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시 흐르는 강 - 3
여비는 이 부분이 제일로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물었다.
"어떻게 모용각을 이겼죠?"
"그때 나는 그를 후원 마당으로 불러내어서 결투를 했다. 사실 그는 나와 비슷한 실력이었어. 그런데 내가 외팔이라고 그가 방심했다가 내 검에 찔렸다. 나는 그의 복부를 찔렀고 그는 나에게 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을 못넘기고 죽었지."
여비는 들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의 박수는 돌아가신 벽려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잘했군요. 그리고 어떻게 도망쳤나요?"
연나라 심장부인 업성에서 모용각을 죽이고 도망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금발노인은 당시의 비사를 다 꿰고 있었다.
"죽은 모용각, 바로 그가 나를 보내주었어. 결투 전에 부하들에게 나를 그냥 보내라고 당부했지. 그러고서 내 칼을 맞았지만 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자기가 그날의 상처로 죽을 줄도 모르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서 나를 무사히 보내주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지."
"모용각은 참 대단하군요."
금발노인도 모용각이 원수지만 벽려울을 놓아준 것에 대해서는 다른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사나이다운 그런 모습을 본 것이다. 금발노인이 회상을 계속하였다.
"모용각, 그의 어머니는 본래 고구려의 공주였어. 그런데 모용황이 젊었을 때에 고구려에서 공주를 납치해다가 낳은 자식이 모용각이었어. 그 고씨 부인과 모용황은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다고 하더군. 하지만 모용각은 대인의 풍도가 있었어. 대의를 알았지. 아무튼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킨 이후에 모용각을 시켜서 고구려를 방비했는데 고구려가 모용각이 죽기 전에는 연나라 국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여비는 치우동에서 읽은 벽려울의 기록이 간단하여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게되었다. 여비는 하늘을 보며 혀를 찼다.
"적이지만 잘났군."
그 모용각도 결국 죽었고 모용각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벽려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저승에 가서서 한번더 사나이다운 결투를 하지는 않을까? 여비가 모용각에 대해 생각하는데 금발노인이 무용담을 마치고 여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놈이 지금 내말을 다 믿는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금발노인은 여비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여비는 이 금발노인이 모용각과 벽려울의 혈투를 옆에서 지켜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금발노인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여비는 궁금해졌다. 선왕을 따라다니던 가신일까?
"그럼 노야가 죽기를 바라는 벽려흥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그때 청주에서 백일천하하면서 세웠던 황부인이 왕씨이고 그 부인이 훗날 북해 사자도로 도망가서 낳은 아들이 벽려흥이다."
"황부인이 뭐죠?"
"중국에서는 황비지만 백제에서는 황부인이라고 하였다."
여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벽려흥은 여비보다 11살 많은 여비의 친형제였다.
"그런데 왕부인이 낳은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달라고요?"
금발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나뿐인 내 자식이지만 자기 친부도 모르고 엉뚱한 놈을 친부라고 떠들고 다니니 그보다 불효막측한 놈이 이세상에 또 있겠느냐? 그래서 너에게 그놈을 꼭 죽이라고 한 것이다. 나야 그 놈의 친아버지로서 직접 친아들을 죽일 수가 없고 나 대신에 네가 죽여줘야만 마음이 편하겠다."
그 말에 여비는 난감했다. 하나뿐인 형제를 죽여야 할 정도로 그렇게 벽려흥이 죄를 많이 지었을까? 벽려흥도 스물예닐곱이니 나이는 많지만 부왕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해서 유복자나 마찬가지니 애비없는 자식으로 얼마나 많이 비뚤어졌는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부모가 되서 어떻게 아들을 죽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정말 친아버지 맞나요? 혹시 왕씨부인이 다른 놈과 사통이라도 하지는 않았나요?"
여비가 금발노인이 진짜 벽려울이 아닌 것을 알고서 집요하게 캐묻자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친아들이라지만 그놈이 제 친애비를 몰라보고 엉뚱한 놈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려고 하니 죽일 수밖에 없다. 그 하나 없어지면 수만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다."
여비는 비로소 금발노인이 벽려흥을 죽이려는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다른 큰 목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게 무얼까? 어느새 날이 어두웠다. 여비는 금발노인과 마을의 객잔으로 찾아들어갔다. 점원이 두 사람을 이상한 듯이 바라보았다. 금발노인과 백발중년이 들어서니 기인으로 보인 것이다. 금발노인은 가짜 벽려울과 진짜 벽려흥 두 사람을 죽이는데에만 너무 골몰하여서 막상 여비에 대해 소홀하였다. 여비의 몰골을 다시 보니 백제의 피가 섞인 것도 같고 유민군의 일원인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 백제 사정을 이렇게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놈은 이름이 뭐냐? 고향은 어디고?"
금발노인은 그러고보니 여비에게 아직 이름도 묻지 않고 혼자만 말한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여비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여비는 이제 여비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가 지어준 벽려혼으로 나서기로 했다. 또한 이 기회에 가짜 벽려씨들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내 이름은 물흐릴혼(渾)을 써서 혼이라고 하지요."
"혼이라고? 그럼 성은?"
"성은 조금 긴 두 글자인데 바로 벽려지요. 벽려혼이라고 해요."
벽려혼이라는 말을 듣자 금발노인은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후죽순처럼 벽려울이 생겨난다니까 이놈까지도 벽려라고 하다니. 금발노인은 이런 놈들에게 백제 왕실이 수모당하는 것이 싫었다. 금발노인은 여비를 노려보았다.
"그게 사실이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여비는 싱긋 웃었다.
"나도 그 유서깊고 창창한 벽려씨를 하려고요. 벽려혼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좋은 것 같지 않아요?"
금발노인은 벽려씨가 이렇게 사칭당하는 것이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아, 진짜 이름을 말해 봐라."
여비도 아버지가 정해준 자기 진짜 이름 벽려혼을 양보하지 않았다.
"사나이가 한번 벽려혼이면 끝까지 벽려혼이지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금발노인이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꾸라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청주 지방에서 벽려씨라고 말하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겁이 나면 얼른 다른 성으로 고쳐라."
"싫어요. 나는 벽려씨가 좋아요."
여비가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자 금발노인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쯧쯧. 그렇다면 내가 진짜 벽려울인데, 남들이 우리를 친부자간으로 오해하지 않겠느냐?"
금발노인은 자신과 여비가 남들에게 부자처럼 보이는 것이 개망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 어때요? 부자지간이라고 하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의부로 삼으면 되는 것이지요. 보아하니 아주 나쁜 사람같지도 않고 가문도 좋아보이는데."
"이놈 백제 왕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금발노인은 이 막나가는 새로운 벽려혼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앞으로 노야가 만일 비뚤어진 길을 가면 내가 애비의 종아리를 쳐서라도 바로 잡아주지요."
벽려혼은 가짜 벽려울인 금발노인을 실컷 희롱하였다.
"예끼 이놈. 말버릇이 호로새끼같구나. 그런데 말이야, 네놈은 머리도 희고 눈썹도 희고 수염도 희어서 나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데. 진짜 나이는 몇이냐?"
여비가 벽려혼이라고만 하고 속시원하게 본명을 밝히지 않으니 금발노인은 짜증이 났다. 그래서 단초를 찾으려고 나이를 물었다. 그러나 여비는 나이조차도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내 나이가 몇이나 되어보여요?"
"자세히보니 살가죽이 아직 어린 놈같애. 좀 못먹어서 그렇지 바탕은 뽀얗고 질기게 생겼어, 정말이지 처녀애들 피부같애."
금발노인의 관찰은 옳았다. 여비는 덥수룩하게 자라난 그의 흰 수염을 쓸면서 대꾸했다.
"수염만 깎으면 열여섯살 같지요. 피부를 유황으로 매일 닦았더니 반로환동(反老還童)하여 이렇게 고와졌어요. 그렇지만 남들이 우리를 보기에는 칠십 금발노인에 오십 백발아들 같으니 서로 잘 어울리는군요."
금발노인이 오십이라는 여비의 말에 두손 두발 들어버렸다.
"내가 칠십?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냐? 나는 이제 환갑을 막 지났는데. 겨우 예순 하나란 말이다. 그렇다면 네 나이도 오십에서 한 열살 깎아서 내가 생각하면 되겠느냐?"
"열살을 깍다뇨, 그럼 내 나이가 무려 마흔살? 그건 아니고 나는 아직 젊으니까 스무살은 깎아야지요. 나는 이제 갓서른이오."
여비는 자기 나이조차도 고무줄처럼 두배로 늘였다. 그렇지만 그의 백발, 백미만으로 보면 마흔살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그런데 네놈은 어쩌자고 연수강에 뛰어들었냐?"
금발노인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비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지라 거침없이 말했다.
"사실은 내어린 딸이 거기 흑호루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소. 그래서 시체라도 찾아보려다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그냥 나왔소."
"아니 어쩌다가 어린 딸을 죽게 두었느냐?"
"아, 그게 내가 좀 집안일로 바빠서 이름을 감추고 여기저기 다니게 되어서 어린 딸을 친구집에 맡겨두었는데 그 친구가 딸을 희롱했다오. 그래서 딸이 친구집을 나와 여기서 강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소."
여비는 삼십이라고 했으니 열다섯살짜리 딸도 있을 수 있었다. 여비는 마치 자신이 풍패인 것처럼 풍비가 첫 번째 자살하게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안타까운 일이로고."
금발노인은 여비의 말을 듣고서 눈물을 흘렸다. 죽기는 여비의 딸이 빠져죽었다는데 왜 금발노인이 대신에 눈물을 흘리는가? 식당 주인이 요리를 가져오자 여비는 모처럼 음식을 먹게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금발노인과 백발중년이 식사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어시간 동안 포식하면서 긴 식사를 마치고 여비는 점원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야?"
"오늘이 팔월 대보름이오."
384년 음력 8월 15일. 그러니까 여비가 치우동에서 보낸 시간이 넉달이었다. 여비가 사비공주와 인연을 맺은지도 꼭 일년이 되는 날이었다. 여비는 금발노인에게 술을 권하고 그날밤 객잔에서 머무르면서 그가 동굴에서 보낸 넉달동안 세상이 바뀐 이야기를 줏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