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1 회 수재민(水災民)을 받아들이다
7 월 5 일이 되자, 동창부 난민들이 갑자기 몰려들었으며, 흑응장원은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대청하의 선착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행렬이 흑응장에 이어질 정도로 길었으니, 이것은 누군가가 배에 난민을 실어와서 한꺼번에 밀어넣은 것이 분명하였으나 그 누구가 기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흑응장원에 들어서자마자, 제남부 아문의 군병 10 명과 화려한 옷과 짧은 방망이로 의장(儀仗)을 꾸민 채 엄히 정렬하여 맞이하는 백 명의 민병대는 분위기를 압도하며, 난민들을 포로 다루는듯 재빨리 힘을 좀 쓸만한 장정들과 기타 부대 가족들로 나누어서, 각각 서기들을 붙여서 신상파악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가족들 쪽의 신상파악의 내용과 장정들의 신상파악 내용이 양쪽 모두 일치하는지 비교하여, 맞지 않은 장정들은 즉시 아문에서 나온 군병에게 인계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가족들의 이름과 나이를 물어서 적도록 하고, 실제로 가족들에게 확인할만한 것을 물어 그것을 확인하면 결국은 어떤 거짓이라도 탄로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낸 홀몸 남정 중 신분이 불명한 사람은 아문에 감금조치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이 체포된 소문을 내서 누군가의 시도가 좀더 발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난동을 꾸미려는 사람이라면 가족을 대동하고 올 리는 없을 것이라는 흑응 서기의 귀띔에 흑응회주가 흑응장 정문을 통과하는 장정들을 재빨리 이렇게 처리하도록 경우(境遇)를 준비하였음이다. 임시 서기 4 명은 두 패로 나뉘어 한쪽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면담하고, 한쪽에서는 정남(丁男)을 면담하여 미심쩍은 사람은 양쪽 자료를 확인하여 판정을 할 수 있었다. 일각에 다섯 명씩 감당하여 한 시진에 40 호씩, 하루에 160 호를 면담할 수 있었으며, 무난하게 하루하루를 넘겨갈 수 있었다.
이렇게 7월 15 일 까지 약 오천 명의 난민이 흑응장에 도착하였으며, 다행히 난민들은 밥 끓일 도구 등은 물론, 천막같은 것을 가져온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므로, 흑응회에서도 준비한 것이 있었고, 총 500 무가 되는 흑응장원이 그들을 충분히 수용할 만큼 넓어서, 적당히 구획을 지어 그들을 수용하였다.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을 배분하는 것을 빌미로 이갑 조직으로 편성하였고, 각 이장들을 통해서 필요한 명령을 내려보내고 그들의 의견을 상달받는 체제로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도착하는대로 난민들은 모두 이갑으로 편성이 되어, 좀 힘을 쓸만한 정남(丁男) 들부터 우선하여 흑응회에 자기들의 노동력을 파는 노부(勞夫)가 될 수 있었다.
서기는 노부들의 등급을 상 중 하 세 개로 만들어 처음에는 하루에 15 문, 10 문, 5 문으로 당례를 책정하였다. 이것은 미곡을 배급으로 나누어 주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에 결코 헐한 값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생활에는 식량 말고도 여러가지가 필요한 법이라 난민들은 서로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어 하였다. 그리고 일감이 확정되고 이갑제도 확정되자 바로 식량배급은 꼭 필요한 사람 즉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고, 의지할 바도 없는 사람들에게만 지급하였으며, 그 대신 하루 임료를 25 문, 20 문, 15 문으로 올려서 지급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제남지부에게 보고된 자료에서는 식량지원비라는 비목으로 포함된다. 흑응회에서도 가급적 그들을 놀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없던 일감도 만들어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흑응장의 주변에는 흑응회의 난민들이 벌어들인 동전을 욕심내는 봇짐 장사치들이 동과 서와 남 쪽에 찾아와서 아주 자연스럽게 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흑응회에서도 3 곳의 시장을 장려하였고, 흑응서기는 성시가 형성되면 자연히 따라붙는 기생충같은 무뢰배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시장을 지켰다. 또 흑응회에서도 중요한 품목들은 직접 판매하는 점포를 열고, 가격을 조절하였다. 예컨데 쌀 한 섬의 값이 동전으로 250 문 전후였는데, 백 섬의 창고 재고를 갖고 있는 흑응회의 직영 쌀가게에서는 쌀 한섬에 220 문 가격으로, 됫박으로만 팔고 있었다. 매일 됫박으로 사먹는 사람들은 흑응회의 쌀가게를 이용하지만, 한 말씩 사려는 사람들은 다른 쌀가게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니 흑응회에 머무는 난민은 쌀 한 섬에 동전 235 문 이상의 값으로는 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흑응회가 주위의 시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난민들에게 지급하는 동전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며, 이것은 또한 흑응회의 은자를 지키는 일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되었다.
서기의 계획대로 각 사람은 분류 기준에 따라 구분하여, 다음날부터 흑응장원의 둘레를 나무로 빙둘러 담장을 쌓은 일부터 시작하였으며, 일부의 정말 쓸만한 일꾼들로는 땅 전부를 구획을 지어 땅을 파고, 하수구를 묻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것은 집을 짓기 전에 집터를 고르기 전에 가장 우선해 할 일이었다. 그 외에도 몇가지 일 들을 하였는데, 그것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 서기는 일의 전부를 상세하게 기록해 나갔는데, 이것은 제남지부에게 은자 사용 내역을 보고하여야 하는 일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흑대형에게 나중에 어떤 복명(復命) 근거가 될 것을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했던 것이 사유였다. 이런 상세하게 기록을 남긴 것은 흑응회 서기의 탁월한 행적이라 할 것이다. 그 기록분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창부 약 5000 명 난민의 구분 및 처리와 결과 요약
- 난민 인원수 / 단독 정남(丁男, 단독 정남은 홀로 몸인 장정을 말함)은 39 명으로 조사 후 이 중에 12 명은 순검에게 이월하여 감금 처리 -> 이들은 결국 한 달을 갇혀 살다가 은자 한 량을 받고서 풀려났다.
- 난민 인원수 / 971 호구에 총 4905 명으로 이들은 나중에 3 가지의 선택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나뉘어졌다.
- 연령 별 난민 분류 - 총 4905 명
/ 61 세 이상 / 남 102 명 / 여 437 명 / 합계 539 명
/ 16 - 60 세 / 남 1573 명 / 여 1685 명 / 합계 3258 명
/ 8 - 15 세 / 남 279 명 / 여 184 명 / 합계 463 명
/ 1 - 7 세 / 남 348 명 / 여 297 명 / 합계 645 명
- 난민 호구들의 자의 선택에 의한 자선금 사용 내역
/ 작으나마 자기의 전답을 소유하여 다시 동창부로 돌아간 161 호는 995 명이며, 흑응회에 평균 20일 머물렀음, 이들에게는 식량지원비로 40 량을 썼으며, 돌아가서 잘 정착할 자금으로 호당 3 량을 지급하여 483 량 합계 523 량을 사용함.
/ 등주부에서 호당 전답 50 무를 무상 지급하고, 3 년 세금을 면하며, 4 년 부터 5 년간 세금을 부담하면, 전답의 명의를 이전 등록해주는 조건으로 하여, 등주부로 이주해간 것은 612 호, 인원은 2893 명이며, 이들이 흑응회에는 평균 40일 머물렀음, 이들에게는 식량지원비로 267 량을 썼으며, 등주부에 정착할 자금 지원으로 호당 5 량을 지급하여 3060 량을 쓰고, 합계 3327 량을 사용함. 흑응회의 이름으로 등주부에 식민을 한 결과는 이 년 쯤 지나면 나올 것으로 예상함.
/ 제남부에 남아, 정착할 것을 택한 것은 198 호, 인원은 975 명이며, 이들은 흑응회에서 정착을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취지로, 다음해 1월까지 평균 200 일 머물렀으며, 식량지원비로 653 량을 썼으며, 다시 제남부에 정착할 자금으로 호당 은자 2 량 반을 지급하여 396 량을 쓰고, 합계 1409 량을 사용함
/ 호구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42 명 이며, 기간 중에 사망한 사람은 19 명으로 남은 사람 23 명이며, 대부분 병들고 노약한 사람이므로 수지원에 수용할 수 밖에 없으며, 계속 돌봐야함. 이들의 식량지원비, 장례비, 수지원 수용비 등으로 253 량을 사용함.
/ 제남부 아문 순검 이하 10 명 2 개월 월례 은자 100 량, 백호파 100 명 2 개월 은자 100 량, 기타 비용 약 150량 정도 하여 합계 350 량 사용함(제남부 순검 아졸과 백호파 인원은 2 달만 지원받음)
/ 7 월 부터 익년 1 월말 까지 은자 총계 5502 량 사용함.(이 외에 각종 작업에 필요한 하수용 토관과 기타자재 구입은 별도의 흑응장의 은자 900 량을 사용함)
/ 성청에서 자선협찬금 은자 오백 량이 내려와 그것을 차감하니 실 집행금은 5002 량임.
- 난민들이 흑응회에서 노동으로 만들어준 성과 (8월 부터 익년 1월까지 놀고있는 인력을 이용하여 작업하고 당례를 지급함, 주로 노동력을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작업임)
/ 흑응장원 500 무의 주변을 빙둘러 경계지역에 말뚝을 박고 목책을 구축, 순찰 통로를 다듬어 놓은 일 - 울타리를 높게 만들지는 못하여 통행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경계를 확실하게 만든 효과를 얻음
/ 유실수를 심을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택지역에 우물을 세 개 팠으며, 하수관을 묻고, 평평하게 땅을 골랐음. - 이 일은 많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작업이었음.
/ 북쪽 관도변에는 점포를 지을 땅을 비워 두었으며, 중앙에는 대형이 오면 용도를 정할 땅을 남겨두고, 흑돈을 보관할 장소와 흑돈을 수리할 장소를 만들었음. - 북쪽 관도변에는 별도로 응철점을 짓는 작업이 진행되었음.
/ 집지을 지역을 정하고, 그 지역의 중심에 도로를 구분하여 놓았으며, 남쪽, 서쪽과 동쪽에 총 448 채의 집 지을 땅에 번호를 부여하고 터를 골랐음. 남방 주택 짓기 방법을 채택하여 집을 지을 흙돌을 힘이 되는 만큼 생산하게함.
/ 흑응회에서 집지을 자재를 조달하고, 대목과 중목을 동원하여, 12 인 가족 1 호구의 흑응회원이 살 수 있는 집 12 채를 지었음. 자재 조달비용은 총 120 량이며, 한 채에 은자 25 량 값으로 흑응회원 지원자 중에서 십이 명을 추첨하여 집을 팔기로 함. 계속 주택을 지어나갈 예정임.
흑응 서기는 나중에 누가 보더라도 일의 전모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기록을 남겨서, 기록물 안에는 상기의 내용 말고도 아주 자세한 여러가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한가지 더 언급할 일은 이러한 내용을 보고 받은 제남지부가 산동성 포정사에게 다시 자세하게 보고를 하여서, 산동성 포정사와 제남지부는 그 일로 인하여, 세 가지의 이유로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첫 째가 흑응회의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것이며, 둘 째로 돈에 욕심내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난민들을 위해 돈을 지출하였다는 것이며, 셋 째는 이 모든 것을 총 지휘한 흑대형이 아직도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인 점이었다. 흑대형이 이 모든 일을 지휘하여 한 것이라 잘못 짐작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남지부는 언제 한번 흑대형을 불러서 직접 만나보아야겠다고 말하였다 한다.
서익필 흑응서기는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후일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꼭 필요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충분한 경험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첫걸음으로는 어쩌면 아주 제격인 경험이라 할 것이었다. 표면상은 제남지부에게 보고하려고 또는 나중에 흑대형에게 보고하려 한다면서 기록을 남겼지만 실제로는 본인의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그 기록들이 더 유용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건설은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는 것의 확대판이기 때문이다. 흑응장원 대지에 400 여채의 집을 짓는 것은 바로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통해서 흑응회의 지도부 4 명은 회의 일에 힘을 모으면서 하나로 될 수 있었다. 서로 너무 바쁘게 만력 35 년(정미년 丁未年)을 지내느라, 아직은 자기들이 이루어낸 것이 무엇인지도 알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