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태산에 오르다 - 2
털보가 대호방 본채로 뛰어 이채주 연호를 보자 머리를 엎드렸다. 연호가 이채주지만 곱추인 탓에 가장 아량이 넓어서 부하들이 가장 많이 따르고 어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곱추라고 우습게 보다간 귀두도로 해서 가장 잔인하게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
"채주. 우리 산채 아래에 괴상한 놈들이 나타나 저의 아우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연호가 털보를 보니 얻어터져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대관절 어떤 놈들이냐?"
"한 놈은 외팔이 금발노괴이고 또 한놈은 백발노괴입니다. 그놈은 눈썹도 하얀 것이 행동은 맷돼지처럼 거칠고 손버릇은 번개처럼 빠릅니다. 어디서 나타난 노물들인지 몰라도 좋은 목적으로 찾아온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연호가 퍼뜩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한때 청주를 백일천하하던 벽려울과 그 아들 벽려흥 부자가 두달전에 산채에 나타나 뒷채 영웅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을 해치러 나타난 연나라 자객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참 괴이한 놈들이구나. 그들 행색이 범상치 않으니 다른 채주들과도 상의를 해야되겠다."
이채주 연호는 장정의 거처인 대웅각으로 달려갔는데 삼채주 장영이 먼저 맞이하였다.
"아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백발노괴와 금발노괴가 산채 아래에 와서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다 하네."
"그래요? 어떤 놈인지 보러가지요."
"하지만 그놈들이 가볍게 볼 놈들이 아니니 방주께 알려서 미리 대비를 하시라 하고 우리가 내려가세나."
이채주 연호와 삼채주 장영은 안으로 들어가서 장정하게 기별하고 즉시로 졸개들 이십여명과 함께 두 노물을 잡겠다고 내려갔다. 연호가 곱추이지만 걸음은 제일 빨랐다. 앞장을 서야 할 털보가 뒤에서 헉헉거리면서 쫓아갔고 그 뒤를 장영과 나머지 졸개들이 따랐다. 연호가 털보와 같이 여비를 찾아가자 여비는 이미 꿩 한 마리를 잡아서 구워 먹고 있었다.
"털보 이놈. 약속은 지켰구나."
"?"
털보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백발노괴와 약속을 지킨 것은 없었다. 덫을 걷어서 잡아오라는 들짐승을 잡아온 것이 아니고 응원군을 데려온 것이었다. 여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거, 지금 얼러얼러 끌고온 게 암퇘지 아니냐? 빨리 구워라."
따라온 이채주 연호가 자신을 돼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대갈을 했다.
"이 미친 놈이 소경이냐? 아니면 눈을 파버리겠다. 진짜 소경을 만들어주마"
연호가 씩씩거리든말든 여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발노인은 일이 점점 재미있었다. 강물에서 건져올린 놈이 이 정도의 대어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이다.
"털보 이놈, 돼지 멱따는 소리 들리지 않게 한 주먹으로 기절시켜서 빨리 잡아 구워라. 그런데 암퇘지 뒤에 달고온 새끼 돼지들을 먼저 구워 먹을까? 암퇘지는 익는데 오래 걸릴테니 연한 새끼 돼지를 먼저 노릇노릇하게 구워볼까?"
연호의 뒤에 따라온 장영과 새끼 돼지들은 어이가 없었다. 연호가 귀두도를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너 이놈, 네 목부터 따서 돼지먹이로 써야겠다."
그러자 여비가 풀쩍 뛰어서 금발노인의 뒤에 숨었다.
"의부, 어미돼지가 발정을 하는데 막아줘요."
금발노인은 연호를 맞아서 품 속에서 검은 대나무 피리를 꺼내었다.
"이놈, 팔 두 개가 멀쩡한 놈이 외팔이인 애비보고 막으라구?"
금발노인은 검은 피리로서 검대신으로 사용하여 연호의 귀두도를 막았다. 그러면서 여비를 힐끗 보았다. 연호가 소리쳤다.
"입만 요란했지 실상은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잘 보아라. 이게 미친 개의 조둥아리를 때려주는 타구난봉(打狗難棒)이다."
이채주 연호는 미친 개떼를 때려 잡는 귀도도법 일초식인 타구난봉법을 펼쳐 보였다. 연호가 귀두도를 휘둘러대는데 주로 도면이 아니라 검자루의 철봉을 이용해서 후려쳤다. 여비는 가까이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다가 말했다.
"앉은뱅이 개라면 타구난봉에 맞을 수도 있겠지."
금발노인은 껑충껑충 하늘로 날아오르며 두 발길질로 연호의 어깨 양쪽을 차례로 걷어차 버렸다. 연호는 혈도를 격타당하고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도대체 상대가 되지 않는 무공 수준이었다. 삼채주 장영이 청운검을 뽑아들고 금발노인에게 달려들었다.
"풍운검!"
이번에는 금발노인이 풀쩍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여비의 뒤로 내려섰다. 다음은 여비가 나설 차례였다. 만일 여비가 장영을 막지 못한다면 여비에게 함부로 입을 놀린 데에 대한 경고를 주려한 것이었다. 여비는 장영의 풍운검이 그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내려쳐오자 청동 투구로 들이받았다. 풍운검은 여비의 투구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퉁겨나갔다. 장영은 두손으로 풍운검을 쥔 채로 두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여비는 그새 두 주먹 등으로 장영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교룡껍질로 만든 치우갑은 장영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는데 거칠거칠 살결을 찔러들었다. 여비가 두 주먹을 비틀면 장영의 얼굴이 망가지게 되었다.
"귀여운 놈."
여비가 다정스럽게 한 마디 하자 장영은 아찔하였다. 얼굴이 수백 개의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따가웠다.
"아버지라고 불러 봐."
장영은 무공도 아닌 이상한 초식에 당하고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말을 하려고 하니 얼굴을 움직여야하고 얼굴에서 피가 났다.
"아으."
여비는 손을 털며 장영을 놔주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대호방의 이채주 연호와 삼채주 장영은 각각 금발노괴와 백발노괴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산채에는 일채주 단관과 대호방주 풍운검 장정이 남아 있었다. 여비가 먼저 말했다.
"나는 벽려혼이다. 어서 태산 영웅각으로 안내하여라."
그러자 연호와 장영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연호가 허리를 굽히고 여비에게 다가갔다.
"벽려혼이라시면? 그렇다면 벽려울 왕야와는 어떻게 되십니까?"
"청구국 벽려왕 벽자 려자 울자는 바로 나의 부왕이시다."
여비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장영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참으로 귀한 분이 왕림하셨군요."
청운검 장영은 공손히 말하면서 꾀를 부렸다. 여기서 두 노괴를 제압하기는 힘들지만 산채로 이들을 끌고 올라가면 대호방주 장정과 일채주 단관이 있고 또 진짜 벽려울과 그의 진짜 아들인 벽려흥이 모두 함께 있으니 이들을 협격하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백발노괴가 자칭 벽려울의 아들 벽려혼이라지만 진짜 벽려울과 대질하면 진짜 아들인지 가짜 아들인지 곧 판별이 날 것이다. 하지만 산채에 이미 그들 진짜 벽려울 부자가 있다는 말부터 미리 알려서 벽려혼에게 벽려울을 만나러 올라가자고 하면 벽려혼이 놀라 도망갈 수도 있었다. 장영은 시치미를 떼고 이번에는 금발노인에게 물었다.
"하오면 대인의 존성대명도 하교하여 주십시오."
이때 금발노인이 못들은 척하고 꽁무니를 뺐다.
"나는 무명노인이다. 벽려혼, 너는 이 늙은이의 부탁을 잊지 말고 한치도 어김없이 수행하여라. 그럼 나는 너만 믿고 이만 갈 것이다."
"가긴 어딜 갑니까?"
여비가 미처 붙들 사이도 없이 금발노인은 껑충 뛰어서 산을 내려가버렸다. 금발노인은 여비가 혼자 태산을 올라가서 기회를 보아 벽려흥을 죽여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여비는 금발노인이 아주 떠나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금발노인은 스스로 가짜 벽려울도 죽여야 할 것이고 또 여비가 과연 약속대로 벽려흥을 죽이는지 살리는지도 확인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험, 가자."
여비가 이채주 연호를 앞장 세워서 태산을 올라 영웅각으로 향했다. 장영과 졸개들은 그 뒤를 따랐다. 허물어져가는 태산의 대호방의 뒷채 영웅각 앞에 이르니 이미 영웅각을 보수하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앞 마당에는 금발노괴와 백발노괴의 출현 소식을 전해들은 대호방주 장정과 일채주 단관이 먼저 와서 소위 대공자라는 벽려흥을 호위하고 있었다. 대호방주 장정은 두달 전에 벽려흥의 방문을 받았다. 벽려흥은 벽려왕과 왕씨 소생으로서 왕씨 부인이 도망한 북해의 사자도에서 357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벽려흥이 27년만에 다시 청주로 돌아와 태산 대호방에 나타난 것이다. 벽려흥은 선친의 유업을 이어서 다시 백제의 영화를 살려서 청주를 되찾아야 하겠으니 대호방보고 협력하라고 하였다. 장정은 바로 벽려울이 숨겨둔 삼부군(三府軍) 중에서 운사(雲師)였던 백운검 장풍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장풍의 유조가 청구국을 되살리는 것인데 벽려흥이 나타났지고 그가 벽려울의 후예인 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벽려흥은 삼부군 중에서 북해 사자도에 은거했던 우사(雨師) 왕구(?久)의 수하를 일백명이나 데리고 올라왔다. 따라서 삼부군 중에서 우부와 운부가 다시 뭉쳐 장차 거사하기로 했는데 나머지 숨어있는 삼부군 하나는 풍부의 풍사였다.
장정과 왕구는 풍사에게 기별하여 태산으로 오도록 하였다. 풍사는 장락성의 풍가장에서 대상(大商)의 조직을 갖추고 일천명이 넘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협력이 청구국 부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하지만 풍사는 왕구와 장정, 그리고 벽려흥의 간절한 부름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섣불리 거사를 도모하면 그나마 살아남은 백제의 후예들이 다시 개죽음을 맞을 것이라면서 더 참고 때를 기다리자고 답신을 보내왔다.
삼부군을 다 모으지 못한 벽려흥은 답답하였다. 더욱이 풍사가 가진 재산이 거사자금으로 긴요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짜 벽려울이었다. 벽려흥은 급히 그의 외숙인 왕씨를 데려와서 자칭 벽려울이라 칭하였다. 대호방주 장정과 일채주 단관은 27년만에 보는 가짜 벽려울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지만, 삼부의 주군인 벽려울 청구왕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불경하게 시험해볼 수도 없고 더욱이 벽려흥이 그를 아버지 부왕이라고 부르니 믿게 되었다.
벽려흥과 가짜 청구왕 벽려울은 사자를 보내어 풍사를 태산에 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풍사가 가짜 벽려울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번에도 다시 거절하였다. 벽려흥과 가짜 벽려울은 이번에는 자객을 보내어 풍사를 죽이도록 하였다. 현재의 풍사가 죽고 새로운 풍사가 이어받으면 그들의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풍사를 죽이러 떠난 자객은 소식이 없고 대신에 두 괴물이 태산에 나타난 것이다. 필경 자객이 실패하고 대신에 가짜 벽려울을 죽이려는 풍사의 자객이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발귀인 여비가 나타나 마당에 서자 영웅각 대청 말석에 앉아있던 단관이 벌떡 일어나서 장창을 꺼내어 겨누었다.
"어디서 나타난 놈이냐?"
단관의 뒤에는 풍운검 장정이 앉아 있고 그 뒤에는 진짜 벽려울의 첫아들인 벽려흥이 있었고 또 그 뒤에는 가짜 벽려울이 있었다. 이채주 연호가 대청으로 달려가 방주 장정에게 인사를 하였다.
"방주, 이 자가 벽려울왕야의 아들 벽려혼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뒤에서 가짜 벽려울이 마루 앞으로 나섰다.
"어떤 놈이 내 아들이란 말이냐?"
가짜 벽려울이 여비를 바라보면서 호통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