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강책(제7부)

제 069 회 관송(觀松)과 교산(蛟山)

금박(金舶) 2017. 11. 1. 14:35


만력 45 년 (서기 1617 년, 정사년(丁巳年, 광해군 光海君 9 년) 5 월 12 일 저녁, 조선국 한양성 내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이첨(李爾瞻 호는 관송 觀松, 1560 년 생) 대감 댁 사랑방에는 귀한 손님이 들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허균(許筠 호는 교산 蛟山, 1569 년 생)이었다. 이이첨과 허균은 1589 년 생원시에 함께 함격하였으며, 이로써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나, 그 때만 하여도 서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29 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도 많이 변하였고, 두 사람 모두 많이 변하였으며, 이제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북파(大北派)에서 정치생명을 함께 하는 두 개의 기둥이 되었다. 나이는 이이첨이 9 살이 많았으나, 서로 친구처럼 생각하는 사이였다.


우선 허균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면, 명문가의 출신으로 고생을 모르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천재형이라 할 수 있었으며, 어려서 부터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떨쳤다한다. 또한 그의 형제들 모두 인재였으며 그의 친누이 난설헌(蘭雪軒)은 천재적 시재가 명나라에도 알려진다. 허균은 천재로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었으며, 그에 따라 금기(禁忌)가 없는 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유교사회에서 도교와 불교를 가까이 하였던 점이나, 신분제 사회에서 서얼(庶孼 - 첩의 자식)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이나, 기생들과의 잡음이 일어난 것 하며, 자유분방한 풍류객의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후 벼슬길 역시 순탄하지 못하였으며, 다행히 외교관으로 나서서 명나라의 북경과 요동을 평생 열 차례 정도 왕래하였다.


이이첨은 명문가의 출신이나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시절의 史禍)에서 희생당한 이극돈의 5 대손으로 형편이 무척 어려웠으며, 노력형 인재로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가난 때문에 무척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이첨의 글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로써, 이이첨이 하루는 글을 읽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책을 덮고 부인이 뭘하나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는데 부엌에서 부인이 무엇을 먹다가 뒤로 감추는 것을 보았다. 거부하는 부인의 손을 잡아 펴보니, 벽지를 뜯어서 물에 불려서 종이에 붙은 풀죽을 긁어먹고 있었다 한다. 이이첨은 부인의 손을 잡고 슬프게 울었으며, 기어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난을 벗어야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한다. 이이첨은 나중에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의 제자가 되고, 1609 년 대북파의 영수 이산해(李山海)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대북파의 영수가 된다.


허균과 이이첨이 가까워진 것은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 때문이었다. 계축옥사란 칠서(七庶)라 불리웠던 당시의 유력자들의 서자 일곱 명이 작당을 하여, 강도질을 하다가 포도청에 잡힌 것으로 시작되었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하였는데, 그들은 적서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적질 등 악행을 일삼던 중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죄인은 심문을 받다가 당년 4 월 25 일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엄청난 자백을 하게되며, 이로써 소성대비(昭聖大妃 = 인목왕후 仁穆王后 영창대군의 친모)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소성대비도 역모에 가담했으며,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 = 선조의 정비)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흠(申欽),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였고, 광해왕 등극 후 5 년이 지난 이때에서야 대북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 말하는 이 옥사에서, 죄인 중 누구의 입에서 허균의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허균은 취조를 받지않고 무난히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허균은 평소 거칠바 없는 성격으로 서얼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터라 이들과도 몇 차례 왕래가 있음이 사실이었다. 이 즈음의 허균은 지난해 말 명국에 주청사로 갔다가 금년 봄에 돌아왔으므로 그 동안은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확실한 증거가 되었으나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이이첨이 허균의 무애(無涯)한 성격을 알기에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게 해줄 수 있었다. 이때의 대북파는 따르는 사람 수가 부족하여, 이리저리 동지를 규합해가던 참이었고, 허균 역시 역적으로 몰릴 판에 누구의 도움이 절실했던 참이었으므로 서로의 필요가 부합하였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허균이 죄인의 입에서 함께 회동한 고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조를 벗은 것은 이 옥사가 조작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옥사가 아니라면, 허균은 취조를 벗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때의 취조라 함은 형틀에 묶인 상태로 사관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고, 사관의 손가락 끝에 명운이 걸려있는 형편이었다. 이 일은 이이첨이 조작으로 허균에게 죽음의 굴레를 씌웠다가 죽어가는 허균의 목숨을 한번 구해준 것과 같았다.


허균은 이 계축옥사가 있기 한 해 전(서기 1612 년)에 한글소설인 '홍길동 전'을 몰래 써서 유포를 시켰으며, 이 소설은 수 십년 전 유명했던 도둑 홍길동의 이름과 임꺽정의 무예와 정여립(鄭汝立)의 포부를 합해서 소설의 틀로 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직 누구에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혼자 맘 속에서는 신분 차별이 없는 만민평등사회 같은 이상향을 생각하고 있음이 소설 '홍길동 전'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날은 무슨 일로 허균이 찾아왔는지 하고 이이첨도 궁금해하였다. 이미 서로 수인사를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술 두어 잔과 함께 오갔나 보았다.


"무관(無官)인 제가 시간 여유가 있는지라 저 남쪽에, 지난 달 세상을 떠나신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빈소를 찾아뵙고 돌아왔습니다. (4 월 27 일 곽재우 졸) 참 쓸쓸하였습니다. 아들 둘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으며 동네 분들 이십 여 명이 계셨지만, 나라에선 물품 몇 가지 보내준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럽니다."


"지난 4 월 27 일에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몇 차례나 관직을 내리셨지만 끝내 거절하시고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일당이 아니라고 다들 부담을 거둔 모양입니다. 참 사람들이란 자기에게 보탬이 안된다 싶으면..."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이 그렇게 쓸쓸하게 끝을 보이시니, 참 어서 빨리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야 할텐데 하는 마음을 갖었습니다. 관송 대감께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명나라에 왔다갔다 하면서 사실 국내 일이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를 못하였어요. 뭐 성격 탓도 있었고요. 하지만..."


"교산, 그렇지 않아도 내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소. 교산은 어째서 그리 성급하시오? 좀 자중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관송 대감의 말씀에 변명도 좀 하고요, 한 가지 상의를 드리려 합니다. 사실 이제 저도 전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 저에게 상의도 주시지 않고서 대뜸 그런 일을 처리하다니요? 전하께서 부르셔서 갔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2 월에 소성대비(昭聖大妃)와 연결된 흉격문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 하는데, 민인길이란 자가 올린 상소에 그 격문을 이재영이 지었다고 적어져 있으니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재영이 바로 교산의 사람이지 않소?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격문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누가 썼느냐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누가 나서서 나와 내 아들과 내 아비의 원수를 갚아주면 나라의 영원한 충신으로 남을 것이다. 뜻있는 자여 나서거라.'는 이 말을 소성대비에게 물어보면 격문의 내용이 자기 맘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왕성 내에서 쓸어버릴 사람들을 모두 쓸어버려야만 전하의 웅지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의 춘추가 마흔넷이 되셨는데, 자꾸 세월만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일을 터트렸지요."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일이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잘못하셨습니다."


"이미 밝혀진 것만 봐서도 인목왕후와 그 졸개들 모두 도륙을 해야만 의(義)가 서게 됩니다. 제가 명나라에 오가느라 잘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정말 너무 악독하였습니다. 인목 아니 소성대비를 과연 왕실의 어른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저주를 한다고 무당을 불러들여서, 전하의 화상을 그리게 하여 바늘로 눈을 찌르고, 아궁이 밑에 묻었으며, 금산사(金山寺) 연못에 살아있는 말을 저주의 제물로 빠뜨려 죽이거나, 심지어 공빈 김씨, 전하의 친모의 묘를 파헤치고, 저주문을 쓴 붉은 비단을 죽은 고양이와 함께 파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민인길의 상소를 보시고 그냥 없던 것으로 하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교산이 인목왕후를 폐모시키려고 꾸민 일인데 이래선 안된다'며, 이번만 그냥 넘어가자고 그러셨어요. 조선국은 유교국이에요. 충효에서 벗어나면 역사의 죄인이 됩니다. 교산. 전하의 충정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관송 대감, 대감이 저를 보시기에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재승박덕하다는 말을 듣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지금의 전하가 계실 때에 이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전하도 이제 마흔넷이십니다. 저도 이제 오십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난 임진년 왜란 때에 피난 길에서 당한 일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피난 길에 저의 처가 아들을 낳게 되었지만 산후 수습을 할 도리가 없어 죽게 되었고, 아들도 젖을 먹지 못해서 굶어죽고 말았지요. 그때 아이의 울음소리에 저의 애간장은 다 녹아버렸습니다. 전란에서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마는,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 백성들의 고달픔은 살피지 않고서, 전쟁에 지지않고서 왜적(倭敵)을 물리쳤으니 이긴 전쟁이라며 그저 서로 자기의 공이 더 크다 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무척하였지요. 이것이 모두 무능한 왕과 탐욕에 가득찬 신료들이 만들어낸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말조심해야 합니다. 전란 중과 그 후에 조금만 신료들이 잘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지요."


"정유재란이 끝나고 전하가 등극하시기 전까지 10 년 간, 나라에서 전란 후 복구된 것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니, 새로 소성대비 들어와서 영창군 하나 만들어낸 것 밖에 없어요. 그야말로 전란에서 타버린 궁궐 대문 한짝 다시 세운 것 없으니 이게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 나라라는 것을 이제 저도 늦게야 철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축옥사 때에 대감께서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죽었을텐데, 그 이후로 명나라를 세 번 갔다 오느라고 세월이 지나고 이제 오십이 가까우니 제가 참 헛된 노릇을 많이 했다 생각되었습니다. 아마 그동안 관송 대감께서는 저를 철없는 사람으로 보셨을 겁니다. 이제 늦게라도 저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대북파가 이제야 정권을 잡았는데 지금부터 입니다. 하나하나 서두르지 말고 열심히 해보십시다. 우리가 상대하는 놈들은, 정말 그 놈들은 쥐새끼같은 놈들입니다. 임진란 때에 제가 겪은 일도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때 6품 사무(事務)를 하고 있었지요. 평상시라면 미관말직이 어전회의에 어찌 낄수나 있었겠습니까만, 전란 중이라 저도 한자리 차지하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영의정이 유성룡(柳成龍) 대감이었습니다. 그 회의의 안건은 바로 명국과 왜국이 서로 정전(停戰) 화의(和議)를 하기로 했는데 그 화의 조건을 우리 조선이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자리였어요. 왜국에서는 한수(漢水 = 한강) 이남을 왜국에서 차지하고, 한수 이북을 조선이 차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명국은 조선에게 한수이남을 왜국에 할양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어요. 그 때에 유성룡 대감 이하 신료들이 반대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선조께서는 신료들을 둘러보며, '경들은 무슨 의견을 말해보라' 하시며 자꾸 대답을 채근하셨으나, 열 몇 명의 대소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저런 나쁜 놈들이라니..."


"당시에 남해 바다에선 이순신이 지키고, 경상우도에서는 정인홍 의병대장과 곽재우 의병대장이 버티고 있었던 판이며, 그렇게 해서 남쪽의 곡창지대가 보전이 되어 나라를 지탱하는 형편인데, 한수 이남을 왜넘들에게 주고나면 조선국이 남을 수 있겠나를 생각해보세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도 정승들도 아무 말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미관인 제가 나서서 죽을 각오로 한 소리 질렀어요. 여기 계신 분들은 지금 적병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번 짐작이나 해보셨습니까? 나라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라를 절반 때어내주자는 말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나요? 도대체 대감들은 누굽니까? 어느 나라 신하인게요?"


"아,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왜놈들이 물러가고 이렇게 수습이 된 것은 다행이지만, 전란이 끝나고서도 10 년이 지나도록 불타버린 대궐 문 한짝도 세우지 못하고 당파싸움만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래도 전하를 모신 뒤로 정인홍(鄭仁弘) 대감을 따르는 대북파가 들어서서 궁궐도 복구하고 백성들도 뮈무를 하여 이만큼 되었는데, 아직도 멀었지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이이첨은 이 말을 하면서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잠깐 하였다. 지금의 자신이 그때의 유성룡 대감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과연 자기가 미관이었던 그때 말했던 것처럼 호통을 치며 나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던 그 때의 유성룡대감 이하 다른 대소 신하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혹시 갖은 것을 잃을까봐 부자 몸조심이라 하지 않던가? 한수 이남을 왜국이 차지해도 왜국에 빌붙어서 자기의 땅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조선국이던 왜국이던 명국이던 무슨 상관이랴 하고, 땅 많이 갖은 대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