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26 회 황제가 염법10의(鹽法十議)를 재가하다
이즈음 건주여진은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움에 빠져있었다. 여진의 형편은 명국에서 인삼과 모피와 피혁, 약재 등을 가져가고, 그 대신 여진족에게 필요한 견포, 면포, 잎차, 미곡 외 도자기 등의 생필품들로 바뀌어 들어옴으로써 여진 경제가 돌아가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국경이 높아질수록 명국과의 상거래가 부족해짐에 따라 점점 경제가 위축되었으며, 여진 권력층은 어떤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누르하치를 배반하여 70 명을 살해한 야인여진을 정벌하려고 출병을 하였으며, 야인여진을 완전히 소탕하였지만 이에 따른 군비소모는 야인여진 정벌에서 얻은 노획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춤하게 찾아온 커얼친부의 무역에 자기들도 한 몫 끼어들자고 덤비게 된다. 누르하치는 커얼친의 사절에게 흑응회에 여진의 무역을 함께 할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면 마찻길을 닦고, 대양하구에 선착장 건설을 돕겠다고 조건을 내건다. 밍안왕의 차남은 급히 커얼친에 되돌아가서 복명을 하였다.
누르하치가 새로운 요구를 해왔으므로, 이것을 협상하기 위해서 다음 해인 정사년(丁巳年 서기 1617 년) 1 월 커얼친의 밍안 왕은 직접 누르하치를 찾아왔다. 이 때의 예물로는 낙타 10 필, 말 100 필, 소 100 마리, 양모직물 5백 근, 건육포 5천 근, 말린 치즈 5백 근 등이었다. 8 월까지 시간 여유가 별로 없었으므로 밍안왕은 서둘러서 찾아온 것이다. 밍안왕이 여진 땅을 찾은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25 년 전 예허부를 중심으로 9부 연합이 3만 군세를 모아 누르하치를 습격하였다가 일만오천 명의 누르하치 군에게 패퇴하였는데, 그 때에 밍안왕도 젊은 호기에 참여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금번 아주 많은 예물을 갖고 찾은 이유는 이 무역거래가 그만큼 커얼친에게도 중요한 거래라는 의미이며, 잘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이번에 가져온 물목량은 누르하치가 여진영역에서 새로 길을 내는 작업의 댓가로 감당할만큼 상당한 값이 나가는 것이며, 누르하치에게 길 만들어주기를 허락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026 커얼친부 밍안 바이러 공납 기록]
밍안 왕을 맞아 이야기를 한 후 누르하치는 아들들에게 협상 안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누르하치의 아들들은 전쟁하는 것을 우월한 일이라 평하였고, 장사하는 것을 미천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또 커얼친부와의 인연은 밍안왕의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은 8남 홍타이시가 가장 깊었으므로 홍타이시가 협상을 맡게 되었다. (홍타이시는 서기 1614 년 밍안 왕의 형 망고스 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이 부인은 나중에 홍타이시가 청나라 태종에 오르자 저저 황후가 된다. 저저 황후는 진원성의 부인이 된 하이란주의 고모가 된다.) 홍타이시는 협상안을 만들었는데, 커얼친 부는 마피와 양피를 건주여진을 통해서 대양하구로 실어올 수 있게 하였으며, 건주여진은 여진 영토 내의 마차길과 대양하구의 선착장을 만들어주기로 하였다. 이것이 커얼친 부족 입장에서 바라던 바였다. 홍타이시는 이에 대한 댓가로 커얼친과 흑응회의 무역에 덧붙여서 여진의 물목들, 명나라 국경이 높아져서 팔리지 못하고 있는 인삼, 모피, 약재, 등을 견포, 면포, 미곡으로 무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건을 걸었다. 여진의 물목 중에 가장 가치있는 것은 값도 높고, 부피가 작으며 환금성도 좋아서 명국에서 인기가 좋은 인삼이었다.
커얼친과 건주여진의 비밀사절은 최대한 서둘러 산동성 제남을 향했다. 편지의 내용은 무역로를 육로가 아닌 해로로 바꾸며, 도착지는 대양하구로 한다는 것이다. 또 기존 커얼친과 흑응회의 거래에 덧붙여서, 흑응회와 건주여진 간에 무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건주여진이 원하는 물목은 구하기에 어려웁지 않았다. 사절은 흑응회의 응락 답장을 들고 다시 건주여진으로 빠르게 달렸다. 이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정사년(丁巳年 서기 1617 년) 8월, 흑응회와 커얼친은 은자 십만 량의 물목을 서로 교환하고, 또 흑응회와 건주여진 역시 은자 십만 량의 물목을 교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총 40만 량의 규모로써 흑응회나 여진의 누르하치나 커얼친 3 자가 모두 만족하는 성공적 거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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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경에서는, 6 월 1 일 원세진 호부낭중은 윗전인 상서대감을 찾아가서 장효기 태감의 합의서를 내놓고, 우선 병부와 협의를 하여야 하는 점에서 자기의 의견을 보고하였다. 또한 병부에서도 산동성 순무의 서신을 받았으므로 본안에 대해서 검토를 하였으며, 6 월 10 일에 호부상서는 병부상서를 찾아가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한동안 격조(隔阻)하였습니다. 병부 대감님. 잘 지내셨지요?"
"아, 어서 오시지요. 그렇잖아도 산동성의 건으로 찾아갈까 하였는데..."
"무슨 말씀... 목마른 놈이 샘을 파는 것이 맞지요. 그래서 제가 찾아왔습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씀입니다. 항상 호부 대감님한테 신세를 지는 게 우린데..."
"다름 아니고... 이게 양회염구 포상현 뒤치닥거리 입니다. 어쨋든 빨리 마무리를 해야할 일이기에 병부 대감님의 협조를 부탁드리려 왔습니다."
"예, 저도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흑응회에서는 그 넓은 땅을 불하를 받겠다는 것이 무슨 속셈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뭐 알고 계시는지요?"
"그것이 몇 년 전에 문등현에 300 경을 불하 받아서 개간하여, 재미를 좀 본 모양입니다. 재미라고 하면 오해할 사람도 많은데... 그게 사실은 이렇습니다. 저도 동창제독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문등현에서 생산된 미곡을 저가판매를 한다고 해요. 제남부에 미곡시세가 한 말에 25 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가난한 만성들에게 22 문을 받고 파는 것이에요. 1 할 싸게요. 그 량이 문등현 300 경에서 나온 4만이나 5만 섬입니다."
"그게 무슨 재미인가요?"
"그러니 우습지요. 하여튼 그것을 해서 재미를 보고, 이제 그 일을 산동성 전역에다가 할려고 맘먹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하남성에까지 할려는 지도 모르고요."
"제가 궁금한 것은 흑응회에서 그 넓은 땅을 정말로 경작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끌어들이고, 소작을 놓아 관리하는 것이 쉽지않은 일인데... 그게 또 어떻게 개간했다고 해도, 어떤 해는 가뭄이 들어 소출이 없을 때도 있고요... 세금을 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 경을 개간할 가능성은 일 할도 못될 겁니다. 설사 개간했다 해도 세금을 꼬박꼬박 낼 수 있을까요?"
"병부 대감님은 흑응회가 많이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혹시 미곡저가판매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그냥 이해가 안되니 그래서 그렇지요."
"섬서에서 시작되어 크게 번질뻔한 문향교도 난리를 은자 이백오십만 량을 풀어서 막아낸 사람이 흑응회 진 회주입니다. 동창제독의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얼마나 아까운지 ...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제정신으로는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흐음... 미친... 흐음... 그건 그렇고요. 우리 병부에서 보자면, 경 당 들어오는 세금이 두 량 반이면 좀 헐하다는 생각입니다. 둔전들이 다 등급이 좋은데 둔병이 부족하여 불용지가 되었을 뿐이니, 그게 좀 아쉽습니다."
"문제는 둔전을 경작하여 수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면 땅이 아무리 좋은들 뭐하겠습니까? 이것은 그냥 은자를 때 되면 갖다 바칠 것이니 관리가 쉽다는 점에서 택할만하지요. 군병들이 좀 잘 대해주면 소작들이 왜 경작을 마다하겠습니까마는? 민간에서도 중급지는 태반이 경작되지만, 하급지는 반만 경작이 계속되는 것을 ..."
"뭐 좋습니다. 우리의 둔전은 모두 중급이고요, 각 주현마다 2000 경씩 내놓기로 하지요.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은 면세 기간이 15 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동안 병부의 둔전에서는 은자가 계속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보상을 해주셔야 하지요. 그게 지금은 휴경이라도 내년에 바로 소작이 붙어서 경작될 수도 있으니 마냥 15 년을 공으로 놔둘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흑응회에 중급지에 대해서는 15 년 면세는 없게 하자는 말을 해 주십시오. 또 하나는 15 년이 지나서 은자를 낼 때도 한번만 년말이 넘도록 미납하면 계약은 즉시 취소 되고 불하된 것을 바로 환수(還收)한다는 조항을 넣어주십시오. 아마 15 년이 지나고 2, 3 년만 지나면 모두 환수가 될 것이니까요."
"병부의 둔전은 면세 15 년을 줄 수 없단 말씀이요?"
"호부 대감님께서도 이해를 해주십시오. 이것은 우리 지방의 군병들이 먹고입고 할 은자입니다. 중앙 병부에서 손댈 은자가 아니에요. 이건 바로 산동 순무에게 보내서 각 해방대로 내려보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해를 해주셔야 합니다."
"흐음... 그러면 8000 경이 2.5 량에다 15 년이면 30만 량이네요... 흐...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흑응회에선 갖은 은자를 탈탈 털었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호부에서 얼마간 융통을 부려야 하겠네요. 해마다 2 만이니 15 년 30만 량을 일시 선납으로 해서 20만 량으로 조정해 보십시다."
"일시 선납으로 20만이라... 예, 그 정도로 해서 협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 해를 넘겨서 미납이면 불하된 것 환수한다는 조건은 꼭 넣어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 조건을 꼭 넣겠습니다."
6 월 17 일 경성의 어떤 장원에서 동창제독과 방종철 각신, 호부상서가 모이게 되었다. 호부상서는 병부와 호부가 협의한 사항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병부에서 8천 경을 마련하고, 나머지 12000 경은 4 개 주현이 둔전 아닌 땅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호부상서의 주장에 따라서 병부 산하 산동성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 내려가는 20만 량과 산동성의 허액분을 없애고 미납 세금을 털어내는 조건으로 등주부, 래주부, 녕해주에 내려갈 20만 량을 더한 40만 량을 동창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긴 이야기가 끝나고 신료들 사이의 조정도 끝나서, 양회지구 포상현 뒤치다거리를 정리할 수 있게 된다.
7 월 15 일 동창에서는 양회염구의 포상현 염운사가 관고를 절도횡령하여 도망친 것과 그에 따른 관련 죄인들 70 여명을 이미 징계하였다는 상주문을 이 때에야 올릴 수 있었다. 만력제는 문제를 보고하면 아무 말도 없이 보고자가 그 대책을 말할 때까지 듣고만 있었다. 대책도 없이 문제만 보고하면, 어떤 때는 후속조치를 마련해오라는 지시를 곱게 듣고 물러나오게 되지만, 어떤 때는 황제의 기분에 따라서 채찍으로 수없이 두둘겨맞는 일도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므로 문제는 해결책과 꼭 함께 올리게 되는 관례가 생겼다. 이번 후속대책으로써 호부의 원세진 낭중이 작성한 '염법(鹽法)10의(十議)'에 관한 상주문이었다. '염법10의'란 염인 200만 매를 앞으로 10 년간 매년 이십만 매씩 소금으로 염인을 10 상단에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즉 포상현이 무단 발행하여 횡령한 염인 200만 매에 대한 조치를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창과 호부의 두 상주문(上奏文)은 8 월 중순에 황제의 재가(裁可)를 얻음으로써 이것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포상현의 범죄와 그 처벌과 사후대책까지 종결처리를 하게 되었다.
대소 신료들은 황제의 재가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태자당이건 복왕당이건 간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해진 사연에서 황제는 양회염구의 염운사 횡령절도 사건과 관련자 처벌, '염법10의' 등 일련의 사건 설명을 듣고, 동창과 호부, 병부의 처리가 융통성있었고 적절하였다고 상찬을 내리셨다고 하였으며, 이로써 황태자 궁에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간 사건 역시 황제의 심중에서 완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 황제가 장거정 대학사(大學士)의 부정 사건에 대해서 격노한 것을 아직 기억하는 신료들은 혹시 황제가 격노하여 어떤 큰 징계가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가 한숨을 돌린 것이다. 이제 소금과는 전혀 관계없이 흑응회의 불용지 불하 건만 마무리 지으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