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태풍의 한가운데 - 2
"그가 여암이 보낸 자라면 꼭히 살려서 돌려보내거라. 후일 우리에게 여암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후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가 굳이 일부러 백제와 적이 될 필요는 없다. 친나라는 백제의 적이어도 나나 너는 백제의 핏줄이고 백제의 적은 아닌 것이다."
"그럴까요?"
그런데 오왕 모용수는 이미 자신의 첩보망으로서 백제인이 치우사에 들어와서 여민에게 잡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왕 모용수는 군막에서 사람을 보내어 여울을 불렀다. 오왕 모용수는 사위인 여울을 보자 먼저 말했다.
"좌위장군. 오늘 치우사에 백제인 간첩이 들어왔었다면서? 과인을 죽이러 온 놈인가?"
오왕 모용수도 백제인 간첩이 숨어들어왔다면 이는 여울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오왕의 질문에 여울은 일시적으로 말이 막혔다.
"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너는 아느냐?"
여울이 시치미를 떼고 여민에게 묻자 여민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아까 치우사를 청소하다가 수상한 놈이 있어 잡아서 일단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백제인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그럼 이리로 끌고와라. 과인이 직접 확인하겠다."
여민은 창고로 가서 여비를 끌어내었다.
"음, 전봉장군 오왕 모용수가 어떤 어른인지는 너도 소문을 들어서 알 것이다. 오왕이 너를 심문한다고 하니 너는 허튼 소리를 하면 절대로 안된다. 무슨 좌위장군의 숨겨논 아들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면 여씨 집안의 씨를 말리는 일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죽더라도 너 혼자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알겠냐?"
여비는 생각했다. 여씨 집안의 생사가 그의 입에 달렸다고 하니 경망스런 여민에 의해서 여비가 백제 간첩으로 소문난 것은 사실이고 오왕이 직접 심문한다고 하니 무슨 사정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민, 네 이놈. 네 목숨이 내 입에 달렸다는 말이 아니더냐?"
여비가 오히려 반격을 하자 여민은 말을 못했다.
"당장 이 결박을 풀어라. 그래야 이 형님이 네 목숨이 오래가도록 할 것이다."
여비가 큰 소리를 치자 여민은 기가 질렸다.
"그 형님 소리를 하면 안된다니까, 이놈이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나. 내 손으로 너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칼자루를 쥐고 협박하는 여민이지만 여비에게 한 수 아래였다.
"어허, 이놈이 그래도 형님한테? 너 정말 죽고 싶냐? 당장 결박을 풀어라."
여비가 한번더 호통을 치자 여민은 할 수 없이 여비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여민은 병사들과 함께 여비를 앞장 세워서 오왕의 막사로 향해갔다. 여비는 오왕에게로 가면서 여울을 만나보더라도 생부라고 반가워하면 안되고 어떻게든 백제 간첩이라는 오명만 벗어나서 살아나가는 궁리를 했다. 오왕 모용수의 막사에 도착하여 여비는 친아버지인 여울과 생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여울이 이미 여비가 자신의 친아들이라는것을 여민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여비가 짐작했지만 여울의 얼굴에는 반가운 표정이 없었다. 실제로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 여울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여비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여비는 그가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 여울에게 이미 여러 아들이 있고 어디선가 나타난 또 하나를 얻는 것이니 별로 큰 기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비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였다. 빼앗겼던 아버지를 다시 찾는 것도 아니고 일찍이 없던 아비를 십오년만에 찾는 것이니 가슴이 뭉클거리는게 말문이 막혔다. 나, 지금 외롭고 쓸쓸하고 세상이 다 저주하는 것같고 기분이 되게 언짢은데, 피의 뿌리, 아버지를 나무 밑둥처럼 깔고 앉으면 나을 것인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비는 번짓수를 잘못 찾아왔다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친아비를 찾아오지 말고 상상으로 간직할 것을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여울의 표정은 너무 짧았고 이내 여울의 얼굴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여비는 도무지 서먹서먹했다. 정말 내 아버지 맞나?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비는 눈대중으로 여울의 얼굴이며 체형을 살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오왕 모용수가 물었다. 오왕 모용수는 산천초목을 떨게하는 위인이었는데 그의 앞에 와서 딴전을 피는 여비를 보고 의외였다. 내 앞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딴데로 굴리다니 제가 곧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무지한 놈인가, 아니면 천성적으로 간이 부은 놈인가?
"소장은 여비라고 하외다."
여비 말투까지도 매를 벌고 있었다.
"소장? 네깟놈이 어디 군대 장수냐?"
"오왕 전하, 당금 청주 장광군의 불기현 현령이 본관이외다."
"과연 오랑캐놈이 틀림없구나."
새까맣게 어린 여비가 반란을 일으킨 불기현의 새현령이라니 모용수가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당금 중원에 한가락하는 집안 치고 오랑캐 아닌 집안이 어디 있답니까?"
여비가 모든 사람을 오랑캐로 치부하자 모용수의 화가 돋았다.
"너는 지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과인이 오랑캐로 보이냐?"
"모용 가문이야 오랑캐 중에도 진짜 오랑캐 집안이지요. 중원의 주인 오랑캐니까."
"중원의 주인 오랑캐?"
오왕 모용수는 중원의 주인 오랑캐라는 소리에 솔깃했다. 지금 중원은 엄연히 친나라 부씨가 주인인데 모용가문이 주인오랑캐라니, 무슨 소리인가? 오왕은 말을 돌려서 물었다.
"그럼 사마씨는 대체 무엇이냐?"
친나라 왕가인 부씨에 대해 물어 보려다가 그러면 반역으로 몰릴 수가 있으므로 남쪽의 동진 왕가인 사마씨에 대해 물은 것이다.
"단지 잠깐 동안 말지기가 주인의 제위를 찬탈한 것이지요."
사마씨는 과연 위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친나라 부씨도 모용씨의 연나라를 잠시 찬탈하여 세운 것이라는 표현이었다.
"네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치로 말하면 은나라의 후예가 연나라이고 당연히 황하의 주인이지요. 그러나 서로 화목을 잃으니 일시적으로 불행을 맞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은 사필귀정이니 본주인이 제정신만 잘 차리면 다시 주인 손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본시 쌍것들이 인덕도 없이 주인이라 나서면 친시황제처럼 오래가지 못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오왕은 연나라를 회복하고 중흥시킬 선비족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친시황의 친나라와 같은 이름의 친나라를 세운 부견의 세상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 다시 연나라가 부흥할 것이라는 여비의 아부가 싫지 않았다.
"헛수작, 진짜로 네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여라."
모용수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여비가 그의 군영에 찾아온 목적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이놈이 래이족으로서 청주 땅 불기산에서 태어나 어느날 청주자사 부랑의 아들인 불기현령 부종과 계집 하나를 놓고 다투다가 불기현령을 단칼에 죽이고 하룻밤 불기현령을 차지했지만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정처없이 떠도는 몸이지요."
"허허허허. 계집 때문에 현령을 죽여? 허허허허."
모용수는 크게 웃었다. 불기현의 반란이 고작 계집 때문이었다니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흐흐흐흐."
여비도 따라 웃었다. 모용수가 웃는데 모용수의 앞니빨이 다 빠져서 그 웃는 모습이 더 우스웠다. 모용수의 본명은 모용패(覇)였다. 다섯째로 태어나 부황인 모용황 황제의 사랑을 받았다. 모용황이 그를 태자로 삼으려다가 장자인 모용준에게 나라를 넘겼다. 그러니 황제가 된 모용준이 그의 자리를 위협했던 모용패를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다가 모용패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앞이빨이 몽땅 빠져서 흉한 얼굴이 되었다. 모용준은 그에게 모용수(蒐)라고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이후로 모용수는 이름이 바뀌는 모욕을 참으며 살아왔었다. 그후 모용수는 용장은 용장이었지만 남달리 포악했고 다시 글자를 바꾸어 모용수(垂)로 쓰게 되었다.
형인 모용준의 아들 모용위가 다시 황제가 되었다가 망하기 직전에는 4째 형인 모용각(고구려, 백제 정벌장군)이 최고 재상인 태보로서 모용수를 돌봐주었으나 모용각이 죽자 태보가 된 모용평은 모용수를 죽이려고 모함하여 친나라로 망명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을 거꾸로 잡고 친나라를 도와 모용위의 업성을 함락시키고 모용평을 죽였던 모용수였다. 그런데 여비는 모용수의 웃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 그만 웃고 말았다. 모용수가 웃는 모습 때문에 옆에서 웃었다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이는 모용수가 58 세에 이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용수가 웃다말고 싸늘한 눈초리로 물었다.
"왜 웃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