째 벽류검법의 순환이 끝나고 세 번째 순환에 들어가면서 모용농이 벽려혼의 도법을 손안에 놓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기껏해야 왼손 하나로 나를 맞설 수가 없지.


  모용농의 장창이 특히 벽려혼의 약점인 생명없는 오른팔을 노리고 장창을 깊이 찔러들어갔다. 벽려혼은 위기의 순간에 오른쪽 치우손을 써서 모용농의 장창을 치워 빗나가게 하여 물리쳤다. 이건 뭐지? 모용농은 생각지도 못한 치우손의 보호로 필살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벽려혼은 바야흐로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리고 있었다. 대적 모용농을 상대하기에는 공력도 부족하고 도법도 다양하지 못했다. 그 순간 숨어있던 사비공주는 즉시 몸을 날려 모용농을 막아섰다.


  "모용농, 너는 포위되었다. 일찍 항복하고 목을 바쳐라."


  사비공주는 백제 한산성에서 홍학검을 빼앗기고 좋은 검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 중평제황이 벽려혼에게 내려준 중평대도가 있어서 그것을 꺼내들었다. 중평대도는 이름만 대도이고 실제는 우람한 보검이었다. 모용농은 처음 보는 상대였다.


  "넌 또  누구냐?"


  "나는 여암의 동생 사비공주다. 여암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여암? 그래 오누이가 한꺼번에 내 손에 죽어봐라."


  "백구조어"


  사비공주는 긴 말 않고 여제검법의 제삼초식 [백구조어]로 모용농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모용농은 긴 창으로 사비공주의 보검을 막아서야 했다. 그러나 그 틈에 벽려혼의 좌수에서 비류혼도가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앗 뜨거라"


  모용농은 평생 처음으로 남의 칼맛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용농, 멈춰라."


  절대절명의 위기에 낙릉궁주의 고함이 들렸다. 모용농이 낙릉궁주를 돌아보았는데 낙릉궁주는 이미 치우검법의 [개물교화]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그녀의 취운검이 어둠 속에서 새파란 형광빛을 내고 부르르르 떨고 있었다.


  "앗, 벽력검."


  모용농은 저 검에 스치면 뼈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저 검에 스치면 모용훈처럼 녹아버린다. 그래서 모용농은 피가 새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얘들아, 활을 쏴라. 저 년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그때 그들 연나라 삼천 기마병들의 좌우에서 난데없이 백제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제남태수 장영이 소리를 질렀다.


  "쳐라"


  "우와,"


  "싱싱한 선(鮮)비 고기를 잡자."


  보통 밤중이라면 함성 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겠만 그래도 대충은 이 함성 소리가 몇 명이 지르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용농의 귀에 들려온 함성은 고작 일이천명의 청주 패잔병의 함성이 아니라 일이만명의 사기충천한 함성이었다. 어둠 속에서 백제병사 들이 선비 기마병들을 압축해 들어왔다. 연나라 병사들은 우왕좌왕 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죽어갔다. 요서왕 모용농은 빤히 바라보는 제왕 벽려혼의 얼굴에서 미소를 읽었다. 속았다.


  "매복이다. 후퇴하라."


  모용농은 말머리를 돌리고 다시 도해하 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물 속에서도 어느새 미리 진을 치고 갈대 숲에 몸을 감추었던 백제군들이 뛰어나왔다. 공천왕이 강물 속에서 솟아나왔다.


  "신선한 말고기로 초밥을 해먹자."


  백제군들은 물에 빠진 말다리를 베어서 기마병들을 거꾸러뜨렸다. 연나라 기마병들은 강물에서 날래게 움직일 수 없어서 백제병들의 공격으로 고스란히 물고기 밥이 되었다. 모용농은 삼천 기마병으로 도해하를 건넜지만 되돌아갈 때는 고작 일이백 기밖에 강을 건너지 못했다. 도해하를 건너서 모용농이 북으로 도망치는 데 낙릉궁주가 소리쳤다.


  "모용농 거기 서라."


   낙릉궁주의 취운검이 아직도 파란불빛이으로 빛났다.





'비류혼(沸流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 황하(黃河)의 결투 - 2  (0) 2015.11.18
#50. 황하(黃河)의 결투 - 1  (0) 2015.11.17
#49. 해하(海河)의 결전 - 5  (0) 2015.11.15
#49. 해하(海河)의 결전 - 4  (0) 2015.11.14
#49. 해하(海河)의 결전 - 3  (0) 201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