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6 회 9 명의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
만력 44 년 (병진년, 1616 년 임)에 누르하치는 의정처(議政處)를 설치하고, 9 명의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칸을 보좌하는 정치기구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의정원 9 명 중 누르하치의 핏줄은 왕(패륵)으로 4 명이었고, 대신은 대장군들 5 명이었다.
1 년 전 (서기 1615 년 임) 8 월, 대금국의 정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수선이었다. 대금황제 누르하치는 장남이며, 후계자로 책봉했던 추잉을 처형하는 결단을 내렸다. 누르하치가 자기의 가슴에 비수를 꼽는 것 같은 통증을 감수하고 내린 이 결단은 이제 여진의 나라가 한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선언하는 그런 뜻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라 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전쟁의 기술보다는 협력의 기술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가 왔다는 뜻이었다. 추잉은 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목숨을 잃어야 하였다. 전쟁기술 보다는 협력기술이 더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 시대, 여진의 덩치가 커져서 한사람의 역량만으로는 통치가 어려우니 집단의 통치가 필요해졌으며, 통치집단을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협력이 꼭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자기를 많이 닮았으며, 전쟁터에서 군사들을 휘몰아가는 것을 보면, 그리고 군병들의 사기가 최고조로 달했을 때에 적과 맞부딪히게 만들어서 적진을 박살내버리는 전쟁의 대가인 장남을 생각하면, 죽이기에는 참으로 아까웠음을 누르하치는 수차 통탄하였을 것이다. 추잉은 18 세에 처음 장수가 되어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그 때부터 아버지 누르하치의 오른팔로써 누구보다도 혁혁한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너무나 뛰어난 것이 바로 족쇄가 되어 추잉은 그 족쇄를 찬채로 36 세에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너무나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 조금 부족한 장수였다면, 아니 누르하치가 조금만 더 참고서 후계자로 책봉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추잉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서기 1612 년 후계자로 책봉이 되자, 그렇지않아도 탁월한 군공 때문에 이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추잉은 동생들과 원로중신들을 하인 다루듯이 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 거두어들이는 노획물의 분배에서 공정함을 잃었다. 그리하여 추잉의 4 동생들과 5대 중신들은 추잉을 경원시 하게 되었다. 추잉은 4 동생들과 5 대신들을 불러서 무릎을 꿇리고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 일이 있은 후에 4 동생들과 5 대신들은 추잉의 지시에 무대응의 원칙으로 대항하게 되었다. 즉 추잉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이에 추잉은 자기가 등극하면 4 동생들과 5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공언하게 되는데, 이것을 전해들은 4 동생들과 5 대신들은 추잉이 정말 그런 일을 저지를 성격임을 알기에 누르하치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조치해달라고 상주하였다.
누르하치는 이제 예허부를 제외한 모든 여진을 장악하였으므로 여진의 수장(首長)으로써 무력보다 정치력이 더욱 중요한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으며, 추잉을 이대로 두면 여진은 다시 흩어질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고 마침내 추잉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1613 년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우라부를 접수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하였으며, 추잉은 이 작전이 실패하기 바란다고 측근에게 말하는데, 이것은 그 작전이 실패하면 다시 자기를 불러서 자기에게 우라부를 접수할 전쟁을 하도록 해주기 바라는 마음이 감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추잉의 기대와 달리 승전을 하고 우라부를 접수하여 돌아오며, 추잉이 이런 말을 했음을 전해듣고 장남을 가택연금하도록 명한다. 이렇게 추잉은 후계자가 된지 1 년이 지난 1613 년에 버림을 받고 가택연금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때라도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믿을만한 현명한 부하가 있어 추잉에게 협력의 시대가 왔음을 총고해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추잉은 자기의 처지에 대한 이해, 협력의 시대가 온 것을 성찰하지 못하여 죄를 더하여 짓고 1615년에 마침내 처형되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우라부를 접수하여 군병들의 수도 늘어서, 이로써 여덟 개의 기가 다 만들어지고 병력수는 60,300 명이 되었다. 어떤 조직이든지 세력이 모이면 그 세력에 맞는 어떤 규범행위 있어야만 세력을 유지할 수가 있으며, 세력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바라는 이 규범행위를 배풀어주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후계자 처형으로 헝크러진 신료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누르하치는 우선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 줄여서 의정처 議政處라 부름)를 조직하여, 아들 4 명 즉 4 대 패륵(왕)과 5 중신들을 정치행위의 자문위원으로 삼는다. 의정처에서는 지금이 바로 여진 각 부족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묶고 힘을 뭉칠 때라고 판단했으며, 그에 맞는 규범행위로써 누르하치가 칸에 오르는 행위를 해야할 때라 여겼다. 그리하여 여진은 도읍을 퍼알라에서 허투알라로 옮기고, 이렇게 1616 년 1 월 1 일 특별한 단배식을 치루게 되었다. 또 이 일은 명(또는 나중에 청의 역사가)에 의하여 여진이 대금이라는 국호(國號)로 개국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대명에서 누르하치의 건국 소식을 듣고 내린 조치는 국경선을 획정하고, 요동으로 가는 물목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요동의 물가는 이미 2 배로 폭등하였으며, 그나마 물목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이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그런 일임이 분명하였다. 대금의 의정처에서는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여 몽골과 조선국과의 무역 규모를 더 키우는 방향으로 노력해왔었다. 그러나 몽골이나 조선을 우회하여 들어오는 물목은 량이나 가격에서 부족하였고, 결국 의정처는 창고에 비축된 물량을 조금씩 내놓으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야만 할 때였다.
1616 년 7 월 어느 날 의정처에서는 4 의정왕(議政王 황제의 아들 중에 의정을 맡는 패륵)과 5 의정대신(議政大臣), 즉 다이샨(누르하치의 2남), 아민(수르하치의 2남), 망구얼타이(5남), 홍타이지(8남), 베이잉동, 어이두, 후루한, 허허리, 안페이앙구 들이 모여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아마도 내년 이맘 때 쯤이면, 물목들이 모두 고갈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지요."
"금년도 농작의 예상은 어떻습니까?"
"평년작은 되는 것으로 보고가 올라왔지만 과연 추수까지 잘 진행될지요?"
"우리가 상비군 8 기를 갖추었으니, 이제 그들을 써서 물목을 만들어야지, 그냥 그들을 놀리는 것은, 육만 명이 놀고 먹는다니 그야말로 낭비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1615 년 누르하치는 장남 추잉을 죽인 후, 8기의 군조직을 완성하였다. 만주 8기의 군 조직은 기본이 니루(우록 牛錄)라고 하는 단위조직이었다. 1 니루은 타탄이라고 하는, 75 명의 소 조직 4 개가 모인 것이며 총 300 명이었다. 다섯 개의 니루가 모여서 1 잘란(갑라 甲喇)이 되며, 다시 5 개의 잘란이 모여 하나의 구사(고산 固山)가 된다. 이 구사를 기(旗)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부대식별 표시로써 각각 다른 깃발을 썼기 때문이었다. 1 기는 7500 명의 인원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1615 년 누르하치는 201 개의 니루로 정규군 60300 명을 갖추어 만주 8 기를 조직하였다.]
"우리 대금도 군병을 갖추고 있다하여 무조건 전쟁하는 쪽으로 쉽게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에... 흐음."
"칸 께서 의정처를 만들고 자리를 비우시는 뜻은 그야말로 우리들끼리 격의 없이 의견을 주고 받으라고 하신 것인데 왜 말을 주저하십니까? 그야말로 직위나 품계나 등급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나라를 위해 의견을 내놓는 것이 우선이지요."
"가급적 인근 나라들과 평화적으로 어울려 살아가기를 도모해야 하지요. 예, 이 길이 옳은 길입니다."
"평화가 밥을 먹여준다면 평화를 해야지요. 하지만 밥을 굶어야하면 평화를 할 수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은 평화로 할만큼 다 해보고 그래도 정 못하면 그제서야 전쟁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대금은 금년 농작의 결과 내년 먹을 것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만일 내년에 먹을 것이 못된다면 내년 가서 어찌해보려면 이미 늦어요. 적어도 금년 겨울 이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단 말이외다."
"조선국은 우리나라와는 공 무역을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고 그리 봅니다. 그러니 밀무역이 아니면 기대할 것도 없고, 몽골은 무역을 하겠다는 뜻이 있어도 우리에게 보탬이 될 물목이 좀처럼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해결방법을 무역 말고 전쟁으로 찾자는 말이 됩니다. 조선국이나 아니면 서쪽에 있는 요양, 심양 등 지역을 노략해야만..."
"잠깐, 나이가 제일 적은 제가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마시를 통해서 무역을 했는데, 그곳에서 얻은 물목은 비단, 면포, 미곡, 철물 등 그야말로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대신 우리가 명국에 내준 것은 마필, 짐승가죽, 인삼, 약재 등입니다. 우리와 무역이 끊어지면 우리도 큰 고역이지만, 명국의 장사꾼들도 애먹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때에 명국과 밀무역을 한다면, 역시 서로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아니 꼭 필요하고 누군가 물꼬 터주기를 기다릴 것이지요."
" 그러니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지금 명국으로 가는 길은 명나라 군대가 지키고 서있는데, 설마 배를 띄워서 밀무역을 하잔 말이오?"
"제 생각으로는 밀무역을 하되 배를 띄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배를 갖고 있지도 않은데 무슨 배를 띄우겠습니까? 우리는 부두(埠頭)만 만들고서 그들한테 배에 물목을 싣고 오라고 하지요. 바닷길이 위험해서, 물에 설은 우리가 바다로 들어간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많을테고, 무엇보다 우리는 실패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목을 비싸게 사준다고 말을 해서 그들에게 배에 물목을 싣고 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닷가에 선착장만 투닥투닥 만들어 놓고, 그 옆에 창고만 몇 동 지어놓으면 되지요."
"홍타이지께서 뭔가 생각을 많이 해온 것 같은데 계속 말해보시구려."
"저에게 커얼친에서 온 처가 있습니다. 그 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커얼친은 해마다 명국의 상인하고 거래를 해서 재미를 쏠쏠하게 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상인은 산동성 제남의 흑응회라는 상방입니다. 제 처의 질녀가 흑응회의 회주와 혼약을 한 상황에서 무역이 성사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대금에서도 공주를 흑응회에 시집보내서 무역거래를 트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뭐 나중에 그럴 필요가 있으면 그것도 생각해볼 문제이지만요. 지금 당장은 명국에서 길을 막고 있으니 그 둘 간의 무역도 길이 막힐 것입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벌어질까요?"
"길을 바꿔야만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