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기산(不其山)의 호걸들 - 01
비류혼(沸流魂) - 구자일 저
저자 약력: 1992 시집[나를 닮아 미운 개구리 그리고 나]
1993 소설 대발해(전3권)---역사무협
1993 소설 [슬프지 않은 사랑]
1994 심리치료서 [개꿈도 약이 된다.]
1995 역사지리 [고구려발해지리사]
1997 역사지리 [한국고대역사지리연구]
[작가서문] - 비류혼의 해제 -
5년 전에 출간한 [소설 대발해]에 대하여 최근에 들은 바로, 일부 청소년에게 국사 전공(國史專攻)이라는 진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을 때에, 우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알고, 또 널리 알리려는 나의 뜻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 같아서 기뻤고 그것은 또 새로운 글을 쓰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지난 4년은 소설 대발해에서 미진했던 역사적 사실 파악에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만주 유적지를 보고 또 느꼈다. 나 스스로는 기존 사관과 다른 만주 중심의 단군조선 사관을 형성했다. 단군 왕검은 마한산(영변의 묘향산)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단군조선을 만주 심양시 일대에서 개국하셨으므로 기록도 만주 쪽에 많이 남았고 반면에 한반도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한반도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는 단군조선이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도 단 한분의 왕검께서 이천년을 살았다고 믿을 수 없게 기록한 반면에, 거란국 역사인 [요사]는 원나라 때에 기록되었음에도 단군조선의 후대인 기자조선만도 사십여대를 전했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발해를 뒤이은 거란의 요국, 여진의 금국, 몽고족의 원국이 단군에 대한 역사 자료를 갖고, 반면에 신라를 이은 고려는 자료가 빈곤하고 무엇보다도 그 단군의 땅 조선국 만주벌과 그 단군의 후예 백성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본책 비류혼 4권은 4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기 300년을 전후하여 의씨부여국(依氏夫餘; 요녕성 철령시)이 선비족 모용외에게 멸망당하여 수만 명의 부여인들이 중국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들이 북경의 시장에서 노예로 전매되는 참담한 아픔이 [진서]에 기록되어 있다. 의씨 부여는 대방백제(만주 요양시)를 쳐서 백제 책계왕의 전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의씨부여는 신라를 거쳐 대부분 일본으로 떠나 숭신천왕조를 세웠다.
이때 책계왕의 뒤를 이은 백제 분서왕은 낙랑서현, 즉 부여고지(만주 철령시)를 쳐서 선비족 모용씨로부터 빼앗고 스스로 부여왕이 되어 비류왕대까지 지켜내었다. 그러나 모용씨의 전연국이 다시 창궐하게 되니 343년 전연국의 선비왕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길림성 사평시 이수현 평랑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5만 여 명의 고구려 백성도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346 년에는 다시 부여성(비사성, 대련시)을 쳐서 그곳의 부여왕, 즉 백제 14 대왕인 계왕과 백제인들 5만 명을 또다시 중국으로 끌고갔다. 국난을 당한 백제에서는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된다.
바로 그때에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백제의 후예들이 [자치통감]에서 다수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람은 북연(北燕)을 세운 북연천왕 고운(高雲;재위기간 407-409년)이다. 그의 조부 고화는 환도성에서 끌려간 사람이다. 그러나 북연 이전에 산동반도 청주에 제국(齊國)을 세운 비류훈(沸閭渾; 재위기간 384-399년)은 아버지가 벽려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즉위하여 그 넓은 땅을 차지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그의 역사 기간이나 영토 넓이, 경제적 위치로 보아서 비류훈의 청주 제국은 당연히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로 취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중국 역사 속에 하나의 독립국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니 특별한 의심이 간다.
오호십육국에 포함된 모용덕의 남연국(南燕國 399-410년; 비류훈의 제국을 멸망시킴)은 똑같은 땅에서 겨우 12년밖에 존재하지 못했어도 자세히 기록된 것과 극히 대조되는 것이다. 이는 제왕(齊王) 비류훈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고 연호를 세우지 않은 까닭만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측에서 보면 감추고 싶은 역사적 사실, 백제(百濟)가 외세(外勢)라는 변수가 스며있는 것이다. 당태종 교시에 의해서 왜곡된 [진서(晉書)]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백제 기록이 아예 없다. [송서] [남제서] [주서] [남사] [북사] 등 당나라 이전, 동진(東晉)의 후대 기록에는 바로 동진 시대 말기부터 백제가 중국 해안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당나라가 조작한, 현재 내려오는 [진서]에는 백제가 탈락되었던 것이다. 이는 비류훈에 대해 사라진 기록과 사라진 역사적 평가와 유관한 것이다.
또 바로 그 시기에는 346년 부여왕이라는 여현(餘賢)과 370년 부여 왕자라는 여울(餘蔚) 그리고 또 385년 여암(餘巖), 399년 여초(餘超) 등이 활약하였던 것이 [자치통감]에 나와 있다. [자치통감]에서는 그들 여씨를 부여 왕손이라고 했지만 선비족에게 망한 최후의 부여 왕가는 의씨(依氏)였으며, 여기서 말하는 부여는 의씨 부여 멸국 후에 부여땅을 되찾은 백제의 새로운 국호로서 부여국이고 그 왕성인 여씨(餘氏)는 의심할바없는 백제의 왕성(王性)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으니 백제 전체가 한때 [부여국]이라고 부르던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산동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것이 본책 비류혼(沸流魂)의 주제이다. 역사기간으로는 383년부터 385년까지 이 사이에 도대체 불기산(不其山)의 호걸들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목차
#1. 불기산(不其山)의 호걸들
#2. 도화결의(桃花結義)의 내력
#3. 황금장의 혈투
#4. 토기와 거북이의 혈투
#5. 한여름밤의 꿈
#6. 산채의 결전
#7. 천륜을 어긴 골육지정(骨肉之情)
#8. 목숨건 씨내리
#9. 태풍의 한가운데
#10. 장안 제일 미녀
#11. 불타는 중원
#12. 사랑과 음모
#13. 깨어진 신행
#1. 불기산(不其山)의 호걸들
서기 383년 음력 8월초---
그의 이름은 여비(餘秘)였는데, 그는 자기 이름부터 수수께끼였다. 이제 이팔청춘 열여섯 살, 만으로는 열다섯 살, 그래서 아직은 세상만사가 알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는 일이 더 많았다. 왜 하필 열여섯살일까? 15년전에 태어났으니까. 그런데 왜 열여섯살이라고 하나. 뱃 속에서 일년 동안 만들어졌으니까. 그럼 16 년 전에 어떻게 만들어져서 15년전에 태어났을까?
세상 이치가 하나를 알게 되면 그 하나로 해서 꼬리를 물고 모르는 일이 열 개는 더 생겨난다는 것을 비로소 깨우쳤다. 많이 안다는 것은 남이 모르는 것을 남보다 많이 안다는 상대적인 것만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도대체 자기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많다는 것을 남보다 더 많이 알게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를 알기 전에는 생길 수가 없는 의문들이 하나를 알게 되므로서 바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라고 했나?
하지만 남들도 다 아는 것을 멍청하게 자기만 모를 때는 그것이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여비는 자기 아버지를 몰랐다. 그 부분은 계속 망각 속에 묻어두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이 더욱 수수께끼였다. 이름 자의 숨길비(秘)자까지도. 아무튼 그는 여비라고 부르기 보다는 스스로 소천왕(少天王)이라고 하였다. 소천왕. 작은 천왕. 언젠가 대천왕이 될 인물. 그의 어머니 이름은 풍비(馮婢)라고 했다. 주변에 살고 있는 해이(海夷)족에게는 흔한 풍씨 성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가르켜 불기산(不其山)의 대낭랑(大娘娘)이라고 불렀다.
산채(山寨)의 가족들은 그녀를 단지 대랑(大娘)이라고만 불렀는데 이는 산채의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산채의 가족이 아닌 이 지방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만 대랑이라고 부르고 그녀의 뒤에서는 여마두(女魔頭)라고 불렀다. 그들은 여비까지도 소천왕이 아니라 소마두라고 불렀다. 천왕과 마두의 차이는 내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생각하는 자신의 차이다.
대랑이 무시무시한 여마두가 된 것은 무슨 나쁜 짓을 나서서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여색이 여러 나쁜 마두들을 한꺼번에 거느리고도 남으니 오로지 초절정의 색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풍비의 남편은 약간 많은데 네 명이다. 그들은 자칭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한다. 물론 사마왕(四魔王)이라고 불려질 때가 더 많았다.
사천왕의 첫째는 독천왕(禿天王)이라고 불렀는데 탁발천왕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독두(禿頭), 즉 대머리였으며 수도승처럼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육척의 거구로서 퉁퉁했다. 그의 무공은 양 주먹과 양 발을 주로 이용하는 권법이었고, 무기로는 탁발(托鉢)처럼 생긴 둥근 철환(鐵丸)을 쇠사슬에 매달아 휘둘렀는데 쇠를 잘 다루는 둘째 흑천왕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가 "아미타불" 하고 불호(佛呼)를 외치면 이미 살계(殺戒)를 범한 것이었는데 대개는 상대방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므로 상대방은 이미 들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이고이 잘 가시라고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흑천왕(黑天王)이라고 부르는데 마른편이지만 허약해 보이지 않고 강골로 보였다. 게다가 온 몸이 시커멓게 털로 뒤덮여 있었다. 물론 구레나룻 수염으로 얼굴마저 거의 덮었다. 그는 산채의 대장장이를 겸할 정도로 쇠를 잘 다루었고 틈만 나면 검을 만들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철사장(鐵沙掌)을 익혀 손바닥이 솥뚜껑처럼 단련되었고, 악력이 뛰어나서 가슴 높이에 이르는 무쇠지팡이 흑철장(黑鐵杖)을 가지고 한 손으로 휘두르며 무기로 썼다. 그가 정말 화가 날 때는 입술마저도 흑빛이 되는데 이때 무쇠지팡이 꼬챙이 쪽으로 목을 찔리면 그나마 자비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무쇠지팡이 뭉툭한 손잡이 쪽으로 가슴을 때리면 상대의 염통이 뭉개진다. 그래서 흑천왕은 염라대왕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가 따라다녔다.
셋째는 장천왕(長天王)이라 불렀는데 호리호리한 몸매로서 형제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달린 것처럼 키가 커서 칠 척이 되었다. 그의 무기는 그의 키보다도 가늘고 긴 팔 척의 장창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장창을 짚고 높은 곳을 뛰어넘는 또 다른 재주도 있었다. 보통 관아(官衙)가 두 길 높이로 담을 쌓아놓아도 장천왕은 제 집 드나들 듯 넘어다녔다. 그는 사실 산채의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아래로 드나들 때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운동 삼아서 홍살문을 지날 때마다 그 위로 뛰어넘었다. 어쩌다 실수를 하면 홍살문 꼬챙이에 찢겨서 엉덩이에 상채기가 나는데 그날은 재수 없는 날이므로 그보다는 그의 옆사람이 조심을 해야 한다. 키 큰 사람이 원래 신경질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신경질이 나면 남의 것을 집어오는 나쁜 버릇, 도벽이 있었다.
반면에 넷째는 공천왕(空天王)이라고 하는데 키는 평범했지만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쪘다. 그의 특기는 공공(空空), 즉 훔치는 것이었는데 그의 곁을 멋모르고 스쳐 지나면 무엇인가 털리기 일쑤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일단 털리면 그를 홀랑 발가벗겨도 방금 털린 물건을 되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의 둥근 살 틈속 어디에 숨겨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살 틈을 잘못 뒤지다가는 손을 베이기 똑알맞다. 그는 짧은 비도 두 자루를 항상 몸속에 숨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천왕은 비도 두 자루를 숨겼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쌍절곤을 무기로 쓴다. 그의 손이 재빠르기가 여간 아니라서 그의 허리춤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쌍절곤은 연속해서 격타하기 때문에 그에게 한 번 맞았다 하면 최소한 다섯 대를 맞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순식간에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은 보통이고 때때로는 눈깜짝할 새에 애꾸눈이 되고 만다. 여러 재주가 많은 공천왕이 가장 비장의 무기로 삼는 것은 혓바닥에서 날아가는 비침이었다. 공천왕은 짧은 바늘 두 개를 잇몸 사이에 숨기고 다녔는데 가끔은 이쑤시개로도 쓰고 또 가끔은 그것을 쏘아서 면전에 있는 사람을 죽이거나 졸도시키는 숨겨진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천왕은 모두 본이름을 숨기고 사는데 이는 조정에 죄를 짓고 도망해 온 때문이었다. 아쉬운 것은 당시 조정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어느 조정에 죄를 지었는지 불분명하다. 후세 사가들은 이때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했다. 실제는 삼십 여개에 가까운 나라가 세워졌으니, 새로운 나라 조정이 어느 아침 일찍 나팔꽃처럼 생겼다가 아침나절도 못 지나고 이슬처럼 없어지던 때였다. 그러니 오늘 밤까지는 조정의 충신이지만 내일 새벽에는 역신이 되는 난잡한 세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