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 41 년 12 월 1 일 오후 흑응회 의사당 빈청에는 금년의 마지막 월례회를 하기 위하여 각대 대장 이상이 모여있었다. 준갈이부족을 마중간 백호대의 고병갑 대장만이 보이지 않았다. 대형 진원성과 회주부 총관 중에서는 해녕, 아린, 석도만 참석하였으며,회수부에서는 3 명, 그리고 대장들 9 명, 이렇게 총 16 명이 참석을 하였다. 초회수가 보밀인재를 선창하여 모두 복창을 하였으며, 다음은 각 대에서 만든 기본적 자료를 나누어 주고 그것들을 서로 바꾸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다음은 각 대장들이 서로 간에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회수부에서는 해녕총관이 총관의 숫자가 변하였음을 발표하였다. 우룸치에서 오고있는 총관 3 명이 더 있어서, 커얼친 공주와 함께 총 9 명의 총관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흑응회 내부에서 회원들이 계속 화제로 삼는 것으로 피난처를 만든다는 대형의 선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치료해주는 피난처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회원들이 있었으며, 가능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형 활불의 커다란 영력(靈力)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그렇게 만들려면 많은 은자가 필요한데 과연 무슨 수로 그 많은 은자를 댈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또 피난처를 만들려는 전토의 크기나 황제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점 등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는 측은 주로 젊거나 어린 사람들이 많았으며, 불가능하다는 측은 나이가 많거나 세상물정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것을 진원성은 결론을 내려주어야 할 입장이 되었으므로 입을 열었다.
"피난처를 어떤 회원들은 태평천국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지상낙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합니다. 저는 회원들에게 또 각 대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싶어요. 자꾸 좋게 만들다 보면, 그것이 어느날 지상낙원에 일천 걸음 떨어져 있던 것이 구백 걸음으로 좁혀져 있을 것이며, 또 더욱 노력을 하면, 그것이 어느새 팔백 걸음으로 좁혀져 있을 것이라고요. 한 걸음만에 지상낙원까지 가려고하면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천 걸음으로 갈려고 마음먹고 출발하여 백 걸음을 걸었다면 어느새 구백 걸음으로 아니 그게 안된다면 구백오십 걸음으로 가까워져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리고 영영 지상낙원으로 못가더라도 피난처를 만들어 만성 한 명이라도 구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일을 해낸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좋은 말씀입니다."
"사실 별 것도 아니에요. 진짜로 좋은 세상은 병이 없어서 의원이 필요없는 세상이고요, 강도나 도둑이 없어서 경비대가 필요없는 세상이고요, 잠잘 데가 많아서 집도 필요없고, 기후가 좋아서 옷을 입을 필요가 없고, 제일 좋은 것은 먹지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아서 농사지을 필요도 없는 것인데... 하 하 하 그런 세상은 불가능하니까.... 거기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이지요? 그렇지요?"
"별 것 아니라는 대형님 말씀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그런 신선국은 어차피 불가능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 한가지라도 만성들, 회원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해가다 보면 조금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형님 말씀도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자, 제가 각 대장님들께 질문하나 드리지요. 우선 토번 구게국에서 온 소녀들 40 명은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이것은 누가 답변을 해야하나요?"
"회우님, 그것은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처녀들 40 명은 회원들 가정에 한 명씩 기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중원의 풍속도 배우고요, 말도 배우고, 두 달간 학숙이 쉬니까 이제 내일부터는 학숙의 빈 숙소와 강의실을 이용해서 중원말과 관습, 예절, 문화를 가르치고, 2 월 쯤에나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루는 것으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혼인할 대상을 짝지워주는 일은 아린총관님께서 해주셔야지요?"
"마 대장님,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혼인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자연스럽게 되도록 해야 하지요. 구게국 소녀들과 나이든 처녀들을 구분하여 소녀들은 구게 소년들과 먼저 서로 만나보도록 하고요, 나이가 좀 든 처녀들은 회원들 중에서 원하는 남정들을 만나보도록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딱 2 월에 모두 혼인이 될 수는 없지요."
"그것은 아린총관님 말씀대로 가는 것이 맞는 것 같군요. 다음은 이민구 대장님께 묻습니다. 지금 제남부의 빈민들의 상황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설명을 좀 해주시기를 ..."
"미곡대 이민구입니다. 미곡대에서 지난 11 월에는 미곡을 10 월에 비해서 두 배를 풀었습니다. 제남부 서쪽에 있는 각 현들에 빈민들의 수가 갑자기 많아진 것입니다. 서쪽에서 빈민들이 많이 밀려들어 왔어요. 가뭄이 심하여 소출이 줄었고, 그에 따라 흉년을 피해 피난온 것이지요. 12 월도, 1 월도, 하곡이 나오는 5 월 까지는 계속 두 배로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회는 섬에 동전 220 문으로 푸는데, 시세는 이미 300 문 까지 올랐습니다."
"미곡가가 미쳤구만요? 지금 지주들 측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지요? 뭐라고 할 때 까지 버티고 해봅시다."
"은항대 양방입니다. 흑응은자가 처음 시작해서 얼마 동안은 한 개도 안남고 풀려 나가다가 얼마간 주춤하여 관고에 쌓이는 것 같더니 년중에 들어와서 다시 날개단듯이 나가버려 지금 관고에 응자 한 개도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은자를 찍어내는 사람을 지금의 두 배로 늘리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데 회수님께서 내년도 계획에 포함시켜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소로(小爐) 다섯 대와 찍는 일손 30 명만 늘리면 두 배로 만들 수가 있는데... "
"보고서에 보니 금년에 지금까지 만든 것이 11만5천 량이구만요. 그런데 한 개도 없어요? 제가 며칠전 신안견직포에 들러서 말을 들었어요. 제남 인근 만성들이 흑응은자로 바꿔다 집에 파묻어둔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요."
"은항대 양대장님 요청은 내년도 계획에 반영하겠습니다."
"포 대장님 낙양 소식 좀 따끈한 걸로다가 한 말씀해 주세요?"
"정탐대 포가입니다. 회수님께서 아마 조금있다 말씀하실 걸로 봅니다만. 말이 되었으니 말씀드립니다. 낙양 보호사업을 우리에게 채간 것은 역시 기택이라고... 뭐 거의 구 할 이상의 가능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포가야 그러면 우리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거냐? 아니면..."
"양대장님, 그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저는 양대장을 이제부턴 깍듯이 형님으로 대할 것입니다. 지난 번 대형님의 시강을 듣고서. 양 형님 이젠 욕질은 절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내년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네요. 포가가 속을 다 차렸으니 말이에여... "
"고대장이 없으니 조용하구만요. 고대장이 그 말을 들었으면 금방 쳐들어가서 쓸어버리자고 했을텐데..."
"그 문제는 제가 답변을 하겠어요. 기택이 거의 확실하다해도 관아가 개입되어 있어서, 찾아올 방법은 사실 마땅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숙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 주모납치사건 역시 저와 회수부가 잘 검토하여 대책을 마련한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서쪽 성(省)들이 가뭄 때문에 흉년이면, 하남성도 섬서성도 힘들텐데... 준갈이족들이 오면서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런지..."
"시간을 따져보면, 준갈이 족은 이미 하남성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우리 미곡을 300 섬 씩 싣고 4 대(隊)가 떠났으니 1200 섬이면 당분간 먹고 지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 1800 섬을 더 보낼 예정입니다."
"예, 그것은 참 잘하셨네요. 내년도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회수부에 저의 의견을 전달하였습니다. 2 장원 공사는 계속하고요, 2 장원 임대는 내년도 상반기 중으로 다 될 것이니 걱정 마세요."
"제남부 추관을 통해서 지난 28 일 들어온 소식입니다. 등주부 추가 식민의 건은 산동성 순무에게 계류(繫留)중이라고... 그러니 아마 중앙정부에다가 보고를 올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또는 어쩌면 보고조차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우리가 어쩔 수 없지요."
월례회의는 이후로도 몇 가지의 사안들이 더 이야기되었다. 그중에 모두 걱정하는 것은 역시 준갈이족들을 먹고 살게 하는 일거리였다. 가장 얻기 쉬운 일은 농사였지만 그들이 유목족이라 농사지을 줄을 모르므로 당장 농사짓게 할 수는 없었다. 또 농토가 없는 것도 함께 문제였다. 가장 많은 만성들이 농자이지만 적어도 2 년은 일을 배워야만 농삿군이 되는 법이었다. 초 무량 회수가 '계속 좋은 일감을 찾아보기로 합시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회의는 끝났다. 진원성은 돌아가는 각 대장들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뒤에 남겨 놓은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낙양에서 보호사업을 잃고 쫓기듯 제남으로 와서 졸지에 밥벌이 못하는 회원이 늘었다는 인식에 더하여, 준갈이족 500 호가 유목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헛손 식구로 빌붙게 되어있다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일 것이다. 흑응회 간부들이 갖은 것은 문제가 무엇인줄 아는데 답을 얻을 수 없을 때에 느끼는 답답함이었다.
그런데 진원성이 느끼는 답답함은 좀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6 년 전 흑응회를 떠날 때에는 흑응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듯 다보이는듯 하였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조직이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다 파악되지 않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진원성은 과거 제영반점에서 점소이를 할 때에 천불산을 뛰어다니며 생식을 하여 한 겨울을 지나고 키가 껑충 큰적이 있었다. 그래서 큰 옷을 한꺼번에 여러 벌을 샀으며, 그것이 신나서 혼자 껄껄거리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자기의 창술 수련 중에 느꼈던 어색함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창술을 포함한 모든 무술 수련이란 공격점과 방어점의 이동 궤적을 완성해가는 훈련인 것이다. 공격 수련이란 공격점 이동궤적으로 가상의 적을 공격하면서 상대의 방어점 이동 궤적을 상상하여 그 이동 궤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방어 수련이란 방어점 이동궤적으로 가상의 적을 방어하면서 상대의 공격점 이동 궤적을 상상하여 그 이동 궤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술수련의 일 단계 완성은 공방이 이루지는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다. 공간의 장악이 무엇인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방점이 몇 개이며,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든 이동 궤적을 상상의 공간 속에 담아두고 점의 이동이 끝나기 전에 그에 대응한 수법을 상상 속에 마련하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공방이 이루어질수 있게 상상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공간의 장악이다.
무술시전자는 상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대응을 해서는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기 쉽다. 아니 거의 허용하게 된다. 상상의 공간에서 공격자의 공격점 이동 궤적을 연상하여 사전에 대응해야만 공격을 회피하거나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간 장악을 무술 1 단계 완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갑자기 키가 커지면 상상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궤적과 실제로 움직이는 궤적은 차이를 나타나게 됨으로 공방의 동작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진원성은 한동안 이런 어색함을 느꼈으며, 공간에서의 달라지는 부분을 완전히 적응 수정한 후에야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었다.
진원성은 지금 자기가 겪는 답답함도 이런 어색함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였다. 생각해보니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동안 흑응회가 커나온 것을 보자면 진원성은 감히 엄두도 못낼만큼 너무나 빨리 너무 커지고 말았던 것이다. 제남에서 처음 흑돈 400 호 전 후, 거기에 백호파 200 호, 동창부 난민 중 바로 정착한 100 호, 동창부 난민 중 등주부 식민 300 호, 낙양에서 무뢰들 50 호, 보호사업 400 호, 안문관 늑대 230 호 이렇게 하면 총 1680 호이며, 여기에 학숙 등으로 20 호 증가하여 총 1700 호인데, 여기에 다시 준갈이부 500 호가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총 2200 호, 한 호당 식구가 4 명 반 씩이라면 만성 수가 9900 명, 약 만 명인데, 이렇게 공간 장악이 되지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피난처가 전토 2만 경과 인구 25만 명 규모라면 참 어렵겠구만 하고 생각되었다.
공간장악이 되지 않으면 전쟁은 할 수 없었다. 무술 수련에서는 공간장악이 되지않은 수련생 때에는 혼자서 형을 수련하게 하고, 때때로 약속대련을 하여 공간장악을 배우게 하고 있음을 진원성은 알고 있었다. 진원성은 이런 조직의 일에서도 공간장악 같은 배움의 길이 있을까 잠시 생각하였다. 이것은 진원성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깨우침을 주었다. 또 어쩌면 이것은 몸집이 커진 흑응회가 겪어야할 새로운 공간장악의 기회인 것이다. 진원성은 이것을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어떤 위기라 할 수 있었다. 흑응회의 관고에 은자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여기서 잘못되면 뜻밖의 우왕좌왕 갈피를 못잡고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회가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진원성의 생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준갈이족 생계 수단 확보였다. 그 다음 공간장악 문제는 깊이 생각해가야 하는 것이라 결론을 지었다. 이렇게 되니 잃어버린 낙양보호 사업이 너무나 아쉬웠다. 지금 당장 년에 이만 량 수입의 보호사업이라도 있었다면, 낙양에서 주택 짓는 일과 제남에서 2 장원 짓는 일을 하면서 조금 숨이 덜차게 도모해 갈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원성에게 간절해졌다. 지금 흑응회에 은자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흑돈 사업과 응철점, 은항점, 등주 식민지 뿐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크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육체를 키워줄 영양분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을 키워줄 마음과 지식이었다. 조직체가 크려면 은자를 벌어오는 일거리와 조직을 유지해줄 마음과 지식일 것이었다. 은자는 당장 어쩔 수 없으니 차차 준비를 해야할 것인데, '조직의 마음과 지식'이란 무엇일까? 이날은 월례회의 때문에 독수리춤 연습을 하지못한 날이었다. 그러나 회의를 함으로써 다른 대장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게되고 흑응회의 당면 문제를 피부에 접하여 느끼게 되는 것이니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회의록을 읽어서는 얻을 수 없는 즉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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