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7. 천륜을 어긴 골육지정(骨肉之情) - 4

금박(金舶) 2015. 5. 24. 14:18

 

  "뭔가 잘못 됐어."

 

  "응, 느낌이 않좋네."

 

  독천왕은 고즈넉한 정자 아래에 여비와 단 둘만이 남았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비는 다시 물었다.

 

  "우리 결혼이 잘못된 건가요?"

 

  중국에서는 보통 동성의 혼인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더러는 사촌끼리도 결혼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친남매만 아니면 중국내에서도 대개 결혼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용빈의 시녀였던 대랑이 모용빈을 따라서 백제 왕자 여울의 집으로 들어갔었나요?"

 

  여비가 다시 묻자 독천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餘)자 울(蔚)자 쓰는 그 사람이 그럼 내 장인이 아니라 내 친아버지라는 말이에요?"

 

  여비가 또 물었지만 독천왕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확실한 사실인지 독천왕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는 대로 다 말해주세요."

 

  여비가 채근을 하자 독천왕이 벌떡 일어났다. 독천왕은 그 이상 말하기도 괴롭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다음에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확실히 모른다. 그때 나는 업성을 떠나서 전장에 나갔다. 전장터에서 돌아와보니 대랑이 없어졌더구나. 그리고 난 또다시 전장에 나갔고 불기산에 와서 어느날 다시 만났지."

 

  여비는 아무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텅빈 느낌이었다. 날벼락이 뒷머리에 맞아서 머리가 터지면 이토록 모든 생각과 사고가 멈출까? 자기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독천왕을 뒤로 하고 걸었다. 부근에는 세 천왕이 물끄러미 달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두들 일부러 여비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기분이었다. 여비는 세 천왕도 뒤로 하고 현령의 침소로 들어가다가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어느새 여비는 불기현성을 나가서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무작정 걸어가고 있었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조금씩 생각이 되살아났다. 그래, 맞을거야. 그랬을 거야. 우리가 생전 처음 만났어도 본래 같은 피를 나눈 한 뿌리 남매라서 처음부터 남남같지 않고 다정하고, 마치 하늘이 준 반쪽같고 거기에 미친 듯이 빨려들어 사랑했을거야.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상누이, 안녕. 영원히 안녕. 내가 죄를 지었더라도 친동생을 용서해. 친동생이니까. 그렇다고 이제부터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누이를 누이로만 생각하고 살 수도 없어. 그래야만 하는데. 이미 누이가 아니라  애인으로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나혼자 멀리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야. 더 이상 하늘에 죄를 짓지 않고 또 남들에게 상누이가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말이야. 아무튼 누이는 우리가 서로 천륜을 거역하는 대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행복하기 바래. 새벽 이슬이 여비의 얼굴에서도 흘러내려 달빛에 반짝였다.

 

  여비는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보름만에 청주성에 이르렀는데 9 월 1 일이었다. 가출. 이거 얼마만인가? 하루 동안의 가출은 어쩌다 있었지만 이렇게 보름씩 가출하는 것은 여비로서 처음이었다. 비록 조박한 음식일 망정 산채에서는 시끄럽게 먹었고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는데 집나오고 보니 돈주고 사먹는 음식이 전처럼 상큼한 별미가 아니고 끼를 거듭할수록 소태처럼 썼다. 반찬이 뭐가 부족한 게 아니라 마주보고 이야기하면서 같이 식사하던 버릇 때문에 처량하게 혼자서만 밥을 먹는다는 것이 씁쓸한 것이다. 입맛을 잃어버려서 더러는 굶고 잠들기도 했다.

 

  사비공주가 꿈결에 야단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벌떡 깨나면 아무도 없고 깊숙한 어둠만이 친구였다. 여비는 도리도리 고개짓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뭐 이런 재수없는 경우가 다 있어.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비공주와 난생 처음 만나서 한눈에 반하고 그리고 뜨겁게 사랑했는데 그게 친남매의 불륜이라니. 잊자. 운명이다.

 

  청주 광고성의 시장터에서 국밥을 사먹다가 장황한 결혼행렬을 만났다. 꽃가마 타고 가는 신부는 바로 청주자사 제왕 부랑(艸+付 朗)의 외동딸 부림(艸+付 琳)이라고 했다. 이제 15 살이라는 꽃다운 색시였다. 부랑의 아들 부종을 불기산에서 죽인 여비지만 부림 공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여러 가지로 궁금했다. 부림의 신랑이 누구냐고 물으니 신랑은 놀랍게도 여비의 생부(生父)인 여울(餘蔚)의 아들 여만(餘滿)이라는 것이었다. 여만은 약관 17세의 소년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왕 부랑은 본래 전진의 황제 부견의 종형의 아들로서 청주자사에 임명되었다. 부랑은 두달 전에 부림의 적당한 혼처를 찾으러 친나라 수도 장안에 중신아비를 보내었는데 중신아비는 모용수의 사위인 여울의 아들 여만을 추천하였고 혼담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곧 있을 친나라와 동진과의 일대 대회전을 앞두고 장안성의 여울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고 여만 혼자만 청주성으로 보내었다.

 

  한편 부랑의 큰아들 부락(艸+付 洛)은  청주부장으로서 청주성을 수비하고 있었고 작은 아들 부종은 불기현령으로 내보냈는데 바로 보름 전에 여비 손에 의해서 전사하였다. 부랑은 작은 아들 부종을 잃어서 애통해하다가 사윗감 여만을 보았다. 여만은 열흘 전에 청주에 도착하였는데 부랑은 그를 보자마자 관직을 주겠다면서 무예를 시험하였다.

 

  뜻밖에도 약관 17세의 소년 여만의 무예가 청주성의 여느 장군과 대적하여서도 밀리지 않았다. 부랑은 여만을 아주 흡족하게 생각하고 청주사마 치천공(治川公)으로 제수하고, 사마 저택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부종의 시체를 찾지 못하여 미처 장사지내지 못하였지만, 그 슬픔을 빨리 잊고  여만을 잃어버린 부종 대신의 아들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부랑은 오늘에 이르러 청주성 제왕부에서 만여 명의 하객을 불러모아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저녁 늦게 술에 만취한 여만과 부림을 꽃가마에 태워서 여만의 집인 사마관저로 기쁘게 보내었다. 여비는 신나는 결혼행렬을 따라가며 여만의 집사가 행렬 앞에서 뿌리는 푼돈을 줍다가 어느새 여만의 사마관저 저택 문앞까지 이르렀다. 여만의 저택 앞에서 모든 행렬이 흩어졌는데 여비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들이 제지하였다.

 

  "너는 누구냐?"

 

  "나는 새신랑 치천공의 동생이오."

 

  문지기는 여만의 동생이라는 말에 당장 귀빈 대접을 하였다.

 

  "무엇이라고? 그게 사실입니까요?"

 

  "아무렴요. 오늘 도착해서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여만의 집사가 뛰어나와 여비를 가장 좋은 객사로 이끌었다. 이복형인 여만은 잔칫술로 인하여 아주 만취되어 몸을 못가눌 정도였으므로 오늘은 만나볼 수 없다고 집사가 말하며 저녁상을 받은 후에 일찍 자두고 내일 아침에 만나보라고 하였다. 오늘도 혼자 먹는 저녁밥이지만 그래도 형님댁이라고 하니 기분이 바뀌어 여비는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여비는 여만이 생전 처음보는 동생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참고 잠을 청했다. 보름동안 여독이 가시지  않아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곤하게 잠들었는데 열두시가 되어서 누군가 여비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등잔불도 켜지 않고서 잠자는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일어나라."

 

  "음? 누구야?"

 

  "너 혼나기 전에 빨리 안 일어나?"

 

  여비는 잠결에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쥘부채로서 그의 얼굴을 꼭꼭 찌르고 깨운 것이었다.

 

  "왜 깨워?"

 

  여비는 물어보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반말을 했는데 반말은 버릇없는 산도적 여비의 특기였다.

 

  "도대체 여긴 왜 왔어?"

 

  "그냥"

 

  여비는 잠결에 별뜻없이 대답하면서 정신을 차려갔다.

 

  "흥. 네 녀석이 여기 온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정신을 막차린 여비는 상대방이 자기 속셈을 안다고 하자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장난기가 발동했다.

 

  "뭔데? 알아 맞춰봐."

 

  "흠. 이모가 시켜서 감시하러 온 것이지?"

 

  "맞아."

 

  여비가 그저 맞장구를 쳤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며 또 누구하고 얘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필경 여비가 동생으로 자처하고 이 집에 들어왔으니 이 자는 그의 생부 여울의 아들인 여만이고 여비의 형인데 여만은 여비를 모른다. 그러니 여만은 여비가 아닌 다른 동생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 동생과 여비가 목소리나 키가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모는 또 누구냐? 여비의 궁금증이 깊어갔다. 여만이 뒤로 돌아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나한테는  필요없으니 차라리 너한테 주마."

 

  상대가 이렇게 말하니 점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응? 필요가 없어 주다니? 대체 뭘 준다는 거지? 여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 줄건데?"

 

  "지금 당장 주지. 대신 이모한테 가면 사실대로, 네가 본대로 바른 말을 하여라. 자, 빨리 따라와."

 

  여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따라와"

 

  어둠 속에서 여비는 상대방을 따라나섰다. 처음 만난 형님이 무엇인가 준다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여비는 그냥 따라갔다. 여비가 여만을 따라 간 곳은 사마관저 내당의  안방이었다. 안방 문 앞에서 여만이 귓속말로 말했다.

 

  "너, 한가지만 맹세해라."

 

  여비는 갑작스런 맹세에 겁이 났다. 맹세라는 것은 목숨도 거는 것인데 오늘밤 내 목숨이 위태롭기까지야 할까?

 

  "뭘?"

 

  여비가 다시 묻자 여만이 천천이 말했다. 마치 여비에게 다짐을 받고 다짐을 여비의 가슴속에 새겨두려고 했다.

 

  "오늘밤이 지나 첫닭이 울기 전에 절대로 내 동생이라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절대로 오늘밤만은 안되는 거야. 알았어?"

 

  "꼭 그래야 돼?"

 

  동생으로서 이 집에 찾아왔는데 동생인 척을 말으라고 하니 여비가 답답하였다. 지금은 무슨 사정이 있길래 그럴 수밖에  없고 또 맹세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여만이 다그쳤다.

 

  "맹세하라니까."

 

  "그럼 맹세하지."

 

  "좋아, 그럼 이제 신부가 기다리는 신방에 들어가서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여만은 다시 여비의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