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45. 피를 나누는 형제 - 1

금박(金舶) 2015. 10. 29. 08:48


  #45. 피를 나누는 형제 


  벽려혼은 청주성 제왕부 정청에 있는 풍승상을 찾았다. 유명한 의원을 찾아서 오른팔을 고치겠다고 하다가 괜히 불구라고 소문만 나고 병도 고치지 못하면 낭패였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남은 왼손으로 새로이 무기를 잡는 것이 무척 급했다.


  역시 오른팔을 잃은 풍승상의 좌수도법인 벽류도법이 있었으니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것을 익히지 못하면 오른팔이 마비된 벽려혼은 청주 성밖도 제맘대로 나갈 수 없었다. 어떤 누구와 칼을 겨루어도 벽려혼은 서투른 왼손으로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풍승상, 과인이 벽류도법을 시급히 익혀야 하겠소이다. 그러니 비급을 가르쳐 주시구려."


  "전하, 벽류도법을 배우시겠다고요? 전하는 지금도 천하제일의 벽력검을 쓰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좌수도법까지 배워야겠다니 욕심이 많으시군요."


  풍승상은 그의 벽류도법 비급을 벽려혼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좌우쌍검, 좌도우검을 한꺼번에 쓰려고 그럽니다. 아무튼 당장 가르쳐 주십시오."


  "그게 전하의 왼손이 오른손에 오랫동안 눌려서 녹이 쓸었을 것이외다. 그래서 나이들어서 쉽게 배울 수가 없사옵니다."


  "그럼 앞으로 얼마동안은 오른손을 일체 쓰지 않고 모든 생활을 왼손으로만 하겠습니다. 풍승상도 나이 들어서 바른팔을 잃고나서 배우신게 아닙니까?"


  "멀쩡한 오른팔을 가진 전하께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사옵니까?"


  "내일부터는 오른팔을 꽁꽁 붙들어매고 오로지 왼손만 쓰겠습니다."


  벽려혼은 자기 신체가 고장난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좌도법을 배우기 위해서 잘쓰는 오른팔을 싸맸다고 하면 주위 신료들도 눈치채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풍승상은 대견하게 생각하였다.


  "맞습니다. 그래야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오른손으로는 등을 긁을 수 있어도 왼손으로는 등을 긁을 수 없을 만큼 어깨 관절도 이미 많이 굳었을 것입니다."


  벽려혼은 벽력진기로 인해 내공도 손상을 입어서 전신내공의 반을 잃었다. 삼화취정, 오기조원의 경지는 잃었지만 그래도 이갑자 가까운 내공이 몸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왼팔에 힘을 모으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자신하였다.


  "그래서요?"


  "그러니 먼저 바닷물속에 들어가서 관절을 조금씩 꺽어서라도 왼팔을 단련해야 합니다."


  "그럼, 바닷가에서 수련을 해야 하는군요."


  물 속에서 수련하는 것은 이미 치우동에서 [허극정생] 다음의 [정극지만] 수련을 통하여 익숙하였다. 물론 그 당시는 물속에서 오래 있으면서 별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물 속에서 검술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렴요. 낙안성이 좋겠사옵니다. 낙안국 내사 왕구가 역시 벽류도법을 알고 있사옵니다. 요즘 들어서 벽려흥 낙안왕야께 벽류도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함께 배우시면 될 것입니다."


  "그럼 내일 그리로 떠나겠소."


  벽려혼이 말을 마치자 풍승상이 잠깐 생각을 했다. 풍승상은 아직 왕구와 벽려흥이 벽려혼과 친하지 않으니 중간에서 화의를 시켜주려는 것이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사 왕구가  벽려흥을 가리키는 것과 풍사가 전하를 가리키는 벽류도법의 우위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


  "풍승상이 함께 가겠다고?"


  벽려혼은 혼자 다니는게 익숙하였다. 그러나 풍승상은 생각이 달랐다.


  "전하, 전하는 청주 제왕입니다. 그 아래 기주자사, 서주자사, 교주자사를 거느린 4주자사이옵니다. 더 이상 혼자 다니시면 아니되옵니다."


  벽려혼은 혼자 백제, 고구려를 다니며 고생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청주 제왕은 과연 혼자 다닐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가? 그럼 이곳 제왕부 내정은 청주부장 풍운검 장정에게 부탁합시다."


  벽려혼과 풍승상은 광고성에서 멀지않은 낙안성으로 향했다. 낙안국 내사 왕구와 낙안왕 벽려흥은 외조부와 손자로서 모두 바른팔이 없었는데 벽려흥은 권토중래를 노리고 벽류도법에 열심이었다. 벽려혼은 바른팔을 쓰지 못하게  묶어놓은 모습으로 낙안성으로 들어갔다.


  "낙안왕, 그리고 우사, 오랜만이오. 본왕은 뜻한 바가 있어 오늘부터 오른팔을 묶어놓고 부왕이 익혔던 벽류도법을 배우기로 했소이다."


  왕구와 벽려흥, 그리고 풍승상과 벽려혼은 낙안의 바닷가로 나가서 같이 벽류도법을 익혔다. 임시로 청주의 제반 정사는 낙안군의 낙안내사 정청에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보니 사비공주에게 불고궁을 지어주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므로 가까운 북해군 창락성 부근 해안에 새로이 불고궁도 짓도록 지시하였다.

 

  벽류도법은 오로지 왼손으로 시전하는 것이라 낯설고 또 검보다 무거운 도를 사용하는 것인데 무거운 도로서 가벼운 검을 이기려면 검 못지 않게 빠른 쾌도법을 익혀야 하니 배우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른팔이 이미 망가졌는데 하루라도 빨리 배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장 이를 악물고 서둘러 배우지 않으면 그의 목숨이 적들로 인하여 바람앞에 촛불이었다. 벽려혼은 바른팔을 어깨에서부터 싸매어 몸에 붙여두고 왼손만으로 도법을 익혀나갔다.


  "전하, 이 벽류도법은 흐르는 폭포수처럼 끊이지 않는 것이옵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되풀이됩니다. 구결만 보아도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첫초식은 [풍천소축(風天小畜)] 바람이 하늘을 걷어올리고, 둘째 초식은 [천뢰무망(天雷无?)] 하늘이 벼락을 내리고, 셋째는 [뇌산소과(雷山小過)], 벼락이 산을 깎는다. 이 세 초식으로서 한 순환을 이룹니다. 그래서 결판이 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두 번째 순환으로 들어가는데 [뇌산소과]에 이어서 넷째 초식인 [산천대축(山天?畜)] 산이 하늘을 바치고, 다섯째 초식인 [천화동인(天火同人)] 하늘이 불을 피우고, 여섯째 초식인 [화뢰서합(火雷?)] 불과 벼락이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일곱 번째 초식인 [뇌택귀매(雷澤歸?)] 벼락이 연못 속으로 소용돌이 치고, 여덟 번째 초식인 [택풍대과(澤風?過)], 연못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고 들어가고 거기까지가 두 번째 순환이옵니다. 두 순환에서 결판이 안나면 다시 첫초식인 [풍천소축]으로 들어가는데 우습게도 이  두 번째 돌아오는 첫번째 초식이 적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살초식이며 첫초식이자 아홉째 초식이옵니다. 적들이 어려운 두 번째 순환의 여러 가지 변환 공격에 빠져들었다가 가장 간단한 풍천소축 첫초식을 다시 맞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법이지요. 그 오묘한 이치는 정말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니 첫째초식이자 아홉째 초식인 이 [풍천소축] 하나를 익히는데 가장 진력하여야 하옵니다."


  벽려혼은 풍승상의 지시대로 [풍천소축]을 시전하였다. 좋은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것은 아무래도 혼자 배우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벽려혼의 [풍천소축]은 약한 파도에도 꺽어져 밀려들어오는 도신이어서 별 위력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풍승상이 장탄식을 하였다.


  "이런, 쯧쯧"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벽려혼이 자세가 틀린 줄 알고서 물으니 풍승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께서 그리 크게 다치신 줄은 몰랐습니다. 전에 보던 내공이 채 반도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풍승상은 벽려혼의 도법에 실린 내공이 본신내공의 반도 되지 못하는 것을 눈치챘다. 치우권각법을 쓰는 데에는 그 정도의 내공이면 되지만 그것도 반쪽 공격이고 더욱이 전장터에서 많은 적을 상대하는데 살상을 쉽게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검법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었다. 벽려혼은 화급히 둘러댔다.


  "처음으로 왼손을 쓰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벽려흥의 눈빛이 빛났다. 벽려혼만 없어지면 청주 제왕은 벽려울의 피를 이어받은 벽려흥의 차지였다. 다른 사람이 벽려혼을 암살한다면  그것은 반역이 되지만 벽려흥이 직접 해치운다면 그 자체로 새로운 청주 제왕의 등극이었다. 벽려흥은 오로지 벽려혼의 부상 정도가 관심사였다.


  "전하께서 다치셨습니까? 언제 어디서요?"


  벽려혼은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너나 열심히 익혀라."


  벽려혼은 벽려흥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도검을 들고 그대로 파도 속으로 들어가서 파도를 걷어올렸다. 벽려혼이 오른팔을 묶어매고 있지만 단지 그런다고 내공이 약해질 리는 없고 풍승상은 벽려혼이 오른팔에 큰 이상이 생긴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물어봐야 괴로운 이야기일 것이라서 풍승상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벽류도법을 전수하는데만 전념하였다.


  "도(刀)라는 게 검과 달라서 날이 한쪽 뿐이옵니다. 검이 비록 양날이나 적을 베는 것은 결국 한쪽 날이옵니다. 도로서는 처음부터 오로지 한쪽 날에만 집중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검보다 잡념이 적고 더 빠를 수가 있습니다."


  "."


  벽려혼은 오묘한 검리에 집중하였다. 도라는 것은 검보다 무겁다. 따라서 발검은 늦고 검의 빠름에 도가 제압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도는 무겁다. 그래서 검을 묵직한 힘으로 퉁겨낼 수가 있다. 그러나 무거운 도검을 검처럼 빠르게 쓸 수 있어야만 비로소 최고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좌수도법의 장점은 좌수가 우수보다 느린 것 같지만 좌수 속에는 타고난 선천적인 힘이 숨어 있어서 그것을 살려내면 오른손 보다 더 빠르게 쓸 수가 있사옵니다."


  "정말요?"


  벽려혼은 왼손이 오른손보다 힘이 세다고 하는 것이 위안이었다.


  "그것을 보통 사람들은 오른팔만 쓰니까 왼손이 약해져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손을 못 쓸 때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저도 양손이 멀쩡할 때에는 비류도법을 익히기가 어려워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른손을 못쓰게 되어서 비류도법을 익히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정신이 왼팔 하나로만 집중되어서 더 쉽더라구요. 그런데 지금 전하는 벽류도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호기이옵니다. 오른손이 낫기만 하면 그때는 천하무적이지요." 


  풍승상이 위로하는 말이었는데 벽려혼은 그냥 입술만 꽉 깨물고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오른팔을 잃고 벽려혼은 자기도 모르게 말수가 줄었다. 우울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