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목단(제2부)

제 025 회 적목단(赤目團) 출범(出帆)하다

금박(金舶) 2016. 3. 25. 14:27

이날의 생사대결에서는 력행 전투조원의 말이 절반만 맞게 되었다. 대권절각(擡拳折脚) 발검혈항(發劍血肛)에서 대권절각만 맞아들었고, 발검혈항은 맞지 않았다. 진원성이 적목귀로써 생사대결을 했었던 약 2 개월 동안 단 한 차례 유소룡만 대권절각 발검혈항에서 예외가 되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진원성은 얼굴 왼편을 한 치 가량 꿰맸다. 그리고 누워서 유단주와의 생사대결을 혼자서 조용히 검토하면서 이번에는 정말 자기의 목숨이 저승의 문턱을 밟았다가 기적적으로 돌아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유소룡의 마지막 공격은 유단주가 몰래 배워놓은 비장의 한 수였으며, 탈명일투(奪命一投)라고 이름지은 것이었다. 진원성은 이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투도(投刀)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 다분히 행운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였다. 칼 끝에 결국 왼쪽 볼을 길게 스쳐서 상당량의 피를 흘려야만 하였으니까. 하지만 칼이 날라오는 그 순간에, 아니 유단주가 칼을 던졌음을 안 그 순간, 그 짧은 간극에 멈칫하고 동작이 늦어졌다면 아마도 심장으로 그 칼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진원성은 멈칫함 없이 오른 팔목으로 그 칼을 쳐냈고, 완전히 칼을 쳐내지 못하여 칼을 좀 왼쪽으로 밀어내기만 하였으며, 몸을 낮추면서 오른쪽으로 비켜내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볼이 아니라 눈에 칼끝이 스쳤다면 아마 왼쪽 눈은 실명(失明)하게 되었을 것인데, 이것만은 정말 하늘의 도우심으로 면하게 되었다고 밖에는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진원성은 처음에는 운(運)이 좋아서 자기가 그 칼을 피할 수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였다가, 결코 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실전(實戰)의 감(感)'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근자에 진원성은 무뢰들 중의 최강자들과 연이어서 생사대결을 펼쳐왔기에 이미 최고조로 실전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실전감에 의하여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오랜 세월 수련을 하여서 얻게 되는 실력도 아니고, 훌륭한 사부라고 해서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대련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사대결의 경험들에 의하여만 얻어지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계속되는 생사대결이 없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희미해지고 종래에 사라지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그 다음에 진원성은 왼발로 유단주의 오른 무릎 슬개골을 파괴하였던 그 공격을 생각하였다. 진원성이 탈명일투를 피하느라 생긴 간극 때문에 오히려 유단주는 더 많은 시간 여유를 갖고 있었으며, 피하려고 맘 먹고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유단주는 피하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맞아주려는듯 가만히 있었다. 유단주는 왜 피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피하지 못한 것인가? 유단주는 이미 그 순간에 포기하였음인가? 아니면 그 순간에 자기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안 그 순간에 이미 패배하였다고 판단하였음인가? 진원성은 유단주가 오랜동안 생사대결을 갖지 못하여, 어떤 실전의 감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내지 못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 다음 동작을 생각해놓지 않았으니 순간 의식이 멈추어졌던 셈이다.


그러나 유단주가 피하였다면, 그 다음은 어찌 되었을까? 아마 싸움은 계속 되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어떤 대화의 여지도 없이, 생명이 바로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한 수, 한 수가 연결되는 혈투가 되어 둘 중의 하나가 죽게되는, 오늘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십중팔구 유소룡은 죽었을 것이며, 그렇다고 보면 유단주가 피하지 않고 다리병신이 된 것이 오히려 유단주의 생명을 구한 것이 되며, 결국 보다 바람직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었다. 


만일 유단주가 죽었다면, 그리고 백룡단의 누가 나서서 복수를 하자고 떠들고 덤벼서 난장 싸움이 펼쳐졌다면 33 명 대 24 명의 싸움일망정, 적목단 33 명과 진원성 자신도 전력이 우세한 백룡단 24 명에게 모두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진원성은 만일 난장 싸움에서 졌다면 자기가 백룡단에게 항복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하루 전에 자기는 죽기를 각오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원성은 다음 날 하루를 조용히 쉴 수 있었다. 백룡단 연락병 유래타와 대화를 나누면서 백룡단의 여러가지 사정을 물어듣는 시간을 갖었다. 유래타는 우선 자기의 아버지를 살려준 것에 감사하면서 대신 자기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며, 진원성에게 충심을 보였다. 진원성은 백룡단이 보국을 중심으로 자기의 구역에서 매달 팔백 량 이상 보호비를 걷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백룡단원의 서열과 부단주 2 명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유래타와 대화를 끝낸 후 진원성은 백룡단을 귀순시켰지만 다른 작은 조직을 흡수할 때와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직 명료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흡수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작은 본체 역시 변화를 겪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지만, 조직이 커나가면 그에 따라 조직의 본체는 어떤 변화를 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는데, 그에 더하여 살모사가 구렁이를 삼킬 때에도 어떤 변화를 치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를 잘 치뤄내야만 클 수 있고, 유지할 수 있으며, 그 변화를 잘 치루지 못하면 큰 조직은 어느새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말 것임을 진원성은 깨달으려고 하루 종일 발버둥을 쳐보았다. 그러나 끝내 이런 지혜는 진원성의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안개 속에서 무엇을 보는듯, 무엇인지 모르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그 정도만을 알고서 아쉬워 하고 넘어갔다. 진원성의 머리는 아직 깨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룡단이 적목단에게 귀순하다'


'백룡단주가 적목귀에게 지고 오른 다리가 바싹 부스러져서 잘라내었다'


'적목귀에게 주먹을 내밀면 다리가 부러지고, 검을 뽑으면 똥구멍에 피본다'


'적목귀와는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마라. 눈을 마주치면 다리가 마비된다'


이런 저런 말들과 함께 백룡단이 적목귀에게 접수되었다는 소식이 낙양성을 또 한번 크게 흔들었다. 낙양성의 패자가 적목귀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어떤 사람들은 '적목귀의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다니' 하며 감탄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적목귀의 눈이 귀신의 눈이어서 그 붉은 눈을 마주치면, 무술의 고수도 다리가 마비되고 별 수 없이 당하고 만다'는, 그래서 백룡단주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그런 헛소문도 나돌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다리가 부러진 부상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다 적목귀의 붉은 눈을 마주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낙양단 력행 진원성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적목귀라는 이름이 일반화되며, 적목귀와 함께 나타나는 전투조 3 개갑(個甲) 33 명을 적목단(赤目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로는 무뢰들과의 싸움은 진원성이 전투현장에 직접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부하들 중에서 누군가가 양 눈 위에 붉은 먹(주사유 朱沙油)을 찍어바르고 나서게 되었으며, 적목귀의 대리자로써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원성이 직접 전투를 하기보다는 전투조의 조장이나 조원들의 선에서 마무리 되고는 하였다. 그리고 살상(殺傷)이 일어나는 경우도 훨씬 줄어지게 되었다. 다만 적목단을 등 뒤에서 몰래 기습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죽음을 내려서 징계를 하였으며, 이로써 뒤에서 기습하는 무뢰들 역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낙양성 주변의 무뢰들은 적목귀에게 몽땅 귀순하거나, 실력이 부족한 무뢰들은 고향으로 또는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낙양단의 오단두는 10 월 15 일 석행도를 통해서 진원성에게 도저히 감당이 안되니 낙양단에서 고이 나가달라고 뜻을 전해왔다. 그래서 진원성은 본래 낙양단에서 온 단원들에게는 본인의사에 따라서 낙양단에 돌아가든지, 아니면 적목단에 남든지 선택을 하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석행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 즉 전투조에서는 3 명이, 정탐조에서는 20 명이 적목단에 남게 되었다. 적목단은 낙양성 남쪽에 임시로 적목단의 본부 건물을 하나 빌렸으며, 전투조 33 명과 정탐조 33 명을 유지하여 가기로 하였다. 


또 새 조직의 이름으로 낙양단 대신 이미 널리 알려진 이름 적목단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으며, 적목단 본부의 총관으로는 백룡단 단주였던 유소룡을 내정하였다. 유소룡은 몸을 상한 일로 공력을 칠(七) 할 이상 상실하였으며, 불구자가 되어 본인의 희망도 총관 직이 더 나을 것으로 판단한 때문이었다. 유소룡은 치료가 대충 마무리 되는 11 월 초부터 총관직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낙양 인근의 무뢰들 세계 즉 무림강호(武林江湖)는 적목귀 진원성에게 평정되었다. 백룡단 접수 이후의 일은 가끔 불복하는 무뢰들을 포섭하거나 징치하는 것으로 사실상 평정을 확인하는 수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목귀에 의하여 평정된 낙양 무림강호는 족보가 있는 세력들을 제외한 나머지 뿌리없는 무뢰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잠깐 낙양의 세력분포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낙양성 인근에서 관부의 아첩과 어린대장에 근거하여 공식적으로 세금을 내는 거대 상방, 지주장원들에 속한 경비무사들은 양지의 세력이므로 제외하고, 족보에 따라서 낙양 세력들을 꼽아보자면 경목파, 홍서파, 화선파, 동전파, 쌍부파, 흑묘파, 개방 낙양단 이렇게 모두 일곱 개 세력을 말할 수 있었다. 이들 일곱은 비공식적으로 '세금' 이라 부르는 은자를 매달 관부에 얼마씩 바치는 거래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관부의 비호를 받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자리가 적목단이라고 말할만 하였다. 적목단 휘하에 모여든 무뢰들은 과거 어쩌다 서로 마주치면 눈으로 쌈박질을 한 차례 하고 비켜지났지만 이제부터는 적목귀를 함께 두목으로 모신다는 입장이 되어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힘이 흘러가면 항상 그에 따른 동화작용이 발생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