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깨어진 맹세 - 3
"그야 그렇지. 그런데 말이다, 갑자기 사비공주를 부사로서 같이 딸려 보내는 것이 무슨 연유일까?"
"그게 어때서요? 혼자 가는 것보다 사비공주와 간다니까 기분이 좋은데."
조선왕 진명은 철없는 진가모의 대답을 듣고서 역시 이야기를 잘 꺼낸 것으로 생각되었다. 진가모가 아직 눈치를 못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사비공주가 부사이지만 너 모르게 제황으로부터 혹시 밀명이라도 받았다면 어쩔 것이냐?"
"밀명이라뇨? 무슨 밀명?"
조선왕 진명은 혀를 찼다.
"쯧쯧쯧"
그제서 진가모가 스스로 뒤통수를 쳤다.
"그럼 혹시 암살 지령 말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그걸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느냐? 그러니 혹시 모르니 처신을 잘해라. 실수하면 너는 결코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진가모는 이게 평범하게 회유사자로 다녀오는 것이 아니고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어려운 자객의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살아야 한다. 살 길이 없을까? 살 길이야 왜 없겠나?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지. 다음날 아침, 정월 초이틀이었다. 사비공주는 밤새 행장을 꾸렸지만 너무 급작스런 출발이고 내키지 않는 본국행이라 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청주의 나루터에 사대천왕이 나와서 사비공주를 전송하였다. 그러나 혹시하고 기대하던 벽려혼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화가난 벽려혼은 이미 밤새 말을 달려서 청주성에 가까이 이르러 있었으니. 어젯밤 화를 내며 떠나버린 벽려혼이 서운도 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한동안은 그의 군사였는데 그가 나와보지도 않다니. 벽려혼은 여자에 대한 정이 눈꼽만큼도 없단 말인가? 얼마뒤 조선왕 진명과 그의 아들 진가모가 나타나서 진가모가 배 위에 오르자 배는 곧 출발하였다. 목선 안에는 작은 선실이 세 개에 큰 선실이 둘이었으며 오십 명이 타는 것이었고 돛대의 바람으로 가다가 노를 저어 가기도 하였다.
목선은 북동풍을 받고 남, 북황성도를 지나 사비성(대련)으로 향했는데 바로 사비왕 여암의 영지이자 사비공주가 태어난 곳이었다. 사비공주는 발해 바다를 건너서 대련반도의 사비성(대흑산산성)에 이르렀다.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또한 2년전에 중국으로 떠난 출발지였다. 그러나 사비공주는 사비성에 들리지 않고 동쪽 해안을 따라서 아리수(압록강)을 거쳐서 패수(청천강)을 거쳐서 한수(대동강)를 통해 한산(평양)으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의 한수는 대동강이고 백제의 한강이 서울 한강으로서 한수와 한강은 엄연히 다르다. 사비공주는 음력 정월 스무날에 한산성(평양 안학궁)에 들어갔다. 안학궁은 근초고제황이 지어서 대련의 사비성으로부터 370년에 천도하였다. 단군 왕검 시대에 세운 마한의 대성산 대시전 때문에 한산성은 대시한성, 또는 대성전이라고도 하였다. 백제로서는 개루왕이 최초로 한산에 천도하였다가 봉황 두 마리가 나타나 대궐 기둥에 집을 지어서 안학궁이라 이름을 붙였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처음 진출한 구이왕 때에 요동땅 대방군(해성)으로 수도를 옮겨갔는데 사비성을 거쳐서 130 년 뒤인 근초고제황이 한산(평양)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동진에서 371년에 근초고제황을 낙랑태수로 책봉하였으므로 한산성은 낙랑궁이라고도 하였는데 거대한 궁전이었다. 정문인 남문은 광화문처럼 일층에 세 개의 작은 문과 이층 성루로 되어있었다. 안학궁 뒤에는 한산성(대성산성)이 받치고 있고 앞에는 매루성(현재 평양의 청호동 토성)이 있었다. 매루성은 매부리처럼 생겼는데 안학궁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강나루를 둘러싼 진성(津城)이었다.
사비공주와 진가모는 배에서 내려 먼저 매루성에 들어가 수병들을 쉬게하고 우연히 마라난타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진가모와 사비공주는 마라난타와 합장하여 인사를 하였는데 그녀는 초면이었지만 진가모는 구면이었다. 중평제황이 384년 7월 중국 동진에 사자를 보내자 동진에서는 호승(胡僧) 마라난타를 384년 9월에 사자로서 중평제황에게 보내었다.
호승 마라난타는 백제 땅에서 불교를 포교하고 싶어 주청했는데 중평제황이 허가하고 안학궁 뒤편 대성산에 두타사를 짓게 하였다. 그러나 허가 직후인 지난 11월에 중평제는 중국 산동으로 떠났었다. 따라서 진가모는 중평제황을 수행하고 중국으로 가기 전에 백제 땅에서 마라난타 대사를 한번 보았었다. 대성산의 두타사는 착공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건설용 석재나 목재를 한수(대동강) 상류에서 매루성으로 실어 내려오기 때문에 마라난타가 매루성까지 내려와 일꾼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진가모는 매루성의 관아에 들어가 쉬면서 안학궁 한산왕에게 중평제황의 사자로서 두 사람이 도착했다는 기별을 하였다. 한산왕의 입궐하라는 전갈을 기다리면서 진가모는 마라난타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사님, 별고 없으셨습니까?"
"아이고, 세상이 온통 어수선하니 공사가 늦어집니다. 새로 제위에 오르신 흥평제황께서는 중원정벌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또 북벌을 한다고 하시니."
"북벌? 고구려 정벌을?"
사비공주가 놀라 물었다. 백제 병사들은 작금의 중원 정벌을 위해서도 많이 징발되었다. 흥평제황(한산왕;진사왕)은 아화 황태자(아신제황)를 유폐하고 중국으로 간 중평제황(침류왕)에게 반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군사가 필요하였다. 흥평제는 군사를 또 모으기 위해 고구려 정벌이라는 기치를 내세웠는데 결국은 강력한 군대로서 백제 본토의 그를 따르지 않는 반항 세력들을 눌러놓으려하였다. 그러니 고통받는 것은 백제의 민초들이었다. 마라난타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백성들의 고초가 큽니다. 중평제황이 이미 백제 군사들을 다 뽑아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흥평제황이 다시 백제 군사들을 중평제황 못지 않게 뽑아대니 백제에는 일할 사람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성산 두타사 공사도 일꾼이 모자라서 언제 다 지어질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사비공주가 폐위된 황태자 근황을 물었다.
"아화 황태자(아신제황)는 편안히 계십니까?"
"중평제황이 남겨두신 아화 폐황태자는 서궁에 갇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둘째인 금마왕(황해도 재녕, 장수산성) 훈해황자와 셋째인 위례왕(평산 태백산성) 전지황자도 붙들려와서 어린 삼형제 황자가 모두 서궁에 함께 갇혀 있습니다."
"음, 금마한성과 위례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인질로 잡아두고 막으려는 수작이군. 그럼 왜국과의 관계는 요즘 어떻습니까?"
사비공주의 짐작은 한치도 오차가 없었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지 일년도 채 안되었지만 백제 사정에 이미 정통하여 있었다.
"왜국땅 왜왕이신 남제왕(男弟?; 중평제의 이부형제)은 중평제와 모후(신공여황)가 같아서 어머니의 피가 섞였지만, 중평제와 흥평제는 이복동생으로서 아버지의 피만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제왕과 흥평제황은 아비도 다르고 어미도 다른데 흥평제의 등극을 환영하겠습니까? 현재로서는 왜국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흥평제황을 바라만 보고 있지요."
백제가 왜국 땅을 정벌하고 직접 통치한 것은 백제 걸제황(?帝皇) 여현(餘?)의 태자 시절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분을 게이고오(景行)천황이라고 하는데 백동 거울을 내세운 정복 행렬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 걸제황이 본국으로 들어와 백제 제황으로 즉위하고 즉위 삼년만에 선비족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사비성에서 연나라 업성으로 끌려갔다. 그후 백제 걸제황과는 오촌황숙인 근초고제황이 백제 제황이 되고 근초고제황의 차남인 근구수왕자가 왜왕이 되어 왜국을 통치하려 들었다.
그러나 걸제황의 친손자인 중애천황이 왜국 왕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 근구수 왕자와 맞섰다. 근구수 왕자와 왜국 왕권을 다투던 중애천황은 패전하여 죽고 말았다. 이때 중애천황과 신공황후 사이에 남제왕이 태어났었고 근구수 왕자와 신공황후, 즉 아이부인 사이에 새로 침류왕이 태어났는데 근구수 왕자가 본국으로 돌아와 백제 황태자에 오르자 그의 아들인 침류왕 여기(餘奏)가 근구수의 뒤를 이어서 왜왕으로 되었다.
그리고 근구수제황이 서거하자 침류왕이 다시 백제 본국으로 들어와 중평제황으로 즉위한 것이고, 왜왕위에는 걸제황의 증손자이자 중평제황의 이부형인 남제왕(男弟?)이 이어받게 되었다. 걸제황 여현의 차남인 일본무존 남구나(男具那;오오구나)부터는 개성(改?)하여 남(男)씨라고 하였다.
"그래도 흥평제황이 왜국과 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왜왕과 무슨 교섭이 있었을텐데."
사비공주가 묻자 마라난타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바로 얼마전에 왜국 남제왕의 누이를 백제 황후로 맞이하기로 결정하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아이부인(일본 신공여황)은 친자식인 중평제황보다 한산왕 여휘(흥평제황)를 지원하겠다고 할까요?"
사비공주는 모성애라는 것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마라난타 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부인보다는 현재 왜왕인 남제왕의 의중이 중요하겠지요."
세상 역사가 오묘한 것은 비록 형제라도 각각 갑과 을 지방의 왕으로 분봉되면 두 사람은 형제의 정보다도 갑과 을 지방의 국민적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된다. 분봉이란 그렇게 형제를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도 형제가 분리된 것이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다. 각기 진한족과 마한족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은 진가모가 살던 조선왕 진명의 저택으로 들어가서 여독을 풀고 쉬었다. 그렇지만 사비공주는 흥평제황을 암살할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여 밤을 꼬박 새게 되었다.
다음날 오전 구중심처 안학궁에서 흥평제황(진사왕 여휘)이 두 사람을 정경전으로 불러들였다. 흥평제황은 그들이 중평제의 사자이지만 결코 중평제의 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평제황은 폐위되었고 오로지 자신만이 백제의 황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흥평제황은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조회시간에 두 사람을 만나지 않고 조회가 파한 후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두 사람을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문무백관들이 중평제황의 어떤 유지라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었다.
흥평제황의 호위를 맡은 금위군 총수 두찌(豆知)는 사비공주의 검이 고강하니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진언하였다. 그러나 흥평제황은 사비공주가 중평제의 사자가 아니라, 흥평제황의 어릴 적 친구로서 만나기를 허락하였고, 또한 진가모는 그의 처남이기 때문에 접견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흥평제황이 두 사람을 초대한 곳은 정경전 후원의 연못가였다. 진가모는 후원에서 흥평제황을 보자 깍듯하게 제황에 대한 예를 취했다. 그러나 사비공주는 서로 같은 왕의 반열로 생각하고 한산왕 이상으로 인정치 않아서 형왕에 대한 예의 표시 정도에 그쳤다.
"어서 오라. 짐도 그대들이 중국에서 수고한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헛수고에 그치고 말리라."
흥평제가 중평제의 실정을 탓하는 말을 꺼내자 사비공주가 물었다.
"어째서 헛수고지요?"
"작은 나라가 어찌 큰 나라를 칠 수 있나? 괜히 백성들만 개죽음시킬 뿐이지. 낙랑 대방 마한의 작은 나라가 어찌 중원을 다 차지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짐은 더 이상 무고한 백제 백성들의 피를 중원에 뿌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중신들의 뜻을 따라 백제 제황의 자리에 등극하였느니라."
흥평제는 자신의 등극을 정당화하며 그들을 설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비공주도 지지 않았다.
"작은 나라가 중원을 치는 것은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큰 나라가 다 작은 나라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초승달이 자라서 보름달로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한산왕의 염려처럼 실패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 원인이 바로 한산왕이 뒤에서 중평제황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라고 후일 역사가가 기록한다면 한산왕은 백제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비공주의 입은 논리정연하였다. 그러나 암살 기회를 노리고저 여기까지 와서 일찌감치 한산왕의 화를 돋구어 놓고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실수였다. 하지만 일단 불의를 보면 분명히 불의라고 밝히고 따지는 것이 사비공주의 타고난 성미였다. 흥평제는 화가 났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그 역사는 짐의 후손이 쓴다. 중평제의 후손이 쓰는 역사라면 그럴지 몰라
도 짐의 후손이 쓰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 중평제가 중원에서 피이슬이 되어 사라지고나면 중평제의 후손은 필시 백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흥평제의 측근 신하들이 사비공주의 대담한 반박에 놀라서 입이 벌어졌는데, 흥평제가 다시 여유롭게 반박하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흥평제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흥평제에 집중하여 흥평제의 안색을 살피는 사이에 사비공주는 찰나의 기회를 잡아서 기습적으로 몸을 날렸다. 사비공주는 제비처럼 몸을 날려서 어느새 홍학검을 뽑아 검끝을 한산왕의 턱 밑에 대었다.
"네가 잘못 쓰려는 그 역사를 본공주가 다시 고친다."
흥평의 호위 무사들은 그녀가 몸을 날리는 것으로 보고 나서 역시 뛰었으나 한발 늦었다.
"사비공주, 진정하시오."
흥평의 금위군 통령 두찌(豆知)가 검을 뽑았으나 사비공주의 홍학검이 한산왕의 목을 누르자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