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13. 깨어진 신행 - 2

금박(金舶) 2015. 6. 18. 11:11

 

  "의심하면 끝도 없고 나로서는 속을 뒤집어 보여줄 증거도 없어. 그렇지만 하나씩 실천하면 되지. 오늘밤은 위장 결혼하기로 한 것이니까 나는 얌전히 잘 것이야. 지금 당장 침대로 가서 내가 먼저 잘게."

 

  여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서 벌러덩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누워서 애써 잠을 청했다. 말도 없이 술만 마시다보니 모용용은 금새 열이 올랐다. 여비는 그녀가 술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아우, 더워라."

 

  모용용은 술이 너무 올라서 온 몸에서 열이 끓었다. 모용용이 더욱 속터지는 것은 그녀가 여만의 음흉한 계략을 다 알고 쫓아버렸으니 이제 여만이 그녀를 죽여서 입을 봉해 버리려고 들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살아야 되는데, 기필코 이 호구에서 살아나가서 부왕 모용수에게 이들 여씨 형제의 막되먹은 행실을 알려서 복수를 해야하는데. 장안제일미녀 소리를 들어온 모용용이 이런 들판에서 비참하게 죽어 까마귀밥이 될 수 없는데.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모용용은 너무나  초조하고 불안했다. 모용용은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술을 이기지 못하여 옷을 풀어헤쳤다.

 

  "음, 숨이 차다. 너무너무 차다."

 

  모용용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렸다. 모용용은 비틀거리면서 여비의 자리로 갔다.

 

  "어지럽다."

 

  모용용은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여비를 꼭 잡았고 여비는 벌떡 눈을 뜨고 쓰러지는 모용용을 부축하여 안았다. 모용용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하였다. 형제를 갈라놓자. 작은놈이 마음이 여리다. 큰놈은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그녀석의 성품이 결코 자기 손으로 나를 죽이지는 않을 놈이고 필경 작은놈을 시킬 것인데 작은놈을 내 편으로 하자.

 

  여비도 눈을 감고 있었다. 모용용과 살이 맞닿았지만 최대한 자제하였다. 모용용의 향기가 코 끝에 밀려왔지만 숨을 참았다. 연왕 모용수에게 무사히 데려다 주자. 그러나 모용용은 더욱 거칠게 숨을 쉬었다. 요놈이 나를 내일이면 죽을 시체처럼 생각하고 있구나. 형제끼리 그렇게 작당을 했겠지. 하지만 장안제일미녀가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이냐?

 

  "좀 떨어질까?"

 

  여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모용용의 풀어진 가슴살이 여비의 가슴과 맞닿자  여비는 순간적으로 끓어올랐지만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떨어져? 너는 버마재비도 모르니? 내가 바로 버마재비다. 작은놈부터 확실히 잡아먹고 신흥성에 가면 목을 칠 것이다. 모용용은 정말로 독한 마음을 먹고 두 팔로 여비의 허리를 더욱 바싹 잡아다녔다.

 

  두 사람은 모두 피가 끓는 이팔청춘. 게다가 지나친 술 때문에 하나같이 이성을 잃어버렸다. 지금 끓어오르는 피를 다시 식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폭죽처럼 터뜨려서 뜨거운 피를 발산시키는 것뿐이었다. 여비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모용용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녀를 밀쳐내야 하는데 그녀의 두 손이 그의 허리를 놓아주지 않아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우린 남매일지도 몰라. 여비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모용용이 그의 머리속을 뇌쇄시켰다. 이제껏 숨을 참고 그녀의 향기를 떨치고 있는 여비의 의지를 무너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으로 여비의 상체를 쓰러뜨렸다.

 

  여비는 쓰러지면서 이성을 잃었다. 에라, 이건 내 탓이 아냐. 모두모두 모용수가 저지른 일이야. 그의 코 앞에 모용용의 가슴살로부터 향내가 밀려들었다. 장안제일미녀의 가슴속에서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모용용은 술기운으로 온몸이 후덥한데 가슴 속으로 촉촉히 젖은 안개가 파고들어서 세상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겼다.

 

  모용용은 아침 일찍 정신이 들었다. 술기운으로 머리가 아파서 깨어나서 침상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어지러워서 쓰러졌다. 그래도 다시 눈을 뜨고 보니 가관이었다. 간밤에 두 사람이 홀딱 벗고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옷을 다시 차려입고 그 자리에 앉아 멍청히 앉아 있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꼭 복수할 것이다. 그녀는 깊은 상념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비도 깨어났다. 깨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일이었다. 모용용은 건드려서 안된다고 혼자 생각했으면서도 일이 이렇게 되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사비공주 상누이에게 또 죄를 지었군. 여비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병사들을  불렀다.

 

  "자, 빨리 신흥성으로 가보자."

 

  모용용은 그들이 일단 신흥성으로 출발하게 되니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가는 도중  어디쯤에서 그녀를 싹둑 쳐죽이라는 여만의 지시가 귓속에 들려오는 듯했다. 청주사마 여만은 왕기라는 부하 장수와 기병 삼십명을 주어서 여비와 모용용을 신흥성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용은 혹시 왕기가 자객일까봐서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대신에 여비를 볼 때마다 미소를 띠었다. 지금은 미소지만 죽음의 미소였다. 여비는 말을 타고 모용용은 수레에 타고서 길을 재촉하였다. 가다가 처음 민가에 들러서 잠을 자게  되니 모용용은 다시 여비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작은놈이 딴 생각을 못하게 하자. 죽는 날 그의 목 위에 칼이 떨어지면 그때가서 깨닫겠지. 모용용은 그 생각 하나로 여비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잠시  떨어진 사이에 왕기와  여비가 작당하는 일이 있어도 안되었다. 아무튼 모용용은 여행 기간 내내 노심초사하다가 뼈와 살이 말랐다. 그들은 단 열흘만에 신흥성에 닿았다.

 

  신흥성에 들어가자 연왕 모용수를 보고서 모용용은 마구마구 눈물을 흘렸다. 모용수는 막내딸 모용용 공주와의 재회를 기뻐하였다.

 

  "부왕, 다시 뵙는군요. 다시는 못 뵈는 줄 알았어요."

 

  "어서와라. 용아. 정말 다시 못볼 뻔했구나."

 

  여민이 하남에서 혼자 도망하여 모용수를 찾아왔을 때 연왕 모용수는 모용용과 모용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비가 혼자서 모용용을 구해오니 여비의 능력을 다시 평가하였다.

 

  "여비도 수고했다."

 

  모용수가 여비를 치하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예, 조왕. 명령대로 용공주를 모셔왔습니다."

 

  여비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모용용이 그동안 쌓인 한풀이를 하려고 들었다.

 

  "부왕, 여비라는 이 작자가 저를 희롱하였습니다. 제 형이라는 청주사마 여만과 짜고 저를 협박하여 강제로 결혼하고 저를 욕보였습니다. 저의 분통한 심정을 풀어주세요."

 

  갑자기 여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비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기습 공격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내가 언제 저를 강제로 괴롭혔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모용수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했다.

 

  "뭣이라고?"

 

  "부왕 사실이옵니다. 이 자를 죽여 주소서."

 

  모용용이 다시 흐느꼈다. 연왕 모용수는 여비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조왕, 오해이옵니다."

 

  "오해라고?"

 

  "그렇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다면 어찌 감히 용공주를 호송하고 신흥성에 다시 찾아오겠습니까?"

 

  하지만 모용용도 가만 있지 않았다. 부왕 앞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읍소하였다.

 

  "저의 말이 사실입니다. 이 자가 저를 욕보였습니다. 그러니 당장 죽여 주소서."

 

  모용수는 딸이 욕을 보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친아들일지도 모르는 여비를 함부로 죽인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느 말이 사실이냐? 둘이 서로 피를 섞었느냐? 용아가 그렇다고 주장하니 여비가 아니면 아니라고 사실대로 대답해라."

 

  "그건 사실입니다. 저와 용공주는 동평군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호구에서 벗어나오기 위해 피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여비가 피를 섞은 사실을 인정하자 모용수는 하늘이 노래졌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둘이 멋대로 결혼을 해? 너희는 혈연이 아니냐?"

 

  모용수가 여비에게 호통을 쳤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남매간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여비야, 네 성이 모용 아니냐? 그러면 네게 고모가 되는 용아와 어찌 결혼을 한단 말이냐?"

 

  모용용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이 들었다. 여비는 여만의 동생으로 여울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서로 혈연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단지 위장 결혼을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신흥성에 오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 것입니다."

 

  모용수는 아직도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 이해할 수는 없고 두 사람이 불륜이라는 것만 머릿속에 있었다.

 

  "그런데 왜 너희 둘이 피를  섞었다는 말이냐? 혈연인줄 알면서."

 

  "그건 공주께서 과음하신 바람에 실수로 그리 되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조왕의 의손자로서 조왕의 명을 받고 용공주를 구출하러 장안까지 왔노라고 밝혔는데 용공주께서 잠시 잊으신 모양입니다."

 

  모용수가 이번에는 모용용에게 물었다.

 

  "그가 너의 조카벌이라는 것을 알았느냐?"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믿지 않았습니다."

 

  "저 아이는 나의 의손자다. 너를 구하러 내가 장안으로 보낸 것이다."

 

  모용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여만과 작당하여 저를 죽이겠다고 해서 제가 살기 위해 위장결혼을 했고 또 여만의 사주를 받고 저를 신흥성에 데려다 준다고 하면서 오는 도중에 저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