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태풍의 한가운데 - 3
여기서 여비는 말한마디를 잘못하면 꼼짝없이 참수되는 처지였다.
"그냥 제 신세가 우스워서."
그러나 여비의 변명은 통할 수 없었다. 오왕 모용수는 이미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놈이 바른 말을 않는구나. 여봐라, 이놈을 채찍으로 매우 쳐라. 그래야 바른말을 할 것이다."
그러자 병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여비의 양손을 잡아 큰 대자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여비의 옷을 짖은 다음에 등짝에 말채찍을 내려쳤다. 여비는 잘못 웃은 죄로 채찍을 맞은 것이다.
"에구구, 나 죽는다."
여비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벌을 받는 거야. 여비는 어느새 열 대의 채찍질로 등짝이 부풀어오르고 갈라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모용수의 화는 그 정도로 가라앉지 않았고 채찍은 스무대를 다 때리고 멈추어졌다. 처음 몇대는 비명 소리라도 나왔지만 다섯대가 지나자 여비는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차라리 아프지 않다는 엄살이었다.
여비는 생부인 여울과 배다른 동생인 여민의 표정을 힐끗보았다. 여울은 무표정하고 여민은 고소한 표정이었다. 정말 피붙이라면 이럴 수가 있을까? 여비는 섭섭한 마음에 모든 것을 불어버릴까 생각했다. 당장 자기들만 살겠다고 형이 맞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아들이 맞아죽어가도 모른 척하는 생부와 동생을 위해 여비만 입을 꼭 다물어야 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오왕 모용수가 다시 물었다.
"이놈 바른대로 말하거라. 네가 백제 밀정이렸다."
여비는 대책없이 맞아죽게 생겨서 먼저 백제군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사실은 불기현령을 죽이기까지는 했는데 그날로 백제군이 쳐들어와서 불기현령을 하루밖에 못해보고 다시 쫓겨나서 떠돌다가 여기까지 와서 오왕전하를 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제군의 밀정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다시 쳐라."
그러자 오왕의 부하들이 다시 여비의 등에 채찍질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열 대였다. 여비의 등은 온통 시뻘겋게 피로 물들었다. 모용수가 다시 정색을 하고 물었다.
"네놈이 백제군에 대해 아는대로 말해보거라."
"백제군은 선발대가 사오천 정도되는데 그 장수는 대방왕 여계라고 하며 여기 계신 좌위장군(여울)의 둘째 동생이지요."
"그런가?"
백제군의 이야기가 나오자 좌위장군 여울과 그 아들 여민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모용수는 슬쩍 여울과 여민의 표정을 살피고 여비를 다시 바라보았다. 여비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으로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좌위장군의 첫째 동생은 좌위장군의 태자위를 찬탈하고 백제왕이 된 근구수제황이고 현재 백제는 근구수제황의 아들인 중평제라고 하는 분이 등극했는데, 이번 대륙전쟁에는 친나라와 동진나라 양쪽으로부터 군대를 초청받고 참전하였지요."
"그럼 백제군은 남북 어느 편이라는 말이냐?"
"어느 편이든 상관없이 오왕전하 편이 되어야 하겠지요. 아마도 좌위장군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울의 얼굴이 자못 긴장되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봐서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모용수의 큰사위인데 여울 자신에게 그리 큰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친자식인 여비의 생사는 내버려두고 오로지 조심하는 여울이 여비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모용수는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들이 좌위장군의 말을 듣지? 좌위장군의 태자위를 빼앗은 그들이 아니더냐?"
"하지만 백제군 선봉장은 바로 좌위장군의 친아들 여암입니다. 백제 내지로부터 중원에서의 백제군 활동은 좌위장군의 의중을 따르라는 은밀한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모용수가 사정을 다 알아들었다. 여울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처음 듣고 놀라는 척하였다.
"그게 사실이냐?"
모용수가 여울을 한번 흘끔 보고서 다시 여비에게 물었다.
"그럼 네놈은 지금 백제군의 밀정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니냐?"
모용수는 여비의 목적이 좌위장군 여울과 접선하려는 것이 아닌지 물은 것이다. 백제군의 사정을 너무나 잘아는 것이 바로 백제군의 간첩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천만에요. 저는 백제군에게 불기현을 빼앗기고 도망온 자입니다. 그러니 저는 돌아가려고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저놈이 나를 백제 간첩이라고 몰아부쳐서 애매하게 붙들렸습니다만 저는 본시 불기산에서 태어난 중원 사람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제가 태어난 날은 혜성이 동해에 떨어진 날인데, 그날 이후 오왕 전하는 집을 옮기시기로 하셨지요. 제가 중원 사람이 아니면 어린 나이에 어찌 이와같은 일들을 알고 있겠습니까?"
오왕 모용수는 그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비가 밀정치고는 너무 어리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중원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백제에서 건너온 밀정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네놈이 끝까지 중원에서 태어났단 말이지? 그렇다면 네 에비는 누구냐?"
오왕의 질문에 여비는 순간적으로 여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인하고 있는데 저사람이 친아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의리도 없는 부자망신이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여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여비가 고개를 숙이고 답하자 오왕이 노기를 띠었다.
"안되겠구나. 백제놈이니까 말을 못하는것이야. 다시 매우 쳐라."
병사들이 다시 채찍을 쳐들어 열대를 때렸다. 여비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가 엎드린 땅바닥에 등짝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였다. 그래서 엎드린 얼굴에 피가 묻었다. 오왕 모용수가 다시 물었다.
"네 애비가 누구냐? 사실대로 말하라."
여비는 기력이 다해서 오왕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고 겨우 정신을 차려서 말을 돌렸다.
"전하, 제 어미는 혹시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애비를 말하다 말고 난데없이 에미 이야기로 가서 오왕이 알 것이라고 하자 오왕은 어이가 없었다.
"네 에미가 누구길래 과인이 안다는 말이냐?"
여비는 한숨을 돌리고 대답했다.
"저의 어미는 일찍이 업성에서 오왕가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뭣이라고? 우리집에? 도대체 누구인데?"
"제 어미는 풍비라고 하는데 오왕댁의 빈공주를 모셨다고 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여울은 자신의 아내가 된 모용빈 공주의 시녀였던 풍비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잘아는 풍비이지만 오왕 앞에 나서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여비가 풍비의 소생이라 밝혔으면 여울은 이제까지 몰랐더라도 이 순간에는 여비가 자기의 아들로 짐작되리라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여울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모용수가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오왕 모용수는 풍비를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풍비? 풍비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오왕은 여비를 떠보았다.
"풍비라, 필시 본이름은 아닐테고 본 이름은 무엇이냐?"
"본이름? 소자는 모르옵니다. 그저 풍비라고 하였습니다. 빈공주의 곁에서 머리를 따주었다고 했습니다. 참말입니다."
오왕 모용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여비의 머리를 발등으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쳐들어진 여비의 피묻은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일으켜 세워라."
병사들이 여비를 일으켜 세웠는데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여비는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겨우 붙들고 여비는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모용수의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네가 풍비의 아들이라고?"
"사실입니다."
"그런데 네 애비를 모른다고?"
"그것도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