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37. 비구니가 된 사비공주 - 1

금박(金舶) 2015. 9. 23. 14:14


  #37. 비구니가 된 사비공주


  사비공주는 이 자리에서 한산왕을 찔러 죽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리되면 자신도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한산왕을 죽이는 것이 비록 자신의 임무였지만 한산왕과는 어려서 친구처럼 자란 사이이기도 했다. 사비공주는 한산왕을 제압하고 대세를 장악할 수 있으면 한산왕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흥평제가 시간을 벌려고 하였다.


  "사비공주, 짐은 너를 아직 동생으로 생각하고 불러들였고 또한 너의 무장을 그냥 두었는데 나를 기습하다니. 이제 나를 어쩔 것이냐?"


  흥평제가 사비공주에게 물으니 사비공주가  밤새 준비한 생각을 밝혔다.


  "먼저 아화 황태자를 복위시켜야지요. 동궁에 갇혀있는 아화황태자와 훈해황자, 전지황자를 불러오시오. 그리고 문무백관을 다시 이 자리에 모으고 아화황태자를 다시 옹립한다는 교시를 내리시오."


  사비공주가 다그쳤으나 흥평제는 계속 시간을 끌었다.


  "흥, 네가 비록 지금은 칼자루를 잡았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이 네 맘대로 될 것같으냐?"


  "당장 황태자를 부르시오."


  사비공주는 더욱 검끝을 조여들었다.


  "폐황태자를 불러와라."


  흥평제황이 마침내 굴복하자 금위군에서 두 사람이 서궁으로 뛰어가 아화 황태자를 찾으러갔다. 사비공주는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문무백관도 어서 다 들라 하여라."


  진가모(眞嘉謨)는 이 뜻박의 사태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정사였다. 사비공주가 실패하면 자신도 죽는다. 사비공주가 성공하면 그 공은 사비공주의 것이다. 그는 지금 어느 쪽으로든 행동하는 것이 필요했다. 가만 있으면 중간이나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진가모가 앞으로 나아가며 금위군에게 말했다.


  "모두 사비공주의 말씀을 들었느냐? 문무백관도 즉시 들라하여라."


  진가모는 어느새 장검을 뽑았다. 금위군들이 그의 말을 따라서 몇 명이 또 문무백관을 소집하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매부인 흥평제의 등극을 바랬지만 이 자리에서 사비공주와 맞서다가는 자기 목숨이 먼저 위태로왔다. 사비공주에게 검술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가모도 알았다. 흥평제는 살릴지언정 자기가 죽는다면 진가모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진가모도 흥평제황의 앞으로 가서 그의 가슴에 칼을 대었다. 사비공주는 혼자 단독으로 감행할 때보다 진가모가 옆에서 거들고 도와주니 더욱 안심이 되었다. 흥평제가 진가모를 노려보았다.


  "가모. 처남마저도?"


  진가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황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하늘이 내는 것이외다."


  흥평제가 그 말을 듣고 체념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럼 당장 짐을 죽여라. 그리고 중궁으로 가서 네 누이도 같이 죽여라."


  사비공주가 호통을 쳤다.


  "입 닥쳐라. 반역자. 너는 중국으로 보내서 중평제의 처결을 받도록 할 것이다."


  잠시후 8살이 된 아화황태자가 동생왕들과 함께 후원에 나타났다. 사비공주는 홍학검을 흥평제황의 목에 댄 채로 아화황태자에게 목례를 하였다. 그러자 진가모가 먼저 황태자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정식으로 예를 올렸다. 그는 흥평제의 가슴에서 칼을 거두어 두 손에 모으고 아화 황태자에게 무릎을 꿇고 검례를 취했다.


  "황태자님, 부황께서 저희를 보내서 왔습니다."


  "."


  황태자는 아직 어려서 얼떨떨하였다. 아화황태자는 폐황태자가 되어 서궁에 갇힌 뒤로 신하들의 인사를 받아본지 오래였다. 잠시후 진가모는 다시 장검을 흥평제의 가슴에 겨누었다.


  "공주도 황태자께 예를 올리시오."


  진가모가 말하자 사비공주도 흥평제의 목에 대었던 칼을 거두어 두 손에 모으고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아화황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사비공주가 황태자를 뵈옵니다."


  바로 그때 진가모는 흥평제황의 가슴을 누르던 검끝을 수평으로 돌려서 아화황태자에게 고개숙인 사비공주의 왼쪽 다리 무릎을 뒤에서 찔렀다. 순간적인 진가모의 기습에 사비공주는 힘을 주어 서있던 왼쪽 다리가 허물어지면서 그대로 정경전 후원 마당에 앞으로 넘어졌다. 어느새 흥평제황의 금위군들이 쓰러진 사비공주를 에워쌌다. 진가모는 사비공주가 흥평제황을 죽이게 되면 사비공주는 물론 자신까지도 안학궁에서 능지처참될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흥평제황을 구하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흥평제황을 위협하는 사비공주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칼을 뽑아서 흥평제를 위협하는 것처럼 연극을 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흥평제황의 처남으로서 한산왕이 백제 제황이 되어야 중평제황 치세보다 높이 출세할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진가모가 순간적으로 칼을 돌려 사비공주를 제압하게 되자 흥평제가 진가모의 어깨를 두드리고 칭찬하였다.


  "가모, 역시 너로구나. 처남은 역시 처남이지. 짐도 네가 정말 나를 찌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연극이었어. 아주 잘했다. 이래서 역사는 다시 올바로 쓰여지게 되는거야."


  쓰러진 사비공주를 금위군들이 팔을 묶고 일으켜 세우자 흥평제황이 말했다.


 "고얀 계집같으니라구. 오늘 저녁 횃불을 밝히고 남문 대로 앞에서 참수하여 네 목을 중국으로 보내주마. 당장 하옥하라."


  왼쪽 무릎이 검에 찔려서 걷지 못하는 사비공주는 금위군 병사들에 의해 발을 질질 끌리면서 안학궁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흥평제가 껄껄 웃었다.


  "가모야,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진가모는 꿇어 업드렸다.


  "제황, 저는 제황의 처남입니다. 그 이상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대륙에서는 동래태수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습니다만."


  진가모가 짐짓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흥평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너에게 동래태수보다 높은 자리를 줄 것이다. 오늘 그대에게 조선왕의 작위를 내리겠다. 이제 조선왕의 모든 땅과 노예와 기타 재물은 모두 너의 것이다. 거기다가 또 때가 되면 너에게 더 큰 중임을 맡길 것이다. 고구려 정벌 원정군이 편성되면 너를 상장군으로 임명할 것이다."


  진가모는 결국 원하던 것을 가졌다. 부왕인 조선왕 진명이 죽기도 전에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진 것이 되었다. 누이좋고 매부좋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진가모는 하마터면 의로운 죽음을 선택할 뻔했다가 부왕 진명의 충고를 깊이 새겨서 죽음 대신에 부귀영화를 택했다.


  그날 저녁 안학궁 남문 앞에서 사비공주의 사형식이 준비되었다. 성문 앞에 처형대를 만들고 그 위에 사비공주가 산발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수백 명의 금위병과 한나절 동안 사형 소문을 들은 수만의 군중들이 모여들어서 사비공주의 형집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군중들의 술렁임은 사비공주에 대해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선황제의 신하로서 충신이고, 또 백제 어하라 사비성의 공주로서 소서노의 맥을 이은 그녀는 수많은 백제 여인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목이 베인다고 하니 백제의 백성들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평제는 직접 사형 집행을 보기 위해 성루에서 보는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누대까지 걸어나왔다. 흥평제도 이 저녁에 밥숟갈을 놓고 성문 앞에 모여든 백성들의 불만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누대에 올라 그의 엄청난 자비심을 보이고저 했다.


  "사비공주, 이제라도 전비를 뉘우치고 짐에게 충성한다면 짐은 그대를 살려줄 수 있다. 아직 짐은 아화폐황태자도 무사히 보호하고 있다. 짐이 원하는 것은 피가 아니라 평화니라."


  흥평제는 사비공주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거절할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연극을 한 것이었다. 할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또 그의 자비심, 포용력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비공주의 마지막 말이 이어졌다.


  "패장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다만 네가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권력이고 그래서 중평제황을 배신했고 그 배신자의 말로는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내가 죽어서라도 보여주겠다."


  그녀의 저항에 주위에 몰려들었던 수많은 백제인들이 술렁거렸다. 바로 그때 대성산에서 내려온 호승 마라난타가 목탁을 치면서 사형대에 올라왔다.


  "나무아비타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마라난타 대사, 대사가 여기는 무슨 일이오?"


  흥평제가 홀연히 나타난 마라난타를 보고 의아해 하였다.


  "관세음보살. 폐하, 동서고금의 현명한 군주는 충신을 죽이지 않사옵니다. 비록 남을 위한 충신이어도 그 절개를 높이 사서 귀양을 보낼지언정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부디 현명한 군주가 되시옵소서."


  흥평제는 국사인 마라난타 대사도 당장 목을 베고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데 마라난타 대사마저도 내칠 수는 없었다. 마라난타 대사도 다른 자리에서는 이런 말을 꺼내보아야 흥평제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이 자리이기 때문에 흥평제가 체면을 지키자면 마라난타의 주청이 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뛰어든 것이다.


  "폐하, 성군이 되고저 하면 많이 참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폐하는 폐황태자도 보호하시고 전고에 없는 성군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자도 아닌 아녀자를 죽여서 이제까지의 위명에 누가 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흥평제는 더 이상 설법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만 뒤로 돌아서서 금위군에게 마라난타를 끌어내리라고 신호했다.


  "어흠. 대사가 나설 일이 아니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