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깨어진 맹세 - 1
#36. 깨어진 맹세
벽려혼과 장영이 내원을 나오니 금위무사들이 모여서 공천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공천왕이 금위무사들에게 제기차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천육백이십, 이십일, 이십이."
공천왕은 벽려혼과 장영이 내원에서 나오자 제기차기를 그만두었다. 공천왕은 벽려혼과 장영이 황부인과 내원에서도 내당안으로 들어가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몸받쳐서 금위무사들을 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벽려혼은 다시 행궁의 정청으로 향했는데 공천왕이 도중에서 물었다.
"이보게 장영, 내당이 화려한가?"
"."
꿀먹은 벙어리처럼 장영이 대답하지 못했다. 기분이 야릇하니 좋은 것도 같고 찝찝하니 나쁜 것도 같고 장영의 기분은 오락가락하였다. 공천왕은 벽려혼에게 다시 물었다.
"오색(五色)공자 전하. 동진 건강성의 그 화려한 황학루와 비교해서 백제 행궁의 내실은 어떻던가요?"
공천왕이 벽려혼을 오색 색마라고 일컫자, 한번 시작하면 계속 터져나올 공천왕의 험한 놀림을 미리 짤라버리기 위해서 벽려혼이 할수없이 입을 열었다.
"사마, 그게 말이요. 한 남자가 아무리 제왕이라도 한꺼번에 여러 여자를 거느리겠다고 하면, 그건 여러 여자 모두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배신이고 그래서 결국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소이다."
벽려혼은 뒤늦게 진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공천왕은 그 뒤늦은 깨달음도 부러웠다.
"화를 자초해? 결국 그 화를 당하고 나온 모양이군. 나도 그런 화좀 당해 보고 싶구만."
공천왕은 김총과 김란이 모두 공천왕의 고향 가야 출신이기 때문에 숨겨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한번 손을 봐 줘? 공천왕은 건강에서 다비군이라는 여자아이를 얻어온 후로 고기맛을 본 중처럼 여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갔다. 나도 한 고향 여자, 가야 여자를 얻어서 필히 후손을 봐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 언제 한번 손을 보고 손을 빼내야지.
대륙백제가 드디어 웅비하는 그 좋은 을유년 신년 하례 만찬장에 백제 본국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사자가 들어왔다. 급보를 전해온 사자는 대방왕 여계의 작은 아들인 여초(餘超)였다. 그는 성중에 들어오자마자 만찬장의 중평제황을 찾고 서찰을 올렸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서찰은 노란 비단에 쓰여졌고 붉은 띠가 둘러 있었다. 그 서찰을 바라본 백제인들의 얼굴이 새파래지기도 하고 또 노래졌다.
노란 비단에 붉은 띠의 서찰은 황명에만 쓰이는 서식이었다. 즉 백제 제황만이 전하는 어명의 형식이었다. 중평제황이 여기에 버젓이 살아있는데 이런 식의 서찰을 보내었다면 그것은 본토에서 반역이 일어난 것이었다. 중평제황 앞에서 아무도 나서서 선뜻 서찰을 받아 올리지 않았다. 대방왕 여계가 물었다.
"초아야, 어떤 놈이 이 따위 서찰을 보냈느냐?"
"한산왕(진사왕)입니다."
"그가 반역을 했느냐?"
사실 이 말은 물을 필요도 없었는데 그래도 확인을 하였다. 여초가 그간 본토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는 지난 11월 중에 한산성(평양)의 아화(아신제황의 아명) 황태자를 유폐하고 스스로 흥평이라는 연호를 새로 세워 칭제건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달에 저를 대륙으로 보내게 되어 이제 도착하였습니다."
대전의 모든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제를 떠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륙이라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데 그 밑둥을 사정없이 흔들어 댄 본토의 한산왕에게 원망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산왕은 중평제황의 이복 동생이었다. 선제인 근구수제황은 왜국여자인 아이부인(즉 신공여황)을 통하여 중평제를 낳았고 또 백제 본토 부인을 통해서 한산왕 여휘를 낳았다.
백제의 구신들에게는 왜국 여자의 소생인 중평제에 대하여 그가 황위를 잇는 것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근구수 제황이 중평제를 등극시키도록 한 유언이 있었고 그렇게 집행되었다. 중평제황은 왜왕을 양위하고 백제 본토로 들어와 백제 제황으로 즉위하자 일본 삼도를 평정한 근구수제황의 뒤를 이어 중국 대륙을 평정하려는 웅지를 세우고 이렇게 대군을 이끌고 중국 대륙으로 들어왔는데 그만 이복동생 한산왕을 믿고 본토의 국정과 병권을 맡긴 것이 큰 실수였다.
"그런데 그 서찰은 누구한테 왜 보냈느냐?"
대방왕이 좌중의 침묵을 깨고 여초에게 물었다.
"저도 읽어보지 않아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여초가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여기 한산왕의 신하가 있으면 서찰을 읽어보도록 해라. 그렇지 않다면 태워버려라."
대방왕이 물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건절장군 여암이 앞으로 나와서 서찰을 칼로 찢어버렸다.
"백제 제황은 오직 한 분이시다. 만고의 역적 한산왕은 기필코 응징을 받을 것이다."
조선왕 진명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 곳에 옮겨서 대책을 세워야죠?"
중평제황이 맥없이 옥좌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고 조선왕 진명이 다시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달솔, 자사 이상의 신하들만 안으로 들어오시오."
동청주자사 대방왕 여계가 앞장서서 조용한 회의실로 안내하고 뒤에는 중평제황과 금위군 장군 의도리, 조선왕 진명, 창주자사 건절장군 여암, 장무태수 여귀, 서주자사 낭야왕 탁발필(독천왕)과 교주자사 동해왕 아진(흑천왕), 낙릉태수 단관이 따라갔고 이어서 사비공주도 따라 들어갔다.
384년 음력 11월에 백제 한산성(평양)에서 일어난 반란은 중원으로 원정나온 중평제황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중원에 오기 전에 나이어린 아신 황태자로 하여금 중평제황의 이복 동생인 여휘(餘暉)의 보좌로서 백제 본토를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여휘가 아신황태자를 유폐하고 스스로 백제 제황에 오른 것이다. 중평제황은 이복 동생의 반란으로 더 이상 백제 땅으로부터의 새로운 증원군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중평제황은 당장 휘하의 백제군을 이끌고 반란자 한산왕 여휘를 치러 돌아가자니 그동안 중국에서 이룬 과업이 너무 허무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 땅에 10만에 달하는 백제군이 있지만 여기서 일부라도 빼서 백제 본토 공략으로 돌리면 청주, 창주, 동청주, 교주 땅은 다시 연나라나 동진에게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평제황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여러 자사들과 협의하여 백제 본토를 먼저 칠지 말지 결정하였는데 거의가 본토 회군을 반대하였다.
중국에서 황제, 천자가 되는 것이 백제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으로 기울었다. 기왕지사 칼을 뺏으면 뭐라도 찔러보고 돌아가야지. 조선왕 진명이 진언하였다.
"일단은 회유 사자를 보내어 한산왕의 마음을 돌려보시지요. 칠 때 치더라도 그것이 순서이옵니다."
중평제황은 우선 한산왕 여휘(진사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회유하기로 하였다. 당장 군사를 내어 여휘 일당을 쳐죽일 수도 있지만 중국 땅을 먼저 평정하겠으니 증원군 5만을 마저 중국으로 보내고 아신 황태자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 놓으면 여휘를 용서하고 대방왕, 즉 만주의 왕으로 내보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황제(흥평제)가 되어버린 여휘가 순순히 대방 땅으로 물러갈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회유가 안되면 도로아미타불이지만, 아무튼 한산왕이 어떻게 나오든간에 일단 사자를 보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자로 갔다가 죽임을 당해서는 억울한 것이니 죽지 않을 사자가 필요했다.
"그럼 사자로 누굴 보내는게 좋겠소?"
중평제황이 물었다. 건절장군 여암이 대답하였다.
"조선왕 진명의 아들, 동래태수 진가모가 적합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건절장군이 대답했다.
"그의 누이가 한산왕의 정부인입니다."
조선왕 진명이 끄덕이고 나섰다.
"듣고보니 제 자식이 다녀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평제황은 그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동래태수 진가모를 보내도록 한다. 그럼 이번에 건너온 여초를 동래태수로 쓸까?"
"그러시면 안되고 진가모에게 동래군은 그대로 주어야죠. 여초는 제가 정벌군을 이끌고 나갈 때에 부장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대방왕이 제 자식인 여초가 동래태수를 못하게 마다하는 것은 장차 진가모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좋아, 그럼 진가모를 불러라. 사자로 보내도록 하지."
이렇게 회의가 끝나고 조선왕 진명이 아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저 나갔다. 조선왕 진명이 밖으로 나가자 장무태수 여귀가 중평제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그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무엇이냐?"
중평제가 여귀를 바라보자 여귀는 먼저 여암과 사비공주를 보았다. 그들을 갈라놓을 음모를 세운 여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비공주를 진가모와 같이 본토로 보내지요."
"어째서?"
"사비공주는 어려서부터 한산왕과 친했으니 한산왕이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의심?"
일순간 긴장이 흘렀다. 모든 사람이 장무태수 여귀를 바라보았다.
"아하, 그래 그게 좋겠다. 사비공주, 네가 본국에 다녀와야겠다."
중평제는 무릎을 탁 치면서 찬성하였다. 이심전심으로 여귀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산왕에 대한 암살 지령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비공주가 눈치를 채고 반대하였다.
"저는 나흘 후에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무태수 여귀는 바로 그 사비공주와 벽려혼의 결혼이 싫어서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네가 맡아야할 이 일도 몹시 중차대한 일이다. 뭐, 사자를 보낸다고 한산왕이 꿈쩍이나 하겠냐?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직접 가서 기회를 보다가 한산왕을 죽여라."
"폐하, 소녀는 그런 일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비공주가 직접 중평제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여귀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한산왕을 죽인 뒤에 도성의 성민들을 다시 충성스럽게 뒷수습을 하는 것도 역시 너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너 아니면 누가 한산왕을 죽이고 또 죽인 연후에 한산성의 사람들을 다시 회유할 수 있겠냐?"
여귀가 아무리 강권하여도 사비공주는 이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자신은 남자와 같이 정면에서 겨루는 당당한 무인이 되고 싶었지 남의 허를 찌르는 암살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비공주가 다시 사양하였다.
"그런 중차대한 일은 소녀가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폐하. 그리고 저는 곧 결혼할 것입니다. 제왕 벽려혼과 본토에서 온 제가 국혼을 이루는 것이 폐하께서 중원을 도모하시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창주자사 여암도 여귀의 속셈을 알고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