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6. 산채의 결전 - 1

금박(金舶) 2015. 5. 17. 22:53


#6. 산채의 결전

 

  모옥의 바깥에서 대랑의 앙칼진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것들이 아직도 안 가고 여깄어? 모두 빨리 안 꺼져?"

 

  "우리는 의형제들인데?"

 

  "뭣이? 나한테 맞아죽고 싶어 환장했어?"

 

  대랑이 다시 소리지르자 공천왕이 하품하면서 멀했다.

 

  "알았어, 그만 갈게. 이제 거의 다 본 것 같군. 소천왕이 정말 센데."

 

  장천왕이 두고 보기 안되겠던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공천왕, 열 번이었어? 열한 번이었어?"

 

  "몰라, 일곱 번 이후로는 세지 않았어. 경탄하고 부러워만 했지. 따져보자, 단 네 초식을 가지고 세 번째 순환을 하다가 끝에 하나는 못마쳤으니까 열한 번이 맞네. 정말 부럽다. 여비의 청춘이."

 

  한 남자로 첫날밤을 막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서 첫날밤을 치르는 사비공주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다가 그들이 욕까지 하다니.

 

  "부럽기는 젠장. 저 여자 아무래도 지독한 색녀인가봐, 이제 여비는 저 색녀 때문에 말라 죽을거야."

 

  "그래, 맞아. 매일밤 저러면 여비가 요절할거야. 빨리 색녀하고 이혼시켜야 돼."

 

  "지 팔자지 뭐. 이제 저 놈은 볼장 다 봤어."

 

  공천왕과 장천왕이 대꾸하였다. 그들은 사비공주가 아니라 여비가 볼장 다 봤다고 생각하니 사비공주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사비공주의 귓속에 들렸다가 멀리 사라졌다. 드디어 떠난 것이다. 여비는 이미 그녀의 배  위에서 엎드려 잠든  뒤였다. 돼지꼬리만큼 짧아야 마땅한 여름날 밤의 악몽이 도대체 왜 이렇게 긴 것인지, 그녀는 너무너무 심신이 한꺼번에 피곤한데 이상하게, 이상하게 정신이 다시 맑아졌다.

 

  나보고 색녀라니, 망할 것들 두고 보자. 그렇게 헛고생하고 기다리다 지쳐서 물러갈 것들이 왜 지금까지 지켜보고 난리야. 진작 순번을 포기하고 일찍 잠이나 자러 갔으면 내가 이 고생 안해도 되잖아. 쌍것들, 날강도들, 원수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잊혀졌던 대랑의 호통 소리가 맴돌기 시작했다.

 

  "빨리 꺼져."

 

  "빨리 꺼져"

 

  아니, 모두 흑심을 품고 제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냥 포기하고 꺼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그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것이 아니고, 그냥 호기심으로 단지 신방을 엿본 것이야? 설마 이 어린 놈이 날 속였을라구? 아니, 이 죽일 놈이 나를 정말  속인 거야? 아니, 이 찢어죽일 놈이 어떻게 나를 속여? 그녀는 너무나 분통해서 '죽일놈'을 외쳤지만 아무런 소리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여비를 옆으로 밀어뜨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에 사비공주는 다시 정신이 멍해졌는데 똑똑한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볼 것 없이 진작에 명문혈을 찍었어야지. 지금 이런 자세에서도 얼마든지 명문혈을 찍을 수가 있었는데. 내가 바보야, 내가 바보 멍청이야. 그때 다시 그녀의 정신을 또렷하게 맑게 해주는 또다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욱 끔직한 것은 사대천왕이 지켜섰던 문밖이 아니라 침대 쪽에 가까운 창문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고 그것은 더군다나 그녀의 고향 백제말이었다. 사비공주가 데려온 삼십인의  백제 무사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였다.

 

  "아휴, 이제 자나 봐. 아무 소리도 안들려"

 

  "저들도 졸리겠지, 안 자고 배기겠어?"

 

  "열한 번이라. 그게 그렇게 좋은가?"

 

  "사비공주가 자꾸자꾸 하자고 그러던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앉는다는 말이 맞는거여."

 

  사비공주는 소리를 질러서 호통을 치고 그들의 입을 봉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가만이 듣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꼬마 산적은 도대체  뭘 삶아 먹었길래 어떻게 열한 번을 해? 나같으면 코피 쏟고 죽었을거여."

 

  "꼬마 신랑을 첫날 밤에 죽이기까지 하면 우리가 대신 화를 입을텐데, 좀 살살하지."

 

  사비공주를 따라온 삼십명의 백제인들은 잔칫상을 받아서 배불리 먹은 뒤에 모두 신방의 창문 아래에 모여 있었다. 행여 사비공주에게 여비나 다른 산적들이 불손한 행패를 부리면 죽기를 각오하고 막을 생각으로 충성스럽게 창문 아래에서 신방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신방에서 주고받는 여비와 공주의 한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사이좋게 합방을 하니 자연스러운 결혼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사비공주 신방의 불침번을 서서 호위하면서 교대로 잠을 자기로 했는데, 여비가 잠들 때까지는 신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고 아무도 잠자지 않았다. 백제 말이 이어졌다.

 

  "결국 누가 이긴거야?"

 

  "막상막하지."

 

  "무슨 소리야, 사비공주가 이겼지. 공주가 무공도 더 세니까 그것도 더 세지."

 

  "이사람아, 이건 무공하고 다른 거여. 제 아무리 무공이 센 남자라도 여자에게 당할 재간이 있어? 그 정도면 막상막하지."

 

  사비공주는 자기가 판정승을 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승리의 상장은 과연 무엇인가?

 

  "아무튼 우리 공주가 무공이나 음덕이나 모두 보통이 아녀. 어쨋든 음으로 양으로 완전히 소마두를 압도해 버린 거라니까. 이제 소마두가 공주 말이라면 꺼벅하고 죽을 테니까 두고 보라구. 이제 이 불기산 산채하고 불기현 땅은 몽땅 백제 것이여."

 

  백제인들의 입방아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는 세상이 더 어지러웠다. 차라리 안 들을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그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냥 다 잠이나 자라고 소리치자니 그건 더 이상했다.

 

  "아이고 피곤하다. 새신랑도 잠들었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 자자."

 

  누군가 중얼거리자 안도가 되었다. 그래 자라, 제발 자라.

 

  "둘이 이제 떨어졌나 한 번 확인해 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린가, 잠시후 누군가 창문 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니, 아직도 꼭 붙어 있어, 더 꽉 끌어 안는데 그래?"

 

  "둘이 본래 천생연분인가봐"

 

  사비공주는 또 누가 창밖에서 들여다본다고 하자, 여비 몸으로 그녀의 몸을 가리기 위해 여비를 더욱 꼭 안았다. 그랬더니 천생연분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망할것들. 사비공주는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이제 어린 산적 여비 하나 죽여없애서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내일 백제 군사들을 보고, 한마디로 열마디를 만들어 전하게 되면 필경 백제 한산성까지 이 초야의 격전 소식이 들어갈 것이었다. 결국 사비공주는 다시 백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혹시 여비를 데려간다면 몰라도. 어쨋든 백제 군사가 창밖에서 그녀를 호위한다는 사실에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리며 그녀는 껌껌하고 아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였다. 아주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꿈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그녀의 얼굴을 핱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젖가슴이 간지러웠다. 어느 틈에 다리 사이가 허전한 느낌에 소르라쳐 놀라며 그녀는 눈을 떴다. 그녀는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직도 나신이었고 여비가 그녀의 젖가슴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비는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사비공주의 몸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고 그녀는 아픔을 피하여 위로위로 올라가다 보니 침대 끝에 머리가 닿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만."

 

  그러나 그 작은 소리가 여비에게도 들렸다.

 

  "정말? 그럼 좋아, 딱 열두번만 채우고."

 

  그녀는 한 번만 더 참자 하고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여비가 숨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면서 낙엽처럼 그녀의 가슴에 묻혀올 때, 그녀는 다리를 좁히면서 마지막 기운으로 그를 밀어내어 침상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온 몸이 매를 맞은 것처럼 노곤하였고 특히 아래쪽 살점들은 도무지 내 몸같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새로 다시 한 번인데. 아직 열한 번 남았는데."

 

  자기도 기운이 없어서 밀려 떨어져 비틀거리고 일어서는 주제에 여비가 아직 입은 살아서 중얼거렸다.

 

  "이, 짐승아."

 

  새우잠이라도 자고 나니 기운을 다시 차린 그녀의 첫마디가 앙칼지게 터져나왔다. 그녀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앉아, 밤새 깔고 누웠던 겉이불을 비로소 걷어올려서 그녀의 하반신을 가렸다.

 

  "와, 날이 밝았네."

 

  이미 해는 높이  떠올라 진시(辰時;오전 9시)가 가까워 있었다. 여비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그녀는 백제 군사들이 창밖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창 좀 닫아."

 

  여비가 창문을 닫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침대 밑에 털썩 앉아서 그녀를 올려보았다.

 

  "새날 새아침 새신부, 꿈같다. 상누이"

 

  그녀는 여비의 천진스런 얼굴을 보며 죽일놈 욕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비공주는 이제 자기 손으로 여비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첫 번째는 속아서, 두 번째는 실수로, 세 번째는 내친 김에, 그리고 또 네 번째는 홧김에, 그러나 열두 번째는 뭐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내가 미쳐서? 그러나 그녀의 말을 믿어줄 백제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자, 이제 마음을 돌려 먹고 저 용비늘을 가진 잠룡을 어떻게든 키워 보자. 어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여비야, 이제 누이 말을 잘 들어"

 

  "상누이야, 원래 소천왕은 착해"

 

  "어제처럼 나쁜 거짓말은 다시 하면 안돼. 거짓말이라도 그런 말은 듣기 싫어. 또 그러면 정말로 피눈물나게 때려줄거다."

 

  "어제, 무슨 거짓말?"

 

  여비가 시치미를 뚝 떼자 사비공주는 눈쌀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첫날 아침부터 되게 맞을래? 본 공주가 네 거짓말을 다 아는데도."

 

  "그래도 난 모르겠는데?"

 

  여비가 끝까지 자백을 안하니 사비공주의 노기가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좋아, 네가 네 죄를 정녕 모른다, 이 말이지?"

 

  그녀가 손을 올리자 여비가 냉큼 물러나 앉았다.

 

  "그렇다고 신랑을 때리려고 하면 돼? 가르쳐 줘야지, 누이가."

 

  그러자 다음 말에 뜸을 들였던 사비공주의 말은 여비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냐, 가르쳐 주마. 본 공주가 몸소 오늘부터 너의 엄마처럼 의형제를 얻으러 다니겠다. 오라버니도 좋고, 남동생도 좋고, 차례차례 스물네 명은 얻을 거야."

 

  여비는 두꺼비처럼 눈을 껌벅거렸다.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거.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 산채에서는 누이가 싫으면 안해도 되는거야. 누이가 의남매를 맺지 않으면 그만이야. 어떻게 의남매를 강제로 하겠어?"

 

  여비는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벌써 알아챌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태연하게 응답했다.

 

  "그런데 그 말을 왜 어제는 안한 것이야?"

 

  "그래? 흥. 그런데 내가 오라버니들이 싫기는 왜 싫어? 나, 의오라버니 좋아. 그러니까 가서 사대천왕 다 오라 그래. 내가 지금 오라버니 삼는다고."

 

  여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거짓말이 탄로난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한 방에서 잠 잘 자고 나서 어디 갔다온 데도 없는데 어떻게 탄로가 났을까? 여비는 사비공주보다 먼저 잠들어서 대랑이 사대천왕을 쫓아버리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이, 정말 화났어?"

 

  "아니, 화 안났어."

 

  "그런데, 왜 그래?"

 

  "재밌어. 그게 정말 재밌어서 그래. 사대천왕, 내 오라버니하러 안 온다고 하면 창문 밖에 백제 장사들 다 들어오라 그래, 다 의동생 삼을거야."

 

 

 

'비류혼(沸流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채의 결전 - 3  (0) 2015.05.20
#6. 산채의 결전 - 2  (0) 2015.05.19
#5. 한여름밤의 꿈 - 3  (0) 2015.05.16
#5. 한여름밤의 꿈 - 2  (0) 2015.05.15
#5. 한여름밤의 꿈 - 1  (0) 201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