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비구니가 된 사비공주 - 3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나 희노인이 고개를 떨구면서 사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나가는 것이 어딘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잠간, 희노."
벽려혼이 다시 희노인을 불러세웠다.
"왜그러십니까?"
"과인한테 뭔가 감추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구만."
벽려혼이 넘겨 짚으면서 희노인을 살폈다.
"전혀 없습니다."
희노인이 잡아뗐지만 그가 무엇인가 감추지 않았다면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벽려혼은 그게 무엇일까 머리를 쓰다가 다시 물었다.
"청주사마의 부탁으로 벌써 점을 쳐보았다고 했나? 공천왕이 언제 희노에게 점을 쳤는가?"
"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천왕이 나보다 먼저 소식을 알고 있었군.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안했지? 고얀 사람같으니."
벽려혼은 공천왕이 사비공주 소식을 알고도 자신한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왜 나를 바보로 만들지? 공천왕은 나를 아직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가 한참 고민하면서 희노를 계속 붙들고 있으니 희노가 스스로 자백하였다.
"사실은 공천왕이 한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벽려전하께서 사비공주를 구하러 본토로 갈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친 것이었습니다."
벽려혼은 비로소 깨달았다. 흥, 내가 당장 백제로 뛰어갈까봐서 보고를 안했다는 말이군. 고얀 것들. 감히 주군을 능멸하려들다니.
"그래, 결과는?"
"수화기제라는 괘가 뽑혀져 나왔습니다. 흉(凶)하지요."
흉하다는 말 앞에 벽려혼은 얼굴이 굳어졌다.
"뭐가 어떻게 흉하지?"
희노인은 흉괘를 말하자니 조심스러웠다.
"만일 전하께서 백제로 가신다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실물(失物) 수가 있고, 아마 바닷길이 머니까 되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건이 사람보다 중한가?"
벽려혼이 물건을 잃더라도 떠나겠다는 의향을 보이니 희노인이 질색을 하였다.
"사람보다 중한 물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복잡한 여난(女難)의 수가 있습니다. 주색에 빠지고 물건도 잃고 그럴 바에는 백제로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 전하께서 가시지 않아도 찾는 사람은 스스로 돌아올 것입니다."
벽려혼은 사비공주만 구하면 실물도 아깝지 않고 또 그녀와의 맹세가 있는데 무슨 여난이 더 있을 것이 있나 싶었다.
"그것이 희노의 충고겠지."
"그렇습니다. 가시면 안됩니다."
희노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래, 하지만 공천왕은 왜 그 점을 보았는가?"
벽려혼은 공천왕의 속셈이 알고 싶었다.
"제가 사비공주의 점괘를 말씀드리자 사마께서는 전하께서 곧 갈것 같다면서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점을 뽑아보기로 하였죠. 그랬더니 이렇게 흉한 괘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흉한 괘가 나오면 말입니다. 저는 양식있는 전하이면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니 당연히 흉괘를 알고 나면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안가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먼."
"그런데도 공천왕은 필경 전하께서 군사를 찾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소인과 내기를 하였습니다. 소인은 전하께서 이성이 있는 분이니 결코 신중치 못한 행동은 안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사비공주님은 가만이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 스스로 돌아올 분입니다. 그런데도 설마 가시겠습니까?"
벽려혼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점이 흉하면 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제왕의 왕도인가? 벽려혼은 다시 물었다.
"내가 잃는다는 실물이 혹시 제왕의 왕위인가?"
"그럴 수도 있지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까지도 감안을 하십시오. 하지만 실물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니 아무래도 제왕위가 아니라 물건이겠지요."
지금 청주성에는 여암이 먼저 들어와 쉬고 있고 뒤를 이어서 그의 2만 군대가 청주성으로 행군해서 오고 있다. 그의 대방군은 청주성을 지나 남피성으로 가기로 되어 있지만 벽려혼이 청주성을 비운 새에 여암이 2만 군대로서 입성하여 차지해버리고, 그의 본래 청주 병사들은 황하 서쪽으로 내몰아 버린다면 벽려혼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만다. 비록 점괘에서는 벽려혼이 제왕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점괘보다 중요한 것이 현실 정세였다. 현실적인 위험을 무시하고 점괘만 믿는 제왕도 바보일 것이다. 벽려혼은 계속해서 여난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럼 여난(女難)은 사비공주로 인한 것이겠는가? 군사가 계속 내 속을 썩힌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여난이 아니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여자가 다가와서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벽려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약이 말했었지. 다시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내가 그 말만 믿고 따르면 또 무슨 여난이 또 있겠는가? 실물수라는 것도 내가 다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매일 잠자기 전에 주머니에 여비가 두둑한지만 보면 되지. 없어졌으면 나가서 찾으면 되고. 설령 못 찾는다고 해도 제왕인데 그게 무엇인들 다시 얻지 못할 것인가? 벽려혼은 청주사마 공천왕을 불렀다. 공천왕은 들어오자마자 희노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사태인지 짐작하였다.
"전하, 설마 백제로 가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흥, 내가 가야 공천왕이 내기에서 이기지 않는가?"
벽려혼이 핀잔을 주었다. 공천왕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기는 내기고 제가 실제 바라는 것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내기까지 해놓고 내기에서 이기자고 가시라고 충동질했다는 오해를 희노에게 받을까봐서 참았지요."
벽려혼은 어두운 밤하늘을 내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마, 나는 갈 것이야. 나한테 좀 불길하다고 해도 갈 것이야. 사비공주를 되찾기 위해서."
희노가 대뜸 반박을 하였다.
"전하, 전하께서 가시지 않아도 사비공주는 스스로 돌아옵니다. 여기 자칭 공공문의 장문인이라는 공천왕을 대신 보내셔도 좋구요. 가서 공주 하나 훔쳐오는 것쯤이야 공천왕도 잘하지요."
그러나 벽려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가도 불길한 길을 공천왕이 가면 불길하지 않겠나? 나 대신 공천왕을 고생시키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해도 꼭 직접 가시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희노가 다시 묻자 공천왕이 대신 대답했다.
"그건 말이야, 사비공주가 언제고 육신은 살아서 청주까지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그때는 전하의 여자가 아닌 것이야. 전하는 직접 가서 사비공주의 마음을 훔쳐오고 싶은 것이야."
벽려혼이 웃었다.
"바로 맞았어. 나는 바로 사비공주의 마음을 가져오고 싶어. 공천왕이 어찌 그리 내 맘을 다 잘 알지?"
벽려혼은 지난 연초에 장영이 그의 본색을 의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공천왕도 마찬가지로 의심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벽려혼의 물음에 공천왕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였다.
"제가 전하의 심기를 어찌 알겠습니까만은 전에 제가 기르던 여비라는 아이와 성정이 비슷하셔서 짐작한 것 뿐이지요."
공천왕은 말을 하다가보니 과연 죽은 여비와 벽려혼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보면 닮았고 또 한편으로 보면 전혀 아니었다. 벽려혼의 흰수염은 여비보다 두배는 더 늙어보이게 한 것이었다. 아무튼 공천왕은 사비공주가 위험에 빠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누군가 구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비가 살아 있다면 당연히 조강지처를 찾아나설 것인데 벽려혼에게는 조강지처는 아니지만 그만큼 사비공주에게 정이 있어 보였다.
공천왕은 일전에 궁금해서 희노에게 소천왕 여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점을 쳐달라고 했는데 희노는 여비의 점을 쳐주지 않았다. 그의 사주를 모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공천왕이 기억하고 있던 여비의 사주를 가르쳐주었다. 이미 여비의 사주, 무진년 병진월 무진일 병진시의 점괘를 다 알고 있었던 희노이지만 다시 점을 쳐주는 연극을 하면서 여비가 점괘대로만 산다면 80까지 살 사람이라고 했다. 절대로 죽을 사람 아니니 지금 어딘가 살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