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38. 명의를 찾아서 - 2

금박(金舶) 2015. 10. 1. 07:44


  "그거야 늘 제가 밤이면 밤마다 맡아서 기꺼이 기쁘게 하는 일이지요. 하룻밤에 명도전 하나를 시주하시면 육보시(肉布施)를 해드립니다."


  육보시란 불가의 말로서 여자의 몸을 바치는 것을 말했다. 땡승들이 시주를 받으러 인가에 왔다가 인가 아낙이 부처님께 아무것도 바칠 것이 없어서 몸을 바치면 그것이 육보시였다. 사비공주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를 하룻밤 수청드는 여자로 모욕하다니, 내가 아예 오십전짜리 값싼 창녀라고 하면 네 얼굴빛이 어떻게 변하나 보자. 벽려혼은 육보시라는 말을 듣자 어안이 없었다. 사비공주가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창녀처럼 살아올 리는 없고 결국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기가 늘 달고 다니는 취운검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대신에 장천왕의 쓸데없는 호의로 그 팔척 장창 때문에 모든게 탄로가 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아무튼 사비공주의 그만한 반격으로 말싸움에 질 벽려혼이 아니었다.


  "그것 참 잘됐소. 나로 말하면 떼부자요. 마라난타 대사님, 명도전(중국의 철전) 하나래야 고작 오십전이고 오백전이면 고작 황금 한냥이니 내가 황금 삼십냥을 내면 삼백일동안 저 비구니의 육보시를 매일매일 쉬지않고 받을 것이고 그만하면 내 대(代)를 이을 것 같소이다. 하지만 황금 오십냥을 시주금으로 낼 터이니 대사가 어서 황금을 받으시고 방금 저 비구니가 한 말에 증인이 되어 주시오."


  마라난타 대사가 옆에서 듣기 매우 민망하였다. 승방에서 육보시라니. 고승의 귀를 그런 더러운 말로 어지럽히면 벌받는다, 이 빌어먹을 년놈들아. 아무튼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서로 너무나 잘 아는 말투라서 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두 분이 알아서들 하시오."


  "아닙니다, 대사. 나와 저 여자의 결혼을 주관하시지요."


  벽려혼이 마라난타 대사의 가사를 붙들자 대사가 뿌리쳤다.


  "이미 부처님의 여자인 비구니를 훔쳐가면서 나보고 공범을 하라지는 마시오. 그냥 나는 못본 것으로 하겠소."


  "아무튼 황금 오십냥의 시주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 비구니가 나한테 두 번 다시 딴 말을 못하지요."


  마라난타 대사는 황금 백냥이 탐이 나기도 했다. 새로 즉위한 흥평제는 불교에 별 관심이 없어서 현재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황금 오십냥 그것이면 웬만한 금불상 하나를 만들어서 법전에 안치할 수 있다. 그래서 사비공주에게 물었다.


  "공주, 내가 저 적시주에게 황금 오십냥을 받아도 되겠소?"


  사비공주는 앉은 자리에서 어느새 한 여자로 돌아가서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거기에는 머리카락이 없었다. 빡빡 깎은 머리에 손이 스칠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던 사비공주였다. 그녀는 마라난타 대사가 황금 오십 냥을 필요로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동안 마라난타 대사가 그녀의 목숨을 지켜주고 오늘까지 보호해준 보답도 있어야 했다.


  "명색이 중국 태산에서 산적하던 놈이 겨우 황금 오십냥? 그 주제에 태산에서 산적했다 소리를 할 수 있냐? 황금 백냥을 시주하지 않으면 난 절대로 안 따라간다."


  벽려혼은 장약 덕분에 황금 천냥을 벌은 적도 있어서 황금 백냥이 아깝지 않았다.


  "들으셨죠? 대사님, 지금 제 주머니에 황금 백냥이 없습니다만 오늘 자정에 매루성 나루터로 나오시면 버드나무 위에 궤짝이 걸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 여자와 나의 결합을 축원해 주십시오.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게 말입니다."


  "그래도 됩니까? 공주?"


  마라난타 대사가 벽려혼이 의심스러워서 다시 묻자 사비공주가 응낙하였다.


  "대사님 뜻대로 하세요. 저야 어차피 다리 병신이라서 저 산적놈이 날 들쳐 업고 가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갑니다. 그러니 소 잃고 오양간 고치지 말고 소값을 미리 두둑하게 챙겨 두시는게 이익이죠."


  마라난타 대사가 그녀의 답변을 듣고 희색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사비공주는 다시 연금에서 벗어나서 또 정인을 만나서 따라가니 좋고 대사는 금불상을 만들 수 있어서 서로 좋은 것이었다. 마라난타 대사는 사비공주를 살린 것이 황금 백냥이라는 큰 시주로 보상받게 되었다.


  "그럼 두타사 대웅본전의 금불상이 만들어지는 대로 두 분의 자손이 대대손손 번성하기를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매일 새벽 예불 시간마다 부처님께 빌도록 하지요."


  마라난타의 축원에 사비공주가 모처럼 웃음을 띠었다.


  "내 자손이 한산성의 주인이 되도록 빌어 주세요."


  그것은 사비공주의 아들이 백제 제황이 되도록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벽려혼은 시주를  더 하고 싶어졌다.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확실한 약속이 아닌가? 마라난타 대사는 무릎을 쳤다.


  "아하, 그런 소원이 있었군요. 무릇 제왕지재는 따로 있는 법인데 그동안 공주께서 직접 공을 들이신 것도 있으니 어렵지 않겠지요. 빈승도 꼭 그렇게 되도록 부처님께 빌어드리겠습니다." 

  

  날이 어둡자 백제 병졸들이 식사하기 위해 절 뒤 편으로 가버린 사이에 벽려혼은 행동을 개시했다. 벽려혼은 그녀의 엉덩이를 취운검으로 받쳐서 등에 업고서 승방 밖으로 나와 뛰었다.


  "가자."


  그러나 장천왕과는 서로 말이 필요 없었다. 불기산 아래에서 같이 도둑질을 한두번 해본 것이 아니라 척하면 척이었다. 장천왕은 이 벽려혼도 한때 좀도둑질을 많이 했던 것으로 짐작하였다. 자기가 직접 가리킨 것은 모르고. 사비공주는 벽려혼이 달리자 그의 목을 붙들었다. 벽려혼은 달리다가 숨을 몰아 쉬었다.


  "목이 졸려. 더 아래를 잡아."


  벽려혼은 그의 겨드랑이 날개, 치우손을 위로 올려 그녀의 손에 대었다.


  "이럴 때 쓰는 손잡이야. 꽉 잡아."


  벽려혼은 사비공주를 뒤에 매달고 두타사 공사장의 얕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공사장 입구는 사비공주를 감시하는 백제 초병들이 지키기 때문이었다. 대성산성 성문이 아직 닫혀져 있지 않아서 그대로 뚫고 나아갔다. 벽려혼보다 장천왕이 앞으로 나아갔다. 백제 병사들이 처음에는 별일 아닌 줄 알았다가 장천왕이 팔척 장창으로 휘두르며 공격하자 대성산성 성문앞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사이에 벽려혼은 성문을 빠져나와 안학궁을 지나서 나루터로 뛰었다. 뒤이어서 장천왕도 대성산성 정문을 닫아서 막아버리고 성큼성큼 달려서 목선으로 향했다. 대성산성에는 백제 군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성문 앞이 피바다가 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모두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벽려혼은 마침내 그가 타고 온 목선에 다시 돌아와서 선실에 들어갔다.


  "부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을 꼭 지켜야 돼."


  벽려혼이 그녀를 내려놓기 전에 재차 다짐을 하였는데 업혀있는 사비공주는 말이 없었다. 뭘 새삼스럽게 맹세를 지키나, 이미 임신 중인데. 그녀는 지난 겨울 그 춥던 대한날에 눈과 얼음 위에 구르면서 벽려혼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벽려혼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는데 그만 왼쪽 다리가 건드려져서 사비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아야, 일부러 그랬지?"


  "아니, 아직도 아파?"


  벽려혼이 미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놈의 진가모 자식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 뒤에서 찔려서 슬개뼈 아래에 붙은 힘줄이 다 끊어졌어."


  사비공주가 한탄을 하였다.


  "저런 그럼 명의를 찾아서 빨리 치료해야 할텐데. 아니면 영원히 불구가 될거야."


  벽려혼이 그녀의 다리를 걱정하자 사비공주도 이제야 자신의 다리 문제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한산왕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그녀 다리만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맞아. 내가 정말로 불구가 되기 전에 치료를 받으러 가야 되는데."


  "어디로 가야 되는데?"


  사비공주가 그제서 명의를 생각해 내었다.


  "묘향산 꼭대기에 신의가 숨어 있어. 일단 한수(대동강)를 거꾸로 올라가서 철옹성(맹산) 앞에서 배를 내려서 비로봉을 넘어가면 묘향산 신수선생이 사는 곳이 나와."


  벽려혼은 당장 백제를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기를 놓쳐서 사비공주가 불구가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러지 뭐.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신의야?"


  "화타, 편작 못지 않아. 신수선생(神手先生)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가면 수술을 해서 고쳐줄 수 있을거야."


  "알았어, 밖에 나가서 병사들에게 그리로 가라구 하지."


  벽려혼이 선실 밖으로 나가서 장천왕에게 황금 궤짝을 남기도록 했다. 장천왕은 마라난타 대사와 약속한 대로 황금 백냥 짜리 작은 궤짝을 매루성 앞 나루터 버드나무 위에 숨겨놓았다. 뒤이어서 목선의 수군 병사들에게 한수(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라고 이르고 다시 선실로 들어오니 사비공주는 어느새 잠에 빠졌다. 벽려혼을 만난 그 순간부터 너무 긴장하였다가 이제 두 달만에 포로에서 벗어나니 사비공주는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 또 뱃속의 아이가 커가면서 자주 졸립기도 하였다. 벽려혼은 침대가 좁지만 그녀의 옆에 드러누워서 그녀를 끌어안고 같이 누웠는데 강물 위에서 배가 흔들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 되어 선실에 여명이 비쳐들었다. 사비공주가 잠에서 깨어나니 벽려혼이 옆에서 하얀 구레나룻을 그녀의 이마에 붙이고 잠들어 있었다. 사비공주는 세상 만사가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결국 중국 땅에서 나를 구하러 여기까지 올사람은 너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왜 이제야 온 것이지? 사비공주는 불현듯 성질이 돋아서 벽려혼을 흔들어 깨웠다. 첫마디 시작은 바가지로 하자. 약간의 바가지로 남자들을 항상 정신차리고 긴장시켜서 부인을 공경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평생 무시받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또 옆에 뻔뻔스럽게 누워 있어?"


  "우리 약혼했잖아."


  벽려혼이 징그럽게 웃자 사비공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안돼, 나가."


  "싫어, 내 침대야."


  그러나 사비공주는 그와의 동침을 거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고소의 군막에서 경험하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녀는 부처님 앞에서 황금 백냥에 벽려혼에게 팔린 몸이었다. 벽려혼이 웃으며 그녀의 입술로 다가들었다. 이러자고 깨운 것이 아닌데 괜히 잠자는 사자를 건드려 깨웠나? 사비공주는 어느새 후회했다. 동시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어루만지고 동시에 다리 사이에도 손이 들어왔다. 양동작전이었다. 위에 두 손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는데 천잠사로 만들어진 치우손이고 아래 두 손은 그 본래의 털보손이었다.


  사비공주는 한수의 강물이 출렁이는 가락에 몸을 맡겼다. 파도가 너울치는 대로 배가 널뛰었고 그의 삿대는 그 가락에 맞추어서 그녀의 해저 밑바닥을 깊이도, 얕게도 긁었다. 그리고 또하나 그녀의 뱃속에서 혼자 파도치는 태아가 있었는데 벽려혼은 경험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전에 느낄수 없던 무엇이 배와 배 사이에 있기는 한데.


  벽려혼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실을 나가 뱃고물로 향했다. 사비공주는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나른한 것이 기분좋았다. 뭔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을 확인한 것처럼 머리가 개운해졌다. 괜히 깨웠다는 후회는 어디로 가버리고 없었다. 그녀는 바가지의 새로운 용도를 알게 되었다. 음, 부인을 공경하는 것을 쉴새없이 가르쳐야 돼. 사비공주가 뒤쳐져서 일어나 한발로 다니면서 선실에서 승복을 벗고 옷을 갈아 입었다. 벽려혼의 새옷을 꺼내 입고 벽려혼을 따라 나가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벽려혼이 다시 들어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안아 들고서 선미로 나갔다. 선미는 요동이 덜하였다. 장천왕이 따라와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 사비공주가 벽려혼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벽려혼, 언제까지 이렇게 안고 있을거야?"


  "내려줘?"


  벽려혼이 그녀를 내려놓으니 그녀는 한발로 서서 그에게 기대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한발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기는 힘들고, 장천왕이 보지만 않는다면 다시 업고 서라고 말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