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강책(제7부)

제 064 회 명국이 조선국에 원병을 보낸 이유

금박(金舶) 2017. 10. 18. 11:35


"누르하치 목을 조이기 위해서, 여진과 조선이 교역하는 마시(馬市)도 닫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여진이 조선과 교역을 하고 있었군요?"


"조선과 여진은 서로 말과 면포(綿布)를 사고 팔았습니다. 물론 다른 잡다한 생활용품도 있겠지만요. 지난 임진년(서기 1592 년)에 조왜전쟁(朝倭戰爭)이 벌어지자, 조선은 농작을 못해서 먹을 것이 부족하여 면포 1 필에 미곡 두 말까지 값이 폭등하였고요, 조선이 황상께 주청하여 곧 다음 해부터 중강진(中江鎭)에 마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진에서는 면포 1 필에 미곡이 스무 말이었으니 열 배의 차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서로 교역하여 여진이나 조선이나 서로 만족하였던 거죠. 그 때부터 계속되었던 중강시(中江市)를 이제 그만 닫으라고 지시한 것이에요."


[서기 1617 년 4 월 조선 조정에 명국 요동도사에서 보낸 협조 공문이 도착하여 중강시를 폐쇄하게 된다. 이것 역시 누르하치를 압박하는 수단이었다. 명나라는 마시에서 말을 구입할 때에 같은 등급의 말이라도 여진인들보다 조선인들에게 두 배로 비싸게 말을 구입해주었다. 조선인들은 여진인에게 말을 사서 바로 명국에 팔게됨으로써 앉은 자리에서 곱배기 장사를 하여 재미를 보았다. 이것이 명국의 이이제이 수법이었다.]


"여진 땅에 미곡 생산이 많은가요? 미곡값이 터무니 없이 싸네요."


"아? 여진의 미곡은 쌀이 아니고 좁쌀입니다. 중원의 쌀보다 낱알이 절반도 안됩니다. 값도 절반도 되지않고요. 대신 면포는 여진놈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꼭 필요로 하는 물목입니다. 면포는 추운 여진 땅에선 되지 않는 농작입니다. 여진 놈들이 웬만한 추위는 홑옷차림으로 견디는 부족이라 하는데, 너무 추운 겨울에는 옷이 없는 놈들은 동물의 기름을 진흙에 뭉게서 온 몸에 바르고서 추위를 견뎌낸다고 하지요."


"아휴, 그러면 온 몸에서 몹쓸 냄새가 날텐데 어찌 그렇게 할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진 놈들은 야만족이라지 않습니까?"


"조선에선 무슨 소식이 없나요?"


"조선은 태평한 모양이에요. 해마다 대궐을 짓는다고 하네요. 지붕에 청(靑)기와를 얹는다고 하여, 청기와를 구울 때에 쓰는 염초를 해마다 다량으로 무역해 들여간다고 하네요."


"염초란 화약 만들 때에 쓰는 건데, 청기와 만들 때에도 쓰는군요."


"동창에서 접하는 소식에는 없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내각에는 몇 해 째 계류 중인 조선국 상주(上奏) 하나가 있습니다. 조선국왕의 생모가 전 왕의 첩실이었어요. 그런데 조선국왕이 두 살 때인가 산후병(産後病)으로 죽어서 제대로 책봉을 해줄 수가 없었는데, 이제라도 그 일을 마감하여 달라는 것이에요. 해마다 주청사(奏請使)를 보내왔었는데 금년에는 예부에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자는 말이 나와서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참 할일없는 놈들입니다. 사후에 왕비로 추숭(追崇)되었으면 그만인 것을, 이제와서 죽은 왕비가 입을 관복을 내려달라 하니, 귀신에게 관복을 입힐려는 건가 조선국에는 얼빠진 놈들만 사는가봐요."


[당년 명국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부의 제목에 근거하건대, 그대의 아비 소경왕(昭敬王) 이휘(李諱)의 둘째 아내인 김씨는 바로 왕의 생모이다. 왕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부터 독실하게 노력해 왕업을 다시 일으켰는데, 생모를 왕비로 책봉할 것을 요청하였기에 이미 규례대로 왕비의 칭호를 추후로 책봉하고 고명을 주었으니 자애와 효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조례(條例)에 비추어 관복은 자체적으로 갖추게 하였더니, 왕이 배신(陪臣)을 다시 파견하여 두 번 세 번 요청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므로 부(部)와 과(科)에 지시하여 참작 토의하게 하였으나 둘째 아내를 본처와 동등하게 보기가 어려우므로 윤허하여 따르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그대의 어미는 번왕(藩王)을 낳아 길러서 조선의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어미가 아들로 인하여 귀하게 되는 것은 인정과 사리로 보아 당연한 일이며 이미 큰 경사를 받았으니 응당 법도에 맞는 옷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에 특별히 격식을 깨뜨리고 은혜를 베풀어 관복과 선물을 비롯한 물건을 줄 것을 승락하고, 파견되어 온 배신인 김존경(金存敬) 등에게 싸서 가지고 돌아가게 하니, 물건이 도착하거든 수령하도록 하라. 그래서 칙서를 받는 영광을 새롭게 내리고 어미를 사모하는 마음을 길이 위로한다. 왕은 마음을 결백하게 하여 작은 나라를 견고하게 지킴으로써 효행과 충성을 표창하는 나의 지극한 뜻에 보답하도록 하라. 공경할지어다. 그러므로 유시한다.']


"조선에선 명나라가 왜국의 칼날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었으니 더욱 더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일테지요."


"관복을 받아가겠다고 하니 관복 값을 은자 일천 량으로 메겨서 뒤로 받아냈다고 합니다. 참 그놈들,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서 쓰라고 해도 말을 안들어요. 꼭 황제의 명에 따라 지어진 관복이어야 된다는 거에요. 직접 만들면 은자 열 량이면 충분할 것을, 뭐하러 수천 리 길을 해마다 찾아와서 그러는지?"


"그럴 돈이 있으면, 임진년에 파병(派兵)에 들어간 은자부터 갚으려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이십만 명이 조선에 갔고, 들어간 은자가 이백만 량은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우리 명국이 조선국을 도와준 것이 잘한 일인가요? 차라리 모른척 하는게 나았지 않을까요? 이백만 량을 아낄수 있는데요?"


"위 태감께선 지난 백 년간의 사초(史草)를 찾아 읽고 공부를 좀 하셔야겠소이다. 우리가 조선국을 도와 파병한 것에는 피치못할 이유가 있었어요."


"예, 오늘도 귀를 씼고서 배우겠으니 말씀을 해주시지요."


"그럼 들어보세요... 중원을 중심하여 일어나는 모든 전쟁은 결국 중원을 찾아와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전쟁입니다. 중원은 대륙에서 가장 물목이 풍성하여, 북이나 서나, 남이나 동이나 어느 곳보다 산물이 풍부하고, 인종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풍요로운 땅을 뺏으려고 역사에서 보면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수많은 제국은 모두가 지키는 전쟁만 했지 공격하는 전쟁을 먼저 하지는 않았지요. 이 방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국은 대륙에서 떨어져 바다에 있는데, 그 섬들은 땅이 넓고 인종이 많아서 국력이 조선국의 두 배가 됩니다. 왜국이 힘이 생겨서 어느 곳을 침공이라도 할려면 어디를 침공하겠습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조선국 밖에 없는 거죠. 자 이 지도를 보세요."


내각수보(內閣首輔) 방종철은 붓에 먹물을 묻혀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왜국 주변 지도]


"주변에 조선국 밖에 없으니 달리 선택할 여지도 없군요?"


"그렇지요. 왜국은 침공할 데라곤 조선국 뿐이죠. 아마 수백 년간 언제 조선에 침공해 들어갈까 눈치만 봐 왔겠지요. 그런데요, 공방(攻防)은 삼 대 일이라 하니 왜국의 인종이나 물산이 조선의 두 배 라해도 조선이 야물면 왜국이 조선을 침공해도 패퇴하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조선이 너무 물러서 왜국을 감당하지 못하니 명국이 나서야만 했던 거지요. 왜국이 조선을 먹고나면 그 다음은 요동일테고 그 다음 차례는 자연 중원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상께서는 조선에 원병(援兵)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 오늘에야 확실히 알았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잘 배웠다니 그러면 위 태감에게 하나 묻겠어요? 조선국이 만일에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조선국은 명나라를 침공할 리가 없지요. 우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공격하면 필패일 것이니. 게다가 조선은 우리가 원병을 보내 도와준 것을 감격해하고 있으니 더더욱 배반할 리가 없지요."


"위 태감의 말이 맞습니다만, 만일에 말이에요. 만일 조선이 명국을 침공하려면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교(下敎)하여 주시지요."


"조선이 중원을 넘보려면, 우선 먼저 왜국을 침공하던가 친교를 맺어서 뒤가 걱정이 없어야 할 것이에요.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는 중원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유념해주세요."


"앞으로 나가려면 뒤가 걱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정도는 나도 답할 수 있었는데요. 듣고보니 너무 쉽네요."


"그러면 하나 더 묻지요. 만일 여진의 누르하치가 명국을 침공하려면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에요. 대답해 보시지요."


"그야 조선국을 먼저 침공하거나 친교를 두텁게 하여 뒤가 걱정없도록 하겠지요."


"침공을 할까요? 친교를 할까요?"


"그것은... 모르지요. 누르하치가 자기 맘대로 하지 않겠나요?"


"여진족은 아마 인종이 백만 명에서 백오십만 명이 될 거에요. 조선은 오백만 명에서 육백만 명이 될 거에요. 이제 다시 한번 답해보세요?"


"힘이 약한 여진족으로써는 친교를 해야만 하겠군요."


"틀렸어요. 친교나 침공이나 모두 힘이 있는 쪽이 힘이 없는 쪽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즉 힘이 있는 쪽에서 결정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힘이 부족한 쪽에서 할수 있는 것은 굴복하는 것이 아니면 침공 뿐이에요. 그러므로 여진족이 명국을 침공할 때가 왔는지 아닌지는 여진족이 조선을 침공했느냐 안했느냐 이걸 보면 알수 있지요."


"야, 듣고보니 훤해집니다. 그렇다면 아까 중원을 침공하려면 조선국도 왜국을 침공해야만 되겠네요."


"그렇지요. 누르하치가 중원을 도모할 마음을 먹으면 먼저 뒤를 잘 닦아놓은 후에야 덤비겠지요. 바짝 급공(急攻)으로 쳐들어가 조선국의 혼을 내준 다음에 방향을 반대로 하여 서쪽으로 몰려들겠지요. 이 점을 기억해둬야 합니다. 조선 땅은 산이 많고 전토가 좁아 소출물목이 적어 누르하치도 그 땅을 욕심내지는 않을 겁니다. 할수만 있다면 하고 중원대륙을 욕심내겠지요. 그러나 일억 인종이 있는 중원을 감히 넘볼 수는 없을 것이에요."

  

이들 4 명은 정국(政局)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 가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협조해야 할 점을 검토해가고 있었다. 사석(私席)에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오고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국을 다루는 데에서 꼭 알아야만 할 내용들이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지식을 들을수 있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지식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도 세우는 등 교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 병필태감이 된 위조는 집에 돌아가면 이렇게 주워들은 지식을 다시 한번 되뇌이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대금이 허투알라에서 대양하구까지 관도를 뚫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일은 동창제독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홍타이지(皇太極) 패륵이 중원인 부락을 건들지 않고 협조를 얻었기에 중원인들의 자발적 협력을 받았기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길은 조선국에서 명국으로 보내는 외교 사절단(使節團)이 일년에 서 너 차례 통하는 길목이었으며, 이 사절단은 약 1 년 후인 누르하치 군이 무순 성을 함락시키기 전(서기 1618 년 4 월 13 일)까지는 계속 이 육로로 가고 온다. 다음 해 무순 성 함락 소식이 전해진 후에야 조선국은 바다를 통해서 명나라에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