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매(제8부)

제 004 회 무오년(戊午年, 서기 1618년, 만력 46 년) 여름 - 1

금박(金舶) 2018. 1. 28. 08:35


진원성의 행적 : 의주에서 명과 조선간의 국경을 넘은 진원성 일행은 남하여 한양에 도착하고, 진원성은 한번 본적이 있는 허균을 찾아만난다. 이후 남하하여 부산진에 당도하나 하절기 바다가 순하지 못한 탓에 순한 일기를 기다리다가 가을에야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와 일기도(壹岐島, 이키)를 지나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4 월 초순 경 진원성과 통역 홍자유는 한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진원성은 한번 만난적 있던 허균을 수소문 하여 찾아가 만난다.


진원성은 허균이 호흡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음을 알고 애석해 한다. 허균은 과거 젊을 적에 선도 호흡공부를 3 년간 수련한 적이 있으며, 그 결과 입에서 배꼽 까지의 기도(氣道)가 뚫렸고, 단전에 쌀알만큼의 여문 것이 생겼다가 수련을 중지하자 뭉쳐모였던 기운은 그만 풀어져서 다시 위로 솟아나서 가슴을 찢는 아픔을 준 후 사라졌었다. 진원성은 진기가 모였다가 사라지는 과정이 어땠는지를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초심자들이 모르고 넘어가는 단계 징후를 알게 되고, 허균은 자기가 큰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원성은 허균의 당시 겪었던 일 즉, 쌀알 크기의 기단이 흩어지면서 기도를 따라 진기가 위로 솟구치는 과정을 기를 움직여서 허균의 몸에 재현시켜 겪게 해주며, 이일을 통해서 허균은 진원성이 단순한 의원(醫員)이 아니라 경계(境界)를 넘어선 이인(異人)임을 알게 된다.


허균은 진원성에게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묻고 자기가 광해왕에게 갖는 기대와 실망을 토로하고 결국 진원성의 조언을 듣게 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혁명은 불가능이라는 것, 또 아래로 부터의 혁명은 백번 해서 한번 정도 성공하는 것이며, 그것이 새로운 나라의 건국이라는 것을 듣는다. 이로써 허균은 광해왕에게 갖는 기대가 잘못이며,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시도해서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나중의 혁명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보탬이 됨을 알고서, 허균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려고 한다. 


허균은 5 월 부터 북방에서 총포부대를 데려올 것이라는, 그동안 광해왕에 대해 막연히 기대를 갖었었는데, 이제부터는 그 기대를 버리고, 자기의 사유재산 전부를 내던져서 일을 추진한다. 한양과 경기도 근처에 있는 왈패들, 천민, 걸인, 할 것 없이 사람들을 모아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한다. 이들은 누가 먼저 주창했는지는 모르지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活貧黨)이란 이름으로 패거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양 도성에는 밤마다 이곳저곳에서 활빈당인들의 집회가 열리고, '북에서 오랑캐가 쳐내려오니 피난을 가야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계속된다. 한양성은 이렇게 혼란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때까지 허균은 아직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광해왕이 북변에 있는 1만 명 총포부대를 불러와 한양에 있는 양반 기득권 세력을 모두 잡아죽이고 위로부터의 혁명을 행여 해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허균만의 희망이었다. 


이렇게 한양성은 날이 갈수록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편 광해왕은 허균이 변한 것을 보고 달래려고, 허균의 딸을 세자의 후궁, 소훈(昭訓 세자궁의 종5품직)으로 들인다. (1618 년 5 월 13 일 세자궁의 소훈을 간택하는 일로 광해왕은 전교하다.) 그러나 허균은 광해왕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 속에서는 이미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아래로부터의 혁명 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이미 요동에선 전쟁이 터졌으며, 명나라에서 이미 조선 총포부대 군병이 있음을 알고 요동총병은 조선조정에 파병을 요청하는 상황이다. 허균의 반대패들은 허균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공격할 좋은 약점을 잡아내며, 광해왕은 결국 감추어두었던 허균과 기준격의 과거 상소를 꺼내 조정에 공개하여 양측을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이로써 허균과 기준격은 둘 중 하나가 죽을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광해왕은 허균을 압박하여 활빈당의 소란을 포기하라고 하지만 끝내 활빈당의 소요는 멈추지 않고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허균은 광해왕의 지시로 의금부로 잡혀들어가 명료한 재판과정도 없이 가을 8월 어느날 핏물로 산화한다. 또 이로써 허균의 일가는 일제히 패망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절의 북인들 모두가 조선국 마지막에 사면복권 되었지만 허균만은 일제에게 패망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날까지 복권되지 못한다.)


무오년(서기 1618년임) 4월 요동도사 산하의 군장(軍將)이 보내던 진강 근처에 나타난 조선병들 문제에 대한 힐문이, 누르하치의 무순성 침공으로 인하여 변하게 되었다. 즉 윤 4 월 27 일 요동총병 왕가수(王可受)가 조선에 보낸 공식문서가 도착한다. 그 내용은 후금 누루하치를 치기 위한 파병을 요구하며, 이로써 누르하치를 동서 협공으로 공격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5 월 1 일 광해군은 조정에서 조명군(助明軍) 파병을 거부하고, 의주의 국경 근처에 군사를 내보내 경계를 강화하라 전교한다. 이로써 허균은 아직도 광해왕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할수도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이첨, 유희분 등 조정 모든 신료가 파병해야 한다고 광해를 압박한다. 임진, 정유 왜란에서 조선에 파병해 구원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국 조정은 뜨거운 여름을 지내게 된다.


한편 여진 금나라의 누르하치는 마침내 무순성에 대해 침공을 결행하였다. 여진 8기군은 4 월 13 일 무순성을 포위하여, 명군 병사와 성민 2만 명이 죽은 후, 3 일만에 무순성의 성주(城主) 유격장군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내고, 무순성을 함락시킨다. 여진군은 무순성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모든 성민을 포로로 잡아들이며, 무순성벽을 허물어 평지로 만든 후에 약 십 일 후 허투알라(흥경, 금나라 도읍지)로 개선하였다. 이때에 무순 성과 성주변에서 잡아들인 한인(명국인) 포로의 수는 약 4 만 명으로 추정해본다. (사서 마다 포로의 수가 수십만 명이라는 등 상이하나 여진족의 침공이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어서, 그동안 피난간 사람들도 다수였을 것이므로 십만 명이 넘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진군은 물목을 약탈하는 것과 포로를 잡는 것 두 가지를 목표로 전쟁을 하였다. 그래서 무순성 내의 한인들과 무순성 주변의 촌락으로 피난간 한인들까지 모두 수색하여 포로로 잡아들인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광녕총병 장승음(張承?)의 기병과 총포부대 1만 명 구원병이 출발하여, 귀환하는 누르하치의 군병 뒤를 쫓았으며, 4 월 21 일에 둘 간에 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누르하치는 교전하지말고 피하자고 말하였으나, 다이샨과 홍타이지 두 패륵은 이대로 물러나면 두려워서 피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승음 군은 산위에 도랑을 파고 총포를 배열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금군 병은 그들을 향해 말을 몰아서 돌격하였으며, 피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명군을 섬멸하였다. 총병 장슴음도 전사하였고, 명군 1만 명 중 살아돌아간 수는 300 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금군은 말 9000 필, 갑옷 7000 벌, 조총과 총탄, 포 등 많은 군수물자를 획득하였다. 이 전투가 금 8기군이 요동의 명군 정예병과 마주친 최초의 전투가 된다. 금군에게는 이 전투를 통해 명군도 별 것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4 월 26 일 허투알라에 개선한 누르하치는 무순성 공략전투에서 군률을 어긴 군병들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시행하였다. 군영을 허락없이 이탈하여 민가에서 닭을 약탈하여 잡아먹은 병사의 사지를 절단하였고, 공성전에서 사다리를 제때 오르지 않은 병사의 코와 귀를 베어내고 노비를 만들었다. 또 군법을 어긴 니루어전 급 이상에 대해서도 처벌을 실시하였다. 그 다음 무순성에서 잡은 포로들을 각 8기에 공평하게 분배하였다.


이 때에 마침 심양에 살고있던 범문정과 그 형은 아버지 대신 무순성으로 친지의 문상(問喪)을 와있었는데, 무순성을 포위한 여진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천운이 범문정을 누르하치에게 인도해주는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었다. 범문정은 다른 한인들과 같이 포로가 되며, 범문정 형제는 여진군 8기 중 상홍기에 소속된 노예군이 되어 나중 군공을 세우면 노예를 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범문정 나이는 21세였다. 포로 중에서 범문정 만큼 중원 문화지식을 갖춘 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범문정은 처음으로 진원성이 소개한 바 있는 의형 홍타이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홍타이지는 범문정과 굳건한 인연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홍타이지의 소개로 대금국 칸 누르하치를 대면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한인 포로들을 죽이지 말고, 인간다운 대우를 해줄 것을 권고한다. 여진군병들은 한인들이 조금만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즉참을 하는 강포한 짓을 수시로 벌이고 있었다. 범문정은 홍타이지의 통역으로 누르하치에게 말한다.


'대칸이시여, 이렇게 해서 무엇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천하는 인심입니다. 인심을 얻으면 흥성하고 인심을 잃으면 패망합니다. 이렇게 함부로 백성을 죽이고서야 어찌 인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르하치는 그말을 받아들여 포로들의 대우를 개선하도록 명한다. 1000 호에 달하는 한족 포로들을 가족들과 헤어지지 않게 하고, 한 호당 소 1 마리, 암돼지 2 마리, 개 4 마리, 거위와 오리 각 5 마리, 닭 10 마리, 외에 그릇, 가구 등을 나누어 주었다. 또 항복한 유격장군 이영방(= 무순성 성주)는 손녀 사위로 삼고, 그대로 무순 성주를 하게 하며, 휘하의 한족 관리들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범문정은 이제부터 홍타이지의 막료로써 일정한 역할을 시작하며, 이후 청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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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조정에서는 누르하치의 대금이 무순 성을 침탈하여 성을 허물고 성주 및 성민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알고 대대적인 대금 소탕 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또한 대금의 무순성 침탈에 대한 소식은 윤 4월 27일에 조선 조정에 전달되는 바, 요동총병 왕가수(王可受)가 보낸  자문(咨文)의 내용은 첫째, 대금 누르하치의 도발은 절대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조선에서 양성해서 보유하고 있는 총병(銃兵) 칠천 명을 누르하치를 징계하는 연합전쟁에 적시에 명 조정의 요청에 따라 전쟁터에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광해의 조선 조정은 동년 5 월 1 일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파병을 거부하고, 의주의 국경 근처에 군사를 내보내 경계를 강화하라 전교하였다. 또 봉황성(鳳凰城 의주에서 서북으로 약 60 킬로미터 위치한 조선국 산성임)까지 군병을 진출 시켜서 정세를 감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북인들 즉 이이첨, 유희분 등 조정 모든 신료가 파병을 해야 한다고 광해를 압박한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던 것이다.


[재조지은(再造之恩) = 다시 만들어준 은혜라는 뜻이며,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주어 왜국을 물리친 것을 말한다. 조선국은 명나라의 지시를 받아 이성계가 중원에서 후퇴하는 고려국 유민을 뒤쫓아 한반도에 들어와 고려국을 멸망시키고, 왕씨(고려국 왕성 王姓)를 모두 잡아죽인 후, 명나라의 허락을 받고 세운 나라이며, 조선이란 이름 역시 명나라에서 지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두번 재(再) 글자는 이성계 때에 조선국을 한번 만들어준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다시 한번 나라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시 명나라에 답서를 보낼 사신단을 꾸려서 종래에는 육로를 이용하여 명나라에 갔었지만 금번에는 해로를 이용하여 명나라에 가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대금이 조선의 대명 사신단을 어찌 대할려는지 알수 없기 때문이었다. 압록강 건너 일종의 무주공간 즉 중간 중립지대인 곳에는 명나라의 군병은 물론 대금의 군병들이 임의로 출현하기도 하는 지대였으므로. 게다가 사신이 가져갈 문서의 내용은 명과 조선이 연합하여 대금을 공격하는 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중립지역을 지나기에 불편하였던 것이다.


조선 사신단은 의주 부근에서 배를 타고 요동 반도 끝머리로 직행하여 그곳에서 육로로 북경에 향해갈 계획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하늘의 뜻인지 몰라도 풍랑을 만나 배는 좌초하여 때마침 대양진(대금과 흑응회가 무역을 하였던 곳, 대양하 하구)에 남아서 대양진을 지키고 주변 정세를 엄호관찰하던 대금의 병사들에게 구원받아 나포되었다. 홍타이시는 자기 휘하의 한 개의 니루( = 300 명) 병사를 내어 대양진을 엄호하여 주변 동태를 감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운 좋게 조선 사신단 45 명 전원을 나포한 것이다. 조선 사신단은 붙잡혀서 누르하치 앞으로 끌려갔으며, 갖고있던 서신(명국에 보내는 국서)을 미쳐 폐기하지 못하여, 금나라 병사에게 빼앗긴다. 


누르하치는 그 서신을 읽고서 크게 분노하였으며, 사신단 전원을 사형시켰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배신하였으므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둘째, 조선은 모든 역량을 다해서 대금 누르하치의 뒤를 위협함으로써 명조정의 뜻에 부응할 것이다. 셋째, 다만 조선의 군사력은 아주 미비함으로 명나라의 앞으로 있을 전쟁에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조선군에게 기대를 하지않는 것이 대금을 무찌르는 일에 흠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광해는 명나라의 요청을 좋은 말만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마음은 원(願)이로되 조선국에는 힘 없음이 아쉽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누르하치가 사신단을 모두 죽인 것은 조선국왕이 누르하치 자신을 은혜를 모르는 몰염치배라는 험한 욕설로 나무란 것에 화가 치민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신단 45 명이 모두 잡혀 죽임을 당한 일은 6 월 초에야 조선 조정에 알려진다. 하지만 6 월 20 일 명나라에선 왜 아무런 답이 없느냐고 질책의 자문이 다시 들어오고, 광해왕은 하는 수 없이 칠천 명의 총병 부대를 보내겠다고 답서를 작성하여 보낸다. 이로써 광해왕이 몰래 양성한 군사력 칠천 총병은 노출되었고 이제는 꼼작없이 명나라와의 연합 전선에 출병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허균에게는 이것이 광해왕에 대한 기대를 아주 버리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허균은 본격적으로 활빈당을 동원하여 밤마다 한양 인근에서 소요를 일으키도록 조정한다. 이것은 광해군이 활빈당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을 얻어 양성된 군병을 동원하도록 하고, 그 병력으로 온갖 때묻은 관속들을 일거에 타진해버리자는 것이었다. 여름이 다 갈 무렵 광해왕은 허균의 짓을 더이상 눈감아줄 수 없게 되며, 마침내 허균이 벽서사건(壁書事件 당년 8 월 10 일 남대문에 '폭군 광해군을 치려고 하남대장군 정도령이 온다'는 내용의 벽서를 붙인 사건, 허균은 이 벽보로 광해왕이 군병을 불러들여, 신권으로 뭉쳐서 왕권을 욕뵈는 관속들을 모두 쓸어버리기를 광해왕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였던 것이다)에 도달한다. 


조선국의 신료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광해왕에게 적극 대명(大明)에 군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일이 그렇게 결정되자 모두 한시름 놓는다. 왕에게 군사력이 없으면 신료들은 걱정거리가 없게되는 것이다. 왕이 엄청나게 화를 내도, 고개를 조아리며 그 자리만 비켜서면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며, 정 견디지못할 양이면 벼슬을 고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왕에게 군병이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