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강책(제7부)

제 059 회 조선국왕 광해의 화총부대(火銃部隊)

금박(金舶) 2017. 10. 12. 11:51


광해 9 년(정사년 丁巳年 서기 1617 년, 만력 45 년임) 2 월 5 일, 오후 신시 경에 조선국왕(朝鮮國王) 광해(光海)는 정청에 앉아서, 서안(書案)에 펼쳐진 상소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지난 1 일에 사용(司勇 조선시대 정9품 군직 軍職) 민인길(閔仁佶)이 상주한 것이었다. 서안 아래에는 적어도 30 통은 되어보이는 상주문 뭉치가 쌓여 있었는데, 이것들은 민인길의 상주문에 이름이 오른 7 명의 상주문과 그들이 올린 상주문에 다시 이름이 오른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명하는 상주문 들이었다. 서안에 펼쳐진 민인길의 상소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이 오늘 아침에 별장(別將)의 직소(直所)에 있었는데, 학관(學官 승문원의 벼슬) 이원형(李元亨)이 와서 신을 보고는, 말하기를 - 이번의 흉격(凶檄 흉칙한 내용의 격문)을 이재영(李再榮)이 지은 일을, 교산(蛟山)이 영공(令公)에게 말하였는데, 영공이 명가(名家)에 전하였다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였다. 영공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 그 말을 비록 듣지 못하였으나, 이미 그런 말이 있다. 너는 어느 곳에서 그 말을 들었는가? -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원형이 말이 나온 곳을 말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 나에게 말해 준 사람에게 다시 물어서 말해 주겠다. - 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는 심신이 놀라서 안정할 수가 없어서 곧바로 이원형의 집으로 뒤쫓아가서 누가 말하였는지를 묻자, 또 명확히 말하지 않으면서 - 오늘 저녁에 그 곳에 가서 상세히 들어보고서 다시 통보해 주겠다. - 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는 이어 생각하기를, 흉격을 지은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일각도 입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광해(光海)는 상소문은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상소문의 내용이 좀 복잡하여 천천히 따져보아야 할 글이었다. 상주문 중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7 명인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상소자(민인길), 상소자에게 말을 전한 자(이원형), 전한 말중에 나오는 제 1 자로 흉격을 지은 자(이재영 봉상시의 주부), 제 1 자가 흉격을 지은 것을 알고 있던 제 2 자(교산 허균의 호),  제1 자가 흉격을 지은 사실을 제 2 자로부터 들은 제 3 자(영공), 제 3 자에게서 흉격에 대한 것을 들은 제 4 자(명가), 제 3 자가 제 4 자에게 흉격에 대한 것을 전했음을 이원형에게 말해준 제 5 자(어떤 사람) 들이다. 광해왕은 상주의 내용이 복잡하므로 더 이상 따져보기가 싫었다. 이미 흉격의 자초지종을 짐작하고 있기에 상소를 올린 사람 모두에게 '상주하는 내용은 이미 알았다'라고 비답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조정 내의 대소 신료들에게 이것으로 더 이상 입을 다물라고 명을 내렸다. 이것은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바라던 바였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 무렵 광해왕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조정은 이 때에 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북파는 다시 세 갈래 대북(大北), 중북(中北), 소북(小北)으로 나뉘어 충성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 세 정파는 적당한 때가 되면 자기파가 먼저 폐모론(廢母論 = 소성대비 = 인목대비 를 폐하자는 주장)을 꺼내서 광해왕에게 점수를 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폐모론은 지난 해에 한번 말이 나왔다가 광해왕의 적극 통제에 따라서 말이 가라 앉았었다. 그런데 왕이 흉격에 대해서 이번에도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광해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과연 이것으로 소동이 잠잠하여질 것인가를 가름해 보았으며,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정국이 풀릴 것으로 예상되자 짐짓 다행이라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해낸 허균(許筠 교산임, 소설 홍길동의 저자, 이 때에는 예조판서 자리에 있었다)에 고맙다는 말을 따로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광해는 이번 일이 일어난 자초지종을 눈을 감고서 되새겨보았다. 비밀리에 화총부대 15000 명을 만들어 나중을 대비하자는 목표가 이제 저기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것은 광해가 어렸을적 왜란을 몸으로 겪으면서 왕이 되면 기어이 이루려 했던 꿈이었다. (광해는 세자로 책봉된 후 직접 전장을 다니면서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걷었다.) 그러므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광해왕은 지난 7 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위해서 참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추진했으며, 어떤 부작용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견뎌야할 나쁜 일 중의 하나라 생각하였다. 이 목표만 이룬다면 더 이상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생각하니 광해는 조금만 더 참자고 자위(自慰)하였다.


                                         [그림 1600 년대 무렵의 화총]

 

광해는 비밀 화총부대 양병용(養兵用) 군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였을까? 그것은 주로 두 가지 방법이었는데, 첫째는 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건축자금을 초과하여 걷어들이는 것이었다. (광해왕은 등극 후에 왜란에서 불탄 궁궐을 재건하는 일에 적극 메달린다. 또 매 과거마다 부정을 저질렀다.) 둘째는 과거 시험을 볼 때에 은자를 많이 낸 사람을 급제시키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왜란 중에 군량미를 낸 사람에게 노비든 상민이든 따지지 않고서 관직을 제수(除授)하였던 것과 동일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광해는 왕이 된 후 과거를 치를 때마다 시관(試官)을 맡은 신료를 따로 불러 부정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문과와 무과 중 문과에만 국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과거마다 은자 몇 천 량을 모을 수 있었다. 무과에 급제할 사람은 실력에 의하여 선발하도록 오히려 단속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과거를 치루고 나면 그 후에 과거시험에 부정이 있었다는 상소문이 떼지어 궁궐로 날라들고는 했었다. 그러면 광해는 시관(= 과거시험을 책임지는 관리) 중 가장 책임을 질 신하 하나를 삭탈관직 하여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불러올리고는 했다. 그러므로 광해에게 충성을 바친 고위신료들 중에 시험부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허균도 광해 2 년 11 월 3 일 실시한 별시에서 대독관(시험감독)이었는데, 부정으로 탄핵을 받았고 유배 갔다가 바로 다시 복귀하였으며, 그후로도 빠지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광해는 이런 일들을 포함하여 밝혀지면 꺼림직한 것들을 감추고자, 작년 즉 광해 8 년(서기 1616 년) 2 월 28 일,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매일 아침 적어서 반포하던 일이나 그 기록지)에 내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난 일은 광해를 꽤 어렵게 만들었는데 그 발단은 다음과 같다. 


작년인 광해 8 년(서기 1616 년) 8 월 10 일, 영숭전(永崇殿 평양에 있는 진전 眞展=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이 때에 다시 지은 것임)을 재건하여 어진(초상화)을 봉안할 때에 알성시(謁聖試 특별한 행사에서 왕의 친전에서 치루는 친림시임) 과거를 치렀다. 시제의 출제자는 이이첨이었으며, 명관(命官) 영의정 기자헌 이하가 문과에서 기준격(奇俊格 기자헌의 아들임) 등 10명을 뽑았다. 왕이 몸소 시험보여 무과에서는 심계(沈溪) 등 24명을 뽑았다. 모두 급제와 출신을 하사하였다. 왕이 친림하여 방방(放榜 급제자에게 증서를 주는 일)하였다. 예를 마치고, 각각 청포(靑袍)와 홀(笏)과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여 유가(遊街)하게 하였다. 하지만 당시 문과에 급제한 자들의 글은 그 전날 밤에 지어간 것이 아니면 시험장 밖에서 지어서 바친 것이었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기준격(奇俊格) 및 그 조카 기수발(奇秀發)의 글은 모두 허균(許筠)과 이재영(李再榮)이 지은 것이었다. 반쯤은 공공연한 것이었고 당시에 인구에 회자되었다.


광해 8 년 8 월 17 일에 광해왕은 예조의 이이첨(李爾瞻)에게 원구단(圓球壇)을 짓고 천제(天祭) 올리는 문제를 조사하도록 하명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군사력이 튼튼해졌을 때에 어찌할까 생각한 김에 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20 일 영의정에 의하여 답을 들었다. 다음 곧바로 유림에서 수많은 상소가 들이닥쳤으며, 많은 중에 글이 절절하고 뜻이 준엄한 상소문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광해 8 년(서기 1616 년) 11 월 27 일, 과거 시험의 부정에 대한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의 상소, 이에 원이곤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


" - 전략 - 옛날에 당(唐)나라 신하 전휘(錢徽)와 양여사(楊汝士)가 지공거(知貢擧)로서, 요직을 차지한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를 사사로이 뽑았는데, 그 당시에 특명으로 복시(覆試)를 실시하자 처음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이 끝내 시험 답안을 한 줄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담(鄭覃) 등 10 명을 내치고 전휘 등을 좌천시켰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 우리 조정에서 사심을 가지고 뽑은 자가 어찌 10 명뿐이겠습니까. 복시를 실시하여 내치고 좌천시키는 법전을 오늘날 다시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광해 8 년(서기 1616 년) 12 월 21 일 예조판서 이이첨을 비난하는 진사(進士) 윤선도(尹善道 어부사시사의 작가)의 상소.


" - 전략 - 아, 이이첨의 도당이 날로 아래에서 번성하고 전하의 형세는 날로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어찌 참으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를 위하여 말을 하는 자가 없습니다. 아, 우리 나라의 3백여 개의 군(郡)에 의로운 선비가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유희분과 박승종과 같은 자들은 의리상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하는데도 오로지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할 마음으로, 임금의 위망을 먼 산 보듯이 보며 구제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항차 다른 사람들에게야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앞뒤로 올린 글을 자세히 살피시고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먼저 이이첨이 위복을 멋대로 농단한 죄를 다스리시고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소서. 그 나머지 이이첨의 복심과 도당들에 대해서는, 혹 당여(도당 무리 전체)를 모조리 제거하는 율법을 시용하기도 하고 혹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을 용서하는 율법을 사용하기도 하소서. 그러면 종묘 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중략 -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흰색과 검은 색도 분변 못하는 자는 아니니, 어찌 이런 말을 하면 앙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홍무적(洪茂績) 등은 이이첨의 죄상을 조금도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바다 밖으로 귀양을 갔고, 원이곤(元以坤)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조금 진달하였다가 화를 당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신이 말한 것은 모두 선배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온 나라에서 한 사람도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니, 신이 당할 앙화의 경중은 앉아서 알수가 있습니다. - 후략 -"


광해는 윤선도를 외딴 섬에 안치(安置)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회전문 인사로 예판 이이첨을 물리치고 허균을 예판으로 돌려 앉혔다. 유림이란 왕의 정사에 대해 유교 경전에 비추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서 비판을 가하는 향신(鄕紳) 세력이었다. 광해는 '이러면 니네들이 어떻게 할테냐' 하고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상소가 더욱 기승하였고, 마침내 터질 것이 터졌나 보았다. 해가 바뀌어도 이후 연일 쉬지않고 각지에서 상소가 날아들었다. 특히 왕실 종친의 여러 사람들까지 상소의 대열에 참여하고, 다시 북파 일당을 옹호하는 상소가 밀려들었다. 광해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이유로 허균에게 정국을 변화시킬 어떤 사건을 지시한 것이었다. 아니 지시가 아니라 운(韻)만을 띄운 것이었다. 광해는 그래서 '허균이 궁리 끝에 흉격 사건을 일으킨 것이리라'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흉격 사건이란 다음과 같다. 광해 9 년(서기 1617 년) 1 월 20 일 분병조(分兵曹)가 격문을 전달하였다. 분병조(分兵曹)가 아뢰기를.


"해가 막 뜰 때쯤 동소(東所)에 입번(入番)한 겸사복(兼司僕) 김윤황(金胤黃)이, 어제 내약방(內藥房) 동쪽 뜰에 백지(白紙)에 쌓인 장전(長箭 긴 화살)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가지고 와서 고하였습니다. 그 장전을 살펴보니 과연 백지 한 조각을 찢어서 붙였는데, 그 안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감히 열어보지 못하고 감봉(監封)하여 계달합니다."


그 격문(檄文)은 글 내용과 자획이 아주 정교하였으며, 글 중에는 가끔 은어(隱語)를 사용하였다. 또 큰 동그라미와 작은 동그라미를 사용하여 구별지웠으며, 주상(主上)의 허물을 나열하면서는 '서자로 외람되이 왕위에 올랐으며, 아비를 죽이고 형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산(山)과 천(川)은 이미 끝났고 원해가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즉 산천사의 원해장성(山川巳矣 原海將成)'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산(山)은 금산군 이성윤(錦山君 李誠胤)을 가리키고, 천(川)은 귀천군 이수(龜川君 李 日+卒)를 가리키며, 원해(原海)라는 글자 역시 종실인 원해군(原海君)을 가리킨다. 또 '유씨를 협박하고 박씨를 몰아치고 기씨를 강제한다. (脅柳驅朴勒奇)'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것은 유희분, 박승종, 기자헌(당대에 세력을 떨치던 3 명임)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대개 이달 28일에 거병한다고 하면서, 소성대비(昭聖大妃 = 인목대비를 말함, 영창대군의 모)에게 밀부(密符 군병을 동원 할수 있는 동병명패) 내주기를 청하여 서로 호응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이 격문이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잠잠해졌다. 격문 내용에 연루된 사람을 따지면 이리저리 연결안되는 사람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왕실 종친들은 물론이고 유림에서도 한바탕 몰아칠 피바람이 두려워 몸을 낮추었다. 거병을 한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바로 반역을 하겠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금산군, 귀천군, 원해군 등 왕실 종친의 이름이 나오고, 소성대비가 밀부를 낸다니 군병을 동원하여 반역을 하자는 이거야 말로 엄청난 일인 것이다.


광해는 흉격이란 허균이 조작해 만든 일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냥 유야무야 시키려 했던 것이다. 또 신료들도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으므로 다들 조용히 묵과하게 되었으며 또한 유림도 납작 엎드려 조용히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에 광해의 비밀 화총부대 양성은 벌써 7 년 째 비밀을 지켜가며 추진되었으며, 아직은 비밀이 지켜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광해왕은 엄청난 사건인 흉격을 조작한 허균을 그대로 두기는 뭐했던가, 다시 인사 돌려막기를 하였다. 즉 예판 허균을 물러나게 하고, 바로 전 예판이었다가 물러난 이이첨을 다시 예판에 불러앉혔다. 


광해는 여기에서 더욱 기운을 내서 새로운 궁궐을 축조하라고 명을 내린다. 동년(同年) 3 월 19 일, 광해왕은 이궁(離宮 이것이 인경궁임)을 조성할 재목과 재정을 마련하라고 지시를 내리며, 다시 광해 9 년(서기 1617 년) 6 월 11 일 정원군(定遠君 능창군의 부)의 집터에 새 궁궐(이것이 당시 경희궁, 지금의 경덕궁임)을 지으라고 명을 내린다. 이 집터는 광해 7 년 능창군의 자살 후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 하여 집을 빼앗아 허물어버렸던 것이다. 북파의 신료들은 짓고있는 궁궐을 다 마치고, 새로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신을 하였으나 광해는 못들은 척하며, 양병군자금을 빼내기 위해서 곧장 궁궐 건축을 밀어부치게 되는 것이다.


[광해왕 시기에 왕과 신료들의 관계는 조선조 어느 왕 때보다 불안정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광해왕이 신료들에게 비밀 화총부대에 대해서는 끝까지 비밀을 지키려는 것에서 발생하였다고 짐작해봅니다. 광해왕은 과거에서 무관을 뽑는 일에 특별히 신경을 썼고, 이후 무관들과의 비밀한 회동을 수시로 했으며, 이것들은 문관들에게는 일체 비밀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당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정승과 대감들이 수시로 사직을 청하고 광해는 그 사직소를 반려합니다. 이것은 왕이 신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신하들은 내 말을 안들어주고 나에게 정책을 감추고 하려면 차라리 나를 파직하라 말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남인에 속한 신료들이 수시로 사직소를 올렸지만, 나중에는 북인들도 수시로 사직소를 올리게 됩니다. 왕과 신하 사이에 불신이 점점 깊어지고, 광해는 신하들의 위에 부초(浮草)가 되어 부유합니다. 허균이나 이이첨 등 광해왕에게 충성했던 신료들도 광해왕의 신뢰를 얻지못하고, 배신 아닌 불합(不合) 즉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토록 아껴서 키운 화총부대가 조선 조정에 있는 명나라 간첩 누구에 의하여 명나라에 고자질 되었습니다. 조선 역사 이래 최대의 강병인 화총부대 12000 명은 서기 1919 년 명나라의 지시에 따라 강홍립 장군을 총대장으로 하여 사르후 전쟁에 투입되며, 이후 금나라에게 패하고 군사력을 모조리 잃게 됩니다. 당시 사르후 전쟁에서 금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병력은 강홍립의 화총부대였다고 추측이 됩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청나라의 역사에서 항복한 조선 화총부대 포로 몇 천 명을 살해하였다는 기록에서 볼수 있습니다. 여진족들은 자기들에게 피해를 준 적들은 항복을 해도 당한 피해 만큼 반드시 죽여서 복수를 했습니다. 이로부터 4 년 후 광해왕은 인조반정을 맞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듭니다. 광해왕은 화총부대 15000 명을 양성해서 본래 어디에 쓰려했던 것일까요? 이것은 불가해(不可解)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