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조어(白鷗釣魚)]는 여제검법 삼초식으로서 강물 위를 나르는 기러기가 물고기를 쪼아올리는 검법이었다. 사비공주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신검합일의 경지처럼 수초를 베듯이 방어를 헤치고 그의 정수리를 공격해왔다. 여비는 왼손의 장창을 팔랑개비처럼 돌려 우산처럼 방어하여 그녀의 홍학검을 막고 또 쌍절곤으로는 그녀의 팔목을 때렸다. 일순간에 그의 장창이 그녀의 난도질에 여러 토막이 났고, 장창을 쥐었던 왼팔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통증이 심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칼을 쥔 손목에 여비의 쌍절곤이 적중되어 그녀는 쥐었던 홍학검을 놓쳐버렸다. 하나뿐인 그녀의 수호신 홍학검을 놓친 사비공주는 순간적으로 아찔하였다.
여비가 불과 몇시간 전의 황금장에서 보던 그 여비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그의 쌍절곤이 이 정도로 정교한 것은 미처 몰랐다. 아무튼 싸울수록 여비의 실력이 늘었다. 그러나 사비공주는 놀라운 신기를 선보이면서 공중에서 떨어지면서도 몸을 다시 공중에서 돌려서 떨어지는 홍학검을 쫓아가 받아내었다. 여비가 그녀를 물리친 것도 놀라웠지만 그녀가 한 번 놓쳐버린 칼을 비범한 경공술로서 재주넘기로 되잡는 것도 경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여비도 장창이 사비공주의 홍학검에 다 토막나고 없어져서 오른손의 쌍절곤만으로는 그녀를 막아내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것을 눈치챈 흑천왕이 무쇠지팡이를 던졌다.
"여비야, 무쇠지팡이가 좋다."
무쇠지팡이는 검을 대신하지만 여비는 검술로서 만큼은 도저히 그녀의 검법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무쇠지팡이를 받지 않고 독천왕의 철환 탁발을 청했다.
"마누라 될 사람을 찔러 죽이면 안되니까 검은 필요없어요. 차라리 탁발을 줘요."
독천왕이 응답하였다.
"아미타불."
독천왕이 그의 주무기인 탁발처럼 생긴 철환을 던졌는데 사비공주의 뒷머리를 위협하며 날아왔다. 사비공주가 몸을 피하자 여비는 날아가는 탁발을 나꾸어챘다. 여비는 손을 바꾸어 오른손에 탁발의 쇠사슬을 쥐고 탁발을 돌리며 왼손으로 쌍절곤을 쥐었다. 사비공주는 짜증이 극에 달해서 여제검법 마지막 초식인 [일학붕천(一鶴崩天)]을 생각하였다. 황새가 날개를 펴듯이 하늘을 가리고 무너지는 산사태처럼 칼질하는 그 초식이면 여비를 산산조각내어 살가루로 분해해 버릴 수 있었다.
"소마두, 본 공주에게는 너를 죽일 무서운 초식이 있다. 굳이 그 초식을 받겠느냐?"
"흥, 본 소천왕을 죽이던지 서방으로 모시던지 알아서 해라."
이미 그녀의 세 번째 초식인 백구조어로 인해서 혼비백산이 되어 죽음의 그림자를 맛본 여비는 더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래도 목숨은 질긴 것이고 그 목숨을 지키려면 참았어야 되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여비는 덤벼들었다. 사비공주는 결국 마지막 비장의 초식을 외쳤다.
"일학붕천"
그러나 굳이 살수를 쓰고 싶지 않아서 사비공주는 보통보다 높이 뛰어올라 천천히 초식을 펼쳐서 그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녀는 이층 루각보다도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우아한 황새의 날개를 펴고 여비를 향해 내려오는 순간 환한 달빛을 가린 하얀 죽음의 날개가 여비 머리 위를 덮쳤다. 그 순간 여비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검을 맞받지 못하고 몸을 날려 망해채 누각 밑으로 숨기 위해 굴러 들어갔다. 누각에 일층, 이층이 있지만, 일층 아래 반 지하의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비가 사라진 빈 땅을 검망으로 한자 가량 파들어가며 초식의 위력을 십분 보여주었다. 이제 여비가 [일학붕천]의 위력에 겁을 집어먹고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그녀를 단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풀풀이 산화되어 날리는 흙먼지 속으로 여비는 자기도 모르게 탁발을 날려 무엇인가 걸리자 사슬을 잡아 당겼다. 탁발은 스스로 운좋게 그녀의 왼발 발목을 휘감았고 그가 쇠사슬을 당기자 [일학붕천]의 초식에 전력을 다하여 약간 탈진했던 그녀는 쇠사슬에 끌려 누각의 지하 밑으로 빨려들었다.
사비공주가 나즈막한 누각 아래서 다시 몸을 고쳐 잡아 일어섰지만 키가 커서 허리를 굽힌 상태였고 왼팔에는 탁발이 감겨 있고 사슬끈은 여비가 쥐고 있었다. 한편 그녀의 오른손의 홍학검과 그의 왼손의 쌍절곤이 마주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이 엎어지면 코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고 그의 왼손보다는 그녀의 오른손의 검이 빨라서 순식간에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눈 앞의 여비의 목에 칼을 내지르기를 고민하는 찰나에, 여비가 오른손을 당겨 탁발의 사슬에 감긴 그녀의 왼쪽 다리를 치켜 들고 다시 왼손의 쌍절곤으로 그녀의 무릎을 휘감아 올렸다. 바로 그 찰나 사비공주는, 상체가 빈 여비를 다시 한 번 찌를 기회가 있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의 발 아래에 자빠졌다. 이제 용궁선녀인지 거북인지는 발랑 뒤집어졌고 여비에게 잡힌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 색시야,"
여비는 양 손에 잡은 무기를 놓고 두 팔을 벌리며 사비공주의 몸 위에 엎어져 끌어안았다. 그녀는 아직 오른손에 홍학검을 쥐고 있었고 다시 그를 벨 수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마음을 고쳐 칼자루를 가슴 앞으로 끌어들여서 그의 명치끝을 홍학검의 칼자루로 찔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명치의 거궐혈을 찔린 여비는 임맥이 막혀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다.
"흑"
가슴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여비의 비명이 있었다. 사비공주는 중심을 잃은 그를 옆으로 치우고 일어나 누워있는 그의 엉덩이 사이로 회음혈을 걷어찼다. 그제서야 여비는 명치 아래서 막혔던 임맥의 기가 통하면서 숨을 다시 쉴 수가 있었는데 사비공주는 그를 내깔려두고 누각 밖으로 나왔다. 여비는 너무 아파서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독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홀로 누각밖으로 나선 사비공주에게 물었다.
"소천왕은 죽었냐?"
그의 눈빛은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이 살기를 내뿜었다. 역시 그녀가 여비를 죽였다고 해도 살아돌아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공주는 독천왕을 한번 흘기고서 턱짓을 해서 누각을 보라고 했다. 그때 여비도 누각 밑을 기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억지로 웃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어. 그래서 무기를 다 버리고 꽉 끌어안았는데 방심한 사이에 내 급소를 쳤어."
여비는 입만 겨우 살아서 또 억지를 부렸다. 사비공주로서는 칼자루로 여비의 입 아래 설근혈 혈도를 찔러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여비의 조둥아리가 항상 사고뭉치였다.
"저게,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다시 덤벼 봐."
사비공주는 여비를 노려보며 다시 혼내줄 기세였다. 그러나 여비는 사비공주와 목숨을 건 싸움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싸워봐야 안된다는 것은 여비도 알고 사대천왕도 알고 대랑도 알았다. 이제까지 산채 형제들에게 그가 사비공주와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슬며시 독천왕 뒤로 피했다. 독천왕은 여비의 목덜미를 한손으로 줏어 들어서 누각 위로 던졌다.
"모두 들었지? 이미 싸움은 끝났다. 소천왕이 이긴 거야."
때맞추어 산채의 도적들이 모두 함성을 질렀다.
"와"
"와"
"와"
독천왕이 산적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을 이었다.
"얘들아, 소천왕에게 준비했던 혼례복을 입혀라. 그리고 풍악을 울려라."
사비공주는 더 이상 항변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건 저기."
사비공주의 뒤늦은 억울한 변명은 산적들의 함성 속에 묻혀버렸다. 그녀는 결코 이런 비적질 같은 결혼에 동의할 수 없었다. 흑천왕이 사비공주에게 다가와 어깨를 쳤다.
"걱정마라, 네 옷도 다 준비되어 있어."
그러면서 그녀에게 나즉하게 속삭였다.
"도망갈 생각마라. 그랬다가는 네 무공을 폐지해 버릴 것이야."
사비공주는 다시 싸워야 한다고 외치려다가 시끄러운 풍악과 함성소리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간사한 놈, 차라리 죽여버릴걸. 사비공주는 후회막급이었다. 왜 여비를 못죽였을까? 곧이어서 대랑이 누각을 걸어 내려왔다.
"네가 마음을 고쳐 먹어서 정말 고맙구나. 하지만 너도 보았듯이 내 아들도 괜찮은 애야. 인정도 많고, 재주도 많아. 게다가 운도 좋지."
제 자식이 예쁘지 않은 어미가 없겠지만 왠지 사비공주도 풍비에게 자식처럼 그렇게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대랑의 눈에도 여비가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여비가 그녀와 맞서 버틸 수 있는 실력이라는 것이 기특했고 그것보다는 여비의 운이 무척 좋았다고 생각했다. 필경 사비공주가 여러 수 봐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이 여비의 타고난 여복이려니. 어미라는 자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어서 평가하기 마련이다. 사비공주가 멍하니 검은 하늘의 창백한 보름달만 바라보는데 대랑이 다시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녀석에게 정들게 될 거야."
바로 그거였다. 시간이 지나면 드는 정. 그것 때문에 사비공주는 한 시간 넘게 싸우면서 여비에게 정이 들었고 마지막 순간에 여비를 찌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저 동생같은 정이었는데 저 되지못한 거짓말장이 산적 나부랑이를 신랑으로 삼기에는 그녀의 운명이 너무 기구했다. 고향을 떠나 대륙에 들어서자마자 대륙의 텃세가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피곤한지, 정신이 탈진되었는지 사비공주의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안돼,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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