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왕후지재 장약 - 3
"제황이 되면 여자는 또 무수히 얻을 수 있습니다. 전 부인들이 비운 자리를 금방 채울 수 있습니다. 제가 황후가 된 다음에 나으리가 황제가 되고 나면 얼마든지 황부인, 숙원, 귀비를 두루두루 두시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마 전부인이 셋이면 앞으로의 부인은 삼백명도 모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만승천자의 특권입니다. 어서 제위에 오르실 준비를 하소서. 당장 저를 데리고 오늘밤 안으로 떠나소서."
벽려혼은 벌떡 일어나서 귀를 막았다.
"장약, 부탁이다. 더 이상 그런 말은 말아다오. 너는 여기서도 황후가 될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느냐? 왜 고향을 버리고 나를 따라가려 하느냐?"
그 이유는 장약도 몰랐다. 어제까지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러나 장약은 벽려혼을 따라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황후가 아니라 벽려혼의 황후가 되고 싶은 것이다. 오직 그만이 장약이 평생 사랑할 수 있는 남자였다. 장약이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남자. 그런데 바로 그 남자에게서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장약은 금방 토라졌다.
"아주 양심적인 척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어제, 오늘 내가 대접한 것이 아무리 극진했어도 일개 황학루 기녀의 봉사라서 그런게지요. 이방에서 미천한 기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인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고귀한 황후지재인데."
벽려혼이 위로하였으나 장약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나으리는 위선자에요. 이미 자기 것이 된 여자를 황금 오백 냥을 더 받고 냉큼 되팔아먹다니. 나으리는 술집 포주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장약은 벽려혼에게서 거절당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을 뿌렸다.
"장낭자와 논쟁하면서 이 아름다운 밤을 망치고 싶지 않소.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운명이오."
벽려혼의 말에 장약도 더 말을 못했다.
"그래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밤이군요. 희노인의 예언이 틀림없군요."
장약은 미친 듯이 벽려혼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왕후가 되어서도 평생 다른 정인을 그리워할 운명이라더니. 벽려혼은 가슴의 치우손을 열어서 부드러운 비단의 치우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듬고 나머지 두 손으로는 장약의 등을 예쁘게, 예쁘게 쓰다듬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장약은 벽려혼에게 옷을 입혀주면서 물었다.
"나으리, 아직 이름자도 모릅니다."
"나는 여혼이라 한다."
"여씨입니까?"
"그래, 백제 부여 사람이다."
장약은 그의 이름을 알게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비록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이지만 장약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여대인 나으리,"
"오냐."
"다시는 다른 여자를 품에 안지 마십시오."
장약의 주문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기녀를 위해 수절해야 하는 남자가 있을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나보고 평생 수절하라니."
벽려혼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자 장약은 아주 당돌하게 말했다.
"나 장약이 아니고, 또 지금 계신 세 부인 아니고 또 다른 여자를 품게 되면 제가 저주할 것입니다."
"알았다."
벽류혼은 듣기에 기분 나쁜 소리지만 가만이 참았다. 그러나 장약은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다음에 또 어떤 여자를 건드리고 책임지지 않는다면 여공자님이 큰 화를 당할 것이에요."
"응? 진짜로 나한테 저주하는 것이냐?"
벽려혼은 정말로 이 여자를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독한 소리만 골라히니. 그러나 장약은 벽려혼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을 계속했다.
"이 정도는 저주가 아니고 경고에요. 나는 차마 여공자님을 저주할 수는 없군요. 대신 나를 되사가는 사마도자를 원망하도록 하지요."
벽려혼이 가만이 참다보니 어느새 장약의 기세도 꺾였다.
"봐줘서 고맙군."
"그렇지만 경고는 경고로 받아들이세요. 이미 여러 부인이 있는데 또 다른 여자를 탐하다가는 크게 낭패할 일이 있을 거예요. 어떤 여자든 나으리와 사흘만 있으면 마음을 주게 되고 또 마음을 준 그만큼 저주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 제발 조심하고 안녕히 가세요. 절대로 곁눈질하지 말고 똑바로 앞만 보고 돌아가세요."
장약은 마침내 눈물을 비쳤다. 그녀는 일개 기녀지만 앞을 보는 혜안이 있었다. 벽려혼이 우습게 들어넘긴 여자를 밝히지 말라는 경고는 결코 잊지 말았어야 했다. 장약의 눈물을 결코 잊어서도 안되고.
다음날 아침 낭야국 내사 왕국보는 꽃가마에 황금 궤짝 두 개를 실어 황학루에 들어왔다. 궤짝을 유대인에게 내보이니 유대인은 그 궤짝들을 그대로 공천왕이 준비한 마차에 실었다. 왕국보는 후원에서 벽려혼과 마주 앉아 있는 장약을 불러 꽃가마에 싣고서 낭야왕부로 향했다.
"너도 이제 팔자 고친 것이다."
왕국보는 장약을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비록 낭야왕과 살게 되면 그의 상전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개 기녀 출신을 왕국보가 요리하지 못한다면 체면 문제고 그동안 먹은 나이값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이 장차 장약에게 주어지는데 장약이 고분고분하게 왕국보의 말을 들을 리도 없었다. 거꾸로 왕국보가 말을 안들으면 어떻게 혼내줄까하고 꽃가마 속의 장약은 생각하고 있었다. 벽려혼은 장약을 먼저 보내고 괜히 무거운 마음이 되어 공천왕의 마차에 올랐다. 희노인과 인도소녀 다비군, 그리고 벽려혼이 마차 안에 타고 공천왕이 마부가 되어서 네 마리의 말을 채찍질하여 건강성을 떠났다. 희노인이 벽려혼의 그득한 수심을 보고 물었다.
"오공자. 무슨 일 있소?"
"장약이 같이 가자고 했소이다. 나를 따라가고 싶다고."
"저런, 저런. 정이 들었군."
"맞소."
벽려혼이 끄덕거리는데 희노인의 다음 말은 전혀 의외였다.
"정말 큰일날뻔 했군. 안 데려오기를 아주아주 잘했소."
희노인이 장약을 동진 건강성에 두고 오기를 잘했다고 하는 말이 벽려혼에게는 단지 빈 말이고 위로의 말로만 들렸다. 그래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왜? 왜 그렇소?"
벽려혼 대신에 다비군이 희노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희노인이 대답했다.
"관상은 내가 오공자 태어나기 전부터 봐왔지 않소? 그녀는 사실 말해서 살부지상(殺夫之相)이오. 그러니 그녀를 황후로 하는 황제는 바로 장약에게 죽을 목숨이오."
"설마?"
다비군이 고개를 저었다. 벽려혼은 장약이 살부지상이라는 희노인의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랐다. 아무튼 희노인의 점은 신통한 데가 있었다. 벽류혼 일행이 떠나고 건강성에는 낭야왕부에 들어간 장약이라는 기녀가 황후지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말많은 기루에서 발원한 소리가 온 성안에 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발없는 소문이 성벽을 뛰어넘어 구중심처에 있는 황제사마창명의 귀에 까지 장약의 이야기가 들어가는데는 단 칠일이 걸리지 않았다.
황제 사마창명은 낭야왕 사마도자에게 말하여 조용히 장약을 끌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장약을 자기 후비로 하여 장귀인으로 봉했다. 대신에 사마도자에게는 장약을 바친데에 대한 치하로서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닌 황금 만냥을 내렸다. 그제서야 사마도자는 땅을 치고 장탄식을 했다. 아차, 그 노인네 점장이 말처럼 만냥을 주고 사야 비로소 황후가 되는구나. 그런데 내가 구천냥을 아껴서 겨우 천냥을 주고 사니 내 손으로 장약을 황후로 못 만들고 형의 손으로 황후를 만드는구나. 그때 그 노인네의 말을 들었어야 되는건데. 장약은, 장귀인은 12년후 나이 서른이 넘자 사마창명의 타박을 받았다.
"너도 서른이구나. 이제 늙었어."
그때 사마창명의 나이는 서른 넷이었다. 저 때문에 청춘을 빼앗기고 정인을 놓치기까지 했는데 이제와서 나이탓이라니. 그래, 너는 내일부터 어린년을 끼고 자겠다 이 소리지? 나는 뒷방에서 맨날 혼자 처박혀 있으라고? 약이 바싹 오른 장약은 바로 그날 밤 베개를 뒤집어 씌워서 잠을 자던 사마창명을 질식사시켰다. 그래서 다음날 진숙원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이 제위에 올랐는데 396년의 일이다. 희노인의 말대로 살부지상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벽려혼은 희노인을 청주로 데려가서 역관(曆官)을 시키고 말벗을 삼기로 했다.
보름이 지나서 동진의 낭야국 내사 왕국보가 책명사자가 되어 청주로 들어와 벽려혼을 유주자사 평원공으로 봉한다는 동진황제의 책명을 전하고 더불어 유주자사에 합당한 왕의 예복과 옥새까지 만들어다가 전하여 주었다. 왕국보는 내년 봄에 태보 사안이 연나라 정벌군을 이르킬 것이라고 전하고 벽려왕도 참전하라고 권하였다. 벽려혼은 꼭 대연 연합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왕국보는 그가 꿇어안아 올려보는 청주왕 전하 벽려혼이 그 무서운 오공자, 비류귀신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왕부 정청에서 청주사마 공천왕을 우연히 보자 왕국보가 그를 알아보았다.
"오대인이 여기 계셨소?"
"어험, 이 나라에도 점 볼 사람이 많으니까."
공천왕이 자리를 벗어나며 말을 피하려는데 왕국보가 계속 말을 붙였다.
"그런데 지난 번에는 정말 아쉬웠소."
"또 뭐가?"
"정작 내 점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오공자께 전하여서 내 점을 한번 봐주시오."
"그럼 돈을 내야지."
공천왕은 왕국보를 끌고 오공자 대신에 희노인에게 데려갔다. 희노인은 앞으로 십년까지는 문제가 없으나 그 뒤에 종씨한테 해를 입을테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종씨를 조심하게, 왕씨에게 토사구팽 당할 것이라네."
십년 후 왕국보를 죽게 한 사람은 왕황후의 오라버니인 왕공이었다. 동진의 연주자사 왕공이 북부군 군대로서 쳐내려가서 기강이 문란한 동진 조정을 압박하여 서정쇄신하라고 하니 당시 황제 안제의 삼촌인 낭야왕 사마도자가 자기 심복인 왕국보를 서정쇄신의 희생양으로 삼아서 그의 목을 베어서 왕공에게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