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49. 해하(海河)의 결전 - 1

금박(金舶) 2015. 11. 11. 06:33

  #49. 해하(海河)의 결전


  사비공주는 지난 8월 중순에 묘향산에서  출산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이설궁(李雪宮)이라고 하였다. 사비공주는 출산 후 몇달이 지나고 태풍도 불지않는 11월에 묘향산을 내려와 사비성(대련)에 가서 배를 빌려서 북해군으로 상륙하였다. 그녀의 영지인 산동의 북해군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새로 지어진 불고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을 찾아서 청주 광고성의 제왕부로 들어갔다가 마침 출산 준비중인 부림을 만났다. 부림은 이미 유모를 준비해놓고 있었는데 사비공주를 위하여 설궁 왕자의 유모로 바꾸었다. 대신에 부림은 새로 유모를 구하면 되었다. 사비공주는 청주군이 모두 낙릉성 모여서 전투 준비 중인 것을 듣고 설궁왕자를 부림에게 맡기고 말에 올라타서 낙릉성으로 달렸다. 하루를 꼬박 말 달려온 사비공주의 눈에 벽려혼이 들어왔다.


  "전하."


  사비공주가 성밖에서 해자 공사를 독려중인 벽려혼을 보고 말을 걸었다.


  "어서오시오."


  벽려혼은 백만 원군보다도 사비공주 하나가 큰 힘이 되었다.


  "공사가 무척 바쁘군요."


  선비족이 몰려온다는 소문에 성민들은 긴장하고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서 일을 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다. 바른팔이 자유롭지 못한 벽려혼도 약간은 긴장하였다.


  "사비부인이 다시 돌아오니 마음이 놓이는군."


  "전하, 소문에 아군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이다. 황하를 건너간 5만의 백제군 중에 4만이 돌아오지 못했소. 한때는 유주(북경)와 요서(진황도시)를 점령했었는데 아침 이슬처럼 녹아버렸소."


  사비공주는 이맛살이 찌푸러졌다.


  "그럼, 오라버니 사비왕은?"


  "사비왕도 연왕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에게 전사했고 여귀도 마찬가지요."


  벽려혼이 비보를 전하자 사비공주는 기운이 빠졌다. 같이 커온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죽어버리다니.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고 싶어요. 모용농이라는 상대가 아주 강한가요?"


  "그렇소. 게다가 그 밑에 부장으로 같이 쳐들어오는 모용훈도 만만치가 않소. 그러니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지. 곧 오만의 대병이 황하를 건너 쳐들어 올 것이오. 하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소."


  벽려혼이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기도 모르게 못쓰게된 오른팔을 보았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이 다친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검이 모양도 위치도 바뀌어 반대쪽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검이 바뀌었네요. 어째서?"


  "아, 이건 풍승상이 쓰시던 비류혼도요."


  벽려혼이 태연하게 대꾸하려고 했으나 사비공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갑자기 좌수도법을 쓰시려고? 원래 취운검은 어쩌구요?"


  사비공주는 그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럽게 몸에 붙어있는 것을 눈치챘다.


  "취운검은 낙릉태수에게 하사했소."


  "그럼 단관에게?"


  "아니, 그는 얼마전에 군령을 어겨서 처형했소."


  사비공주는 뭔가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흑천왕이 기주자사가 되어 연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평원성을 지키고 있소."


  벽려혼은 아직 사비공주에게 떳떳하게 셋째 부인을 얻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취운검을 하사받은 낙릉태수는 누구이옵니까?"


  "낙릉태수는 얼마전 고구려에서 온 고청이 새로 되었소. 소수림태왕의 후손이고 치우검법을 나 이상으로 잘 익혀서 취운검이 아주 적격이지. 취운검도 그가 쓰게 되었소."


  "잠깐, 소수림 태왕은 후손이 없는데요?"


  고구려와 가까운 대련반도의 사비성에서 살아온 사비공주였으니 고구려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벽려혼이 대답을 않자 사비공주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하, 그렇군. 딸이 하나 있었지요. 우태왕비를 닮아 빼어난 미인이라고 들었어요"


  사비공주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벽려혼의 얼굴에도 전에 없던 그늘이 드리워졌다.


  "물론 미인이요. 아무튼 곧 만나시게 될거요."


  사비공주는 대답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이놈은 정말이지 새끼줄로 묶어서 허리에 차고 다니지 않으면 꼭 사고를 친다니까.


  "전하, 그건 그렇고 오른팔은 어찌 된 것이지요?"


  "실수로 벼락을 맞았소."


  "벼락을?"


  "."


  그래, 네가 하고 돌아 다니는 짓이 벼락을 맞을 짓이지. 사비공주는 씁쓸했다. 하필이면 재수가 없어서 벼락맞은 놈을 위해서 앞으로 봉사를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점차 벽려혼이 얼마나 아프고 답답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왼쪽 다리를 못써서 반년 동안 백제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벽려혼은 오른팔을 갑자기 못쓰게 되어서 얼마나 답답할 것인지.


  "묘향산에 가서 신수선생에게 한번 보여봐요."


  "글쎄, 이게 수술로 될 것도 아니고 또 바다 건너 묘향산이 너무 멀어서 말이요."


  그때 성루에서 사방의 풍광을 바라보던 낙릉궁주 고청이 낯선 사비공주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내려왔다.


  "누구시더라?"


  "아, 궁주. 이쪽은 백제 사비공주요."


  벽려혼이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소개를 하였다.


  "오라, 그렇군요.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낙릉궁주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출산을 하고 돌아왔어요."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눈싸움을 벌였고 겨우 탐색전인데도 불꽃이 튀었다. 사비공주의 말을 듣자 벽려혼이 물었다.


  "그래, 공주요, 왕자요?"


  사비공주는 낙릉궁주와의 눈싸움을 멈추지 않고 벽려혼에게 말했다.


  "이름은 이설궁이라고 지었는데 왕자지요. 지금 광고성에서 부부인이 돌보고 있지요."


  "이설궁? 그게 무슨 뜻이지?"


  벽려혼은 이설궁을 되뇌었다. 그참 묘한 이름인데 알듯모를듯했다. 벽려혼은 아무튼 이설궁이니 성씨가 벽려씨가 아니라 이씨인 것을 서운해하였다. 낙릉궁주가 그들의 말중에 끼어들었다.


  "부마, 분명 이설궁이라고 했어요. 이미 저 여자는 여비라는 사람과 결혼했고 거기다가 이제는 이씨 아들까지 낳은 확실한 이씨 아낙인데 부마가 딴 마음을 가지는 것은 서로간에 괴로운 일이에요."


  낙릉궁주 생각에 부림까지는 첫부인이니 어쩔 수가 없고 이미 인정했으나 새로 사비공주가 그들 사이에 파고 들어올 틈새는 미리 막아놓으려는 것이었다. 사비공주는 정말로 눈에 불똥이 튀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인데 박힌 돌을 빼려고 들어? 이러다가 정말이지 부림한테도 선수를 뺏겨서 첫부인을 놓쳤는데 이제는 저 고구려 여자에게도 밀려나 셋째 부인으로 처지는 것은 아닌지 부아가 치밀었다. 사비공주는 화제를 돌렸다. 설마 백제 이야기를 하는데 낙릉궁주가 껴들지는 못하겠지.


  "그럼 동모성의 중평제는 어찌하고 계신가요?"


  "그쪽에는 도움을 기대하지 않소."


  "중평제에게 아직 이만의 군사가 남아 있었으니 구원군을 청하시지요. 병사는 많을수록 좋지요."


  벽려혼은 여암과의 분쟁이 다소 있었고 또 여암의 전사로 인하여 동모성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았다.


  "군사 말이 옳소."


  "아참, 동모성에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겠군요."


  사비공주가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고 말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바로 그렇소."


  "제가 동모성에 다녀오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겠소? 동모성에서 백제군 이만이 와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럼 내일 출발토록 하지요."


  사비공주는 벽려혼과 근 일년만에 다시 만나서 더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낙릉궁주가 끼어들었다.


  "전하, 낙릉의 새로운 전각이 거의 지어졌으니 한번 보시지요."


  벽려혼은 갑자기 낙릉궁주에 끌려 내성으로 들어갔다. 사비공주는 그냥 이대로 돌아가고 싶었을 정도로 벽려혼이 야속했다. 잠시후 전령이 와서 사비공주의 거처를 안내하였다. 그러나 벽려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나지 못했다. 낙릉궁주는 결코 벽려혼을 자유롭게 놔주지 않았다. 벽려혼은 낙릉궁주의 질투인 것을 짐작했지만 나무랄 수 없었다. 낙릉궁주가 추파를 던졌다.


  "우리 나무꾼과 선녀놀이 다시 하자."


  "이제는 또 내줄 나무꾼의 도기가 없는데?"


  "괜찮아. 이젠 오색구름 취운검을 타고 천상에 다시 올라간 선녀가 두레박을 내려줄 차례니까. 이제 두레박을 잘 타고 올라와야  돼."


  "두레박? 목부터 채워야겠군."


  낙릉궁주는 계속 벽려혼에게 말을 붙여서 그의 관심이 사비공주에게 가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벽려혼은 잔소리를 듣다가 낙릉궁주의 거소에서 그만 잠이 들었다. 아니 일찍 잠이 든 척을 하여 낙릉궁주가 따라 잠들면 사비공주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벽려혼이 깜박 잠든 사이에 일은 더 크게 벌어졌다. 사비공주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얼마간 벽려혼을 기다렸다. 그러나 종일 말을 달렸으니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때 반갑지 않은 손님이 그녀의 방으로 찾아들었으니 낙릉궁주였다. 낙릉궁주는 사비공주의 침소에 잠입하여 등불을 끄지도 않고 곤히 자는 그녀를 깨웠다. 난데없는 밤손님 때문에 사비공주는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나는 제왕비다."


  그제서 사비공주는 낙릉궁주 고청이 나타난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