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34 회 빨간 십자가 돛의 갈레온은 나포(拿捕)되었다
진원성은 어린 시절 밀무역선을 타고 와서 도착한 곳이 홍모귀 무역선이 보였던 그 근처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너무 어릴 때였으므로, 그리고 마음대로 주변을 살펴 기억하지도 못했으니, 아무래도 알기에 무리라 생각하였다. 한시진 반을 걸려서 진원성의 배는 도착하였으며, 순풍에서는 반 시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역풍이라서 한 시진 반이 걸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배가 도착하자 일행은 말을 빌리는 절차를 거쳐서 말을 빌리고, 동단을 향해서 말을 달렸다. 관음보살님이 도와주셨는지, 용신이 도와주셨는지, 동단에 마춤하게 도착해서 간신히 떠나는 배에 걸터 앉게 되었다. 그리고 보타산에 들어서 숙소를 잡아, 여장을 풀 수 있었다.
다음날 인시 무렵 진원성은 새벽수련을 나섰다. 배를 타고 오면서 보니 그리 크지 않은 섬이기에 뛰어서 한 바퀴를 돌 수 있을까 하다가 좀 무리다 싶어 반쯤 가다가 정상으로 올라서 되돌아오기로 맘을 먹었다. 그리고 반시진 쯤 지나자 정상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때에 동쪽에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제남에서 점소이로 있을 적에 태산에 가서 뜨거움을 느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태양의 왼쪽으로 거북등 같은 작은 섬이 있어서 노을 속에서 빨갛게 불타오르는듯 보였다. 진원성은 내일은 두 총관을 깨워서 이 멋진 광경을 구경시켜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니 멀리에서 큰 배 두 척이 북쪽으로 함께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자세하게 보니 함께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두 배는 서로를 향해 대포를 쏘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두 배는 바람에 밀려서 점점 서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두 배는 서로를 침몰시키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 때에 바람은 남동풍이었으며, 이럴 경우 남쪽에 있는 배는 북쪽에 있는 배보다 전략 상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대포라서 바람의 영향을 덜 받겠지만 그래도 바람에 배가 밀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람을 등진 상황에서 배를 잘 조정하는 선수(船首)라면 상대의 포탄이 바다에 떨어지고, 자기가 쏜 포탄을 상대의 배에 떨어지도록 그렇게 조정을 할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바람을 등지고 싸운는 것은 이미 절반 이상을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진원성은 자기가 선수(船首)가 된듯 이 전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바람에 떠밀려 거리가 가까워지자, 북쪽에 있는 그 배는 바로 어제 보았던, 빨간 십자가를 돛에 그렸던 배임을 알 수 있었고 남쪽의 배는 돗에 검은 깃발을 그려넣은 거의 대등한 크기의 배였다. 이 때에 남쪽 배가 쏜 포탄은 북쪽 배에 정통으로 적중하여, 아마도 상당수의 사상자를 내었을 것으로 진원성은 짐작하였으며, 조금 있으니 빨간 십자가 북쪽 배는 항복의 표시로 흰 깃발을 만들어 흔들었다. 이로써 전투는 끝났으며, 두 배를 접선(接船)시켜서 북쪽 배에 있는 선부(船夫)들 전원이 남쪽 배로 옮겨 타서 포로가 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북쪽 배에서 두 세 사람이 북쪽 배에 올라타서 수색을 하고 돌아왔다. 빨간 돛의 배는 어느새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으며 반 시진 이내에 침몰할 것으로 짐작되었다. 남쪽 배는 북쪽 배를 밧줄로 묶어서 연결하여 앞에 보이는 북쪽 섬을 향해 움직였으며,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그 섬의 한 쪽에 도착하더니, 섬 뒤로 진원성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진원성은 그 후로도 얼마간 더 지켜보다가 변화가 없자 배 두 척은 그 섬에 착선하였다고 짐작하며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진원성이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 넘어 있었으며, 추인걸과 두 총관은 향불을 올리려고 채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원성 일행은 쉬엄쉬엄 산길을 따라 오르면서, 땀이 흐르면 풍광을 살펴보며 땀을 닦고 다시 걷고 하기를 얼마간 하여 보타관음사(普陀觀音寺)라는 절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린 총관은 진원성에게 은자 열 량을 달라고 하더니 하미와 다섯 량씩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는 진원성에게 한 시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전각(展閣)들을 구경하러 하미와 같이 떠나갔으며, 이것은 진원성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원성은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추인걸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동남쪽에 보이는 작은 섬에 대해 묻게 되었다. 추인걸은 작은 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그 섬은 낙가산(洛伽山)이라고 부르는데 무인도 입니다. 말 좋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누워계신 모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물론 가보지 못하였지요. 그런데 왜 묻습니까?"
"생김새가 좀 특이하게 보여서 한번 물어보았지요. 그리고 북쪽으로도 어떤 섬이 보이던데요. 그 섬은 무슨 섬인가요?"
"그 섬은 더욱 작은 섬으로 역시 무인도입니다. 섬에 사람이 살려면 우선적으로 식수가 해결되어야만 하지요. 식수가 없으면 무인도가 됩니다."
[그림 보타산 주변]
"그렇군요. 참 추형은 부처님께 예불 올리지 않는가요?"
"변명을 하자면, 마음 속에서 내가 하고싶은 무엇을 결정한 다음에 한꺼번에 예불을 올리려고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마침 시간여유가 있으니 하나 묻겠습니다. 전날 고려국 이야기에서 강서성 경덕진이 옛날에는 고령 땅이라 말했는데, 그 고려국이 코리족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코리족, 구리족이라 들어보셨습니까?"
"못들어 보았습니다. 글자 려(麗)는 사슴이 많이 사는 땅 이름이라고 배웠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고려(高麗)를 높은 곳에 사슴이 많이 사는 나라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요."
"왕씨가 당나라 부족이라면서요? 제가 말하는 것은 왕씨가 고려국 사람들과 부족이 다른데도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것이 참 뜻밖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웬만해서는 다른 부족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텐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왕씨가 무예도 출중하고, 영웅호걸의 풍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또 딸을 시집보내서 혼인 동맹을 맺는 것이 많이 사용되는 연합 방법이었으니까요."
"아무리 그렇기로 각지의 호족들이 29 명이나 딸을 시집보내다니... 나는 개인적으로 흥안령산의 코리족과 관계되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고려국이 코리족과 어떤 관계가 있나 하는 것을 알고 싶었어요. 만일 고려국이 본래 코리족과 한 부족이라면 혼인동맹이라도 그렇게 많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코리족과 고려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줄 아시나요? ... 추 형이 아무래도 말을 다 하고 싶지 않은 것 같군요."
진원성은 추인걸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고 있던가 한다고 생각하였다. 호족이 자기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혼인 시키려면 적절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에게 시집온 하미총관의 경우와 비슷할텐데, 쿠몰국왕은 경비대장이 자기가 펼친 방음수 일격에 즉사하는 사고를 겪은 후에, 즉 신비력을 경험한 후에 딸을 시집보내려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추인걸은 마치 시집보내는 것을 맨처음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추인걸이 말하려고 마음을 정한듯 입맛을 한번 다시고 입을 열었다.
"진 회주님께서 자꾸 물으시니 잊어버리려 한 집안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황제만 쓰는 청자를 만들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묻어버리려 했는데, 진 회주님의 물음에 답하려 다시 꺼냅니다."
"추 형의 가문과 왕씨의 가문이 본래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군요?"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집은 고령 땅에 산골에 있던, 옹기그릇을 굽는 수십 호의 도공들 중에 평범한 하나였지요. 그런데 고려국 황제의 숙부님이 어느날 우리 마을에 유배되어 온 일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삼촌이 유배를 당해 오다니, 반역을 저질렀던 것인가요? 어느 황궁이던 황제가 서로 되려고 다툼이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그건 아닙니다. 흐음, 진회주님이 이야기를 꼼꼼히 들으시니 말하기가 더 조심스럽네요. 기억을 잘 되살려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당시에 고려 황제는 17 대 인종(仁宗)이셨고, 유배되어오신 황제의 삼촌은 대방공(帶方公 생몰 ? - 1128 년, 숙종의 아들) '보' 라는 분입니다. 참, 그 때 고령은 땅이름이 고려국에 들어서 경산부(京山府)로 바뀌어 있었지요. 고령은 본래 가야국(伽倻國)의 땅이었는데, 신라국의 경덕대왕(景德大王, = 신라 35 대 왕임)께서 합병하셔서 이름을 고령군(高靈郡)으로 고쳤지요. 명나라에 들어서는 경덕진(景德鎭)으로 이름이 또 바뀌었지만, 지금도 고령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라국 경덕왕의 이름을 가져와 경덕진으로 붙였군요. 이번에 시간이 웬만하면 경덕진에도 가볼까 생각중입니다만."
"왕의 숙부가 왕위를 찬탈하려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대방공은 유배를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자겸(李資謙)이란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꾸민 일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사건으로 이자겸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여 황제를 신하 대하듯 하였다고 합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다시 외손자 황제에게 두 이모를 시집보냅니다."
"그게 뭡니까? 외손자에게 두 이모를 시집 보냈다니..."
"아자겸에게 딸이 셋 있는데, 하나는 인종의 아버지 예종(睿宗)에게 시집보내고, 거기에서 인종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자겸은 두 딸을 외손 인종에게 시집보냈던 거죠."
"흠, 어머니의 친형제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다니, 그것 참... 천벌 받을 놈입니다."
"얼마후 이자겸은 난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였으나, 멸망당합니다. 고려국에서도 근친결혼이 큰 문제가 됨을 알고 있었으며, 이미 인종의 할아버지 대에 육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는 법령을 발표하였지만,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대방공께서 고령 땅에 유배와서, 저의 집안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배온 죄인이라도 황족이니 지방수령들은 깍듯하게 모셔야 하였고, 그 수발들 사람을 정해주는데 우리 추가가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황족과 추가가 얽혀들게 되었지요."
"그게 처음이면 왕씨가 고려국에 받아들여진 때와는 상관없네요."
"예, 저의 집안에서 싸구려 옹기를 구워오다가, 대방공의 지시에 따라 고급의 자기를 굽게 됩니다. 높으신 대방공을 모시려니 옹기 그릇은 좀 겪에 맞지 않았고, 그래서 고급의 자기를 만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옹기와 자기는 굽는 온도가 차이 납니다. 옹기는 흙알갱이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자기는 높은 온도에 흙알갱이가 모두 녹아 물처럼 하나가 되었다 굳으니 단단해지고, 그래서 얇아도 되고, 그래서 가벼워도 되고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옹기와 자기가 그렇게 다르군요."
"우리 추가는 그렇게 하여 다른 집과는 다르게 고급자기를 굽는 집으로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옹기와 자기는 굽는 온도가 달라야 하기에 자연 가마도 달라야하고, 흙에서 부터 유약까지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집안이 대방공에게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불가마에서 작업할 때에도 건강에 보탬을 주는 호흡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 호흡을 배우면 뜨거움을 얼마간 이기게 됩니다. 대방공은 유배되어 온지 몇 년만에 병들어 급히 돌아가시고 말았지만, 우리집안은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연구를 지속하였으며 마침내 약 70 년, 그러니까 2 대를 거친 후에 결국 청자를 만들어 냅니다."
"청자 만들기가 본래 어려웠었네요. 집념이 참 대단합니다."
"대방공은 자기(瓷器)로 만족하지말고, 꼭 청자(靑磁)를 만들라고 유언을 하셨답니다. 청자는 황제만 쓸수 있는 기물이어야 하니 함부로 만들지 말고, 만드는 방법도 잘 감추도록 지시를 하셨지요. 가을의 높은 하늘 색갈 같은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내려고 추가의 선조들은 수십 년간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었지요. 하지만 몽골 달단족들 때문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