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행은 6 월 11 일에 북경성을 출발하여 하루에 팔십 리 정도를 동북 쪽을 향하여 나아갔다. 표물을 실은 마차 6 대 이외에, 표행에서 사용할 이런 저런 물건들(식량, 취사도구, 말먹이, 식수, 모포, 유지, 천막 등)을 실은, 여분의 보급 마차가 한 대 더 있어서 표행은 마차 일곱 대로 구성이 되었고, 표사들은 전원이 말을 타고 있었으며, 모든 마차 뒤에는 또 유사 시에 교체할 말 두 필씩 메달고 있어서, 일행이 끌고 가는 말은 총 43 두이며, 인원은 총 45 명이었다. 맨 앞은 표두가 나섰으며, 범대인과 진원성은 여분의 마차에 타고서 표두의 뒤를 따라갔다. 맨 뒤에는 표사 중의 왕 고참이 마지막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각 마차의 앞에는 마부가 탔으며, 뒤에는 조수가 타고 행렬을 이루어 움직였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듯 타오르고, 표행 일행은 모두들 더위에 물을 흘리듯 땀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다들 아주 훈련이 잘된 사람인 것처럼 대열을 흩트리지도 않고, 표두의 지휘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갔다. 하루 중 가장 더운 한 낮에는 그늘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면서, 말도 사람도 한 시진 가량은 쉬어가면서, 나아갔다. 그리고 6 월 26 일이 되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산해관(山海關)을 지나게 되었다. 표두는 산해관을 지키는 군병들과 잠시 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물목 검사도 보는 듯 마는 듯 하고, 통과해서 지날 수가 있었다.
진원성은 북경성에 있으면서 보았던 것과 궁금했던 여러가지 일들을 범대인에게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왼쪽에 우안문이 있는 이유는 황제가 모든 것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제의 앉는 자리는 항상 등을 북쪽에 향하고, 정남쪽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우안문이 되는 것이며, 정양문의 문 마지막 획이 곤으로 내려지고 만 것은, 정양문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며, 황제는 상징적으로 용(龍)의 신분이기 때문에, 문의 마지막 획에 있는 갈고리 모양의 글씨가 용의 비늘에 걸릴까 봐서 문의 글씨에서 갈고리 모양을 없애고 쓴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범대인은 진원성의 질문을 듣고는 답을 해주시기는 하셨지만, 더위에 좀 힘이 드시는 듯하여, 진원성도 귀찮게 해드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해지고 말았다.
산해관을 나서니, 한 없이 펼쳐지는 요동평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다 드물게 보이는 나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개간의 흔적조차 없이 버려진 땅이었고, 아주 드물게 보이는 오두막 집들도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된 듯이 지붕이 한 쪽으로 내려앉거나, 벽 한 쪽이 쓰러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역참에서 가까운 곳에서만 얼마간의 땅이 경작이 되고 있었으며, 그도 소출이 썩 좋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또 지나치다가 아주 드물게 만나는 사람들도 입성이나 얼굴 표정들이 힘들고, 지친 것이었으며, 표행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혹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서 힐끔거리면서 보는 것이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쉴만한 그늘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아서, 사람들은 건육포나 건량으로 점심을 때우고, 말 들에게만 먹을 것을 주고, 물을 먹인 후 바로 출발하였다. 7 월 1 일이 되자 영원위(寧遠衛)에 도착하였다. 영원위에는 소주 휘주회관 이관주님의 장남이 정백호로 군무에 임하고 있는 곳이었다. 정백호란 부하 110 명을 거느리는 군대의 조직 장으로 하급 군관이었다. 범대인은 영원위에 들어서자 수문병에게 바로 정백호 이병궐를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이병궐 정백호는 현재 영원위 관할 지역 경계를 순찰 중이어서, 내일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 것이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범대인은 대표두(戴驃頭)에게 양해를 구하고 영원위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하였다.
역참은 관인들의 왕래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일반민들도 돈을 내면 이용할 수 있었다. 역참에는 취사시설까지 완비되어 있어서, 표행의 경우에는 대규모 인원이기에 객점보다는 역참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여, 조천표국 일행도 역참에 머물며, 하루를 보내었다. 대표두(戴驃頭)는 부지런히 위(衛) 안팎으로 다니면서 표사들에게 지시도 하고, 위의 역참에 사는 여러 사람들도 만나고 하는 것이 보였다. 쉬는 하루 중에도 표사들은 교대로 표물을 지키고 있었으며, 마부와 조수들은 말들을 돌보고, 마차 들을 점검하며, 여러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는 일에 메달렸다. 저녁 무렵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로 굵은 빗줄기가 되어 뜨거운 대지를 식혀주었다.
범대인과 진원성이 있는 방으로 이병궐이 찾아왔다. 이병궐은 정백호로 군무(軍務)에 임하는 위치인지라 요동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거의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범대인은 그 내용을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범대인은 소주의 이관주 님의 안부를 전하고, 집안 소식과 오면서 북경에서 잠깐 만난 둘째 이병기의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알고 싶은 요동의 정세에 대하여 물었다.
"병궐아, 그래 요즘 요동은 어떠냐? 이성량 장군이 다시 오셔서 정세가 안정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들을 하더라만."
"일단 표면적으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지요. 원래부터 우리 명나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하여, 오랑캐들이 서로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것을 첫째 전략으로 삼았지요. 동북 쪽으로는 이성량 장군이 건주여진을 지원하여, 누르하치라는 족장이 나서서, 건주여진을 완전히 장악을 하였고요, 그래서 해서여진의 세력과 비등해졌지요. 동해여진은 아직 좀 힘이 약하지요. 북서쪽으로 있는 달단족 들은 아직도 사분오열되어 무력한 상태인 셈입니다만, 건주여진을 장악한 누르하치의 힘이 급속하게 강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볼 어떤 낌새라도 있는 게냐?"
"예, 마시(馬市)라고 하여 우리 명나라에서 지정해준 말 교역 시장이 현재 세 곳이 있지요. 광령(廣寧)과 무순(撫順)과 개원(開原)입니다. 무순은 건주여진이 교역을 관할하고요, 개원은 해서여진이 관할합니다. 동해여진은 해서여진과 함께 개원에서 같이 교역을 하고요, 광령은 주로 달단족들이 교역을 합니다. 이 세 곳의 교역량과 교역의 물목들 그리고 물목의 가격이 어찌 변화되는가를 보면, 세 곳 중에서 건주여진의 힘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여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동창에 있는데, 이곳 요동에서 근무를 하였지요. 지난 3년 간의 변화를 지켜본,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건주여진은 이미 물건 가격을 다른 두 곳의 마시보다 절반의 값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해서여진이나 달단족들에게 다시 이익을 붙여서 넘기는 장사도 하고, 두 배의 이익을 얻고 팔기도 한다는 것이 되지요."
"......"
"그리고 교역 물목이 소금과 중품 차가 같은 중저가 물목이 광령과 개원이라면, 무순은 미곡과 비단과 상품차(上品茶) 같은 고가물(高價物)이 다른 두 곳에 비하여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즉 재력이 훨씬 나은 것이지요. 그리고 건주여진이 내는 물목은 말, 인삼, 각종 약재, 진주, 각종 짐승가죽 같은 특산품들인데요, 건주여진이 명나라와 교역을 한 물건들을 다시 차익을 남기고 해서여진이나 달단족에게 넘기는 그런 것이 짐작이 됩니다. 즉 건주여진은 자기들의 생산물목뿐 아니라, 다른 종족의 물목까지 중간에 개입하여 이익을 챙기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성량 장군이 건주여진에게 특혜를 주는 것 때문이라고 저는 그리 봅니다."
"이성량 장군이 왜 건주여진에게 그럴까?'
"아마도 건주여진이 건네는 뇌물 탓일 것입니다."
"......"
"이성량 장군으로서는 뇌물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동도사에는 이미 둔전제가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즉 심하게 말하면 둔전병 명나라 군사들이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요동에는 둔전병이 15만 명이 있어야 합니다만 찾기 어려워진지 오래되었지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참 근처나 위 근처에 겨우 몇 천 경(頃, 1 경은 100 무, 1 무는 200 평) 정도씩의 경작지만 남아있지요. 그리고 그들이 역참이나 위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제가 짐작하자면 요동 전체에서 약 이 삼만 명 정도라고나 할까요."
"정말 그것 밖에 안될까?"
"지난 만력 23년의 정묘년 조왜전쟁에서 보면, 명나라 군대 중에 요동 출신들은 이성량 장군의 아들 아홉 명, 즉 이여송 장군과 이여백 등 그 동생들이 거느린 요동 소재 사병(私兵)과 남쪽에서 모병해온 절강성, 복건성 군병들, 사천성 또 운남성의 군병들이 전부였지요. 요동의 둔전병 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성량 장군의 아들 아홉 명이 그때 거느린 군병들은 아마 삼만 아니 어쩌면 십만 명일지도 모르지요. 그 군병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단 하나의 방법 즉 요동에서 유일하게 많은 돈이 오가는 마시에서 빼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요."
"야, 병궐이가 이제 안목이 많이 컷구나, 참 이건 공치사가 아니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난 감탄할 만 하다."
"게다가 조왜전쟁이 끝난 후 돌아가야 할 절강성, 복건성, 사천성, 운남성에서 온 군병들을 아직도 다 보내지 않고, 일부는 잡아두고 있습니다. 명분은 성곽을 보수한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요 만, 그 군병들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이미 월례(月禮)를 끊은 지가 한참 되지요. 그 군병들을 먹여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장사 길에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어떠냐?"
"예, 이성량 장군이 수만 명의 군병을 쥐고 있는 한은, 요동에서는 어느 누구도 꼼짝 못하겠지요."
"그렇구나, 그럼 난 이번에 심양행 장사를 결정한 것이 아주 잘한 것이 되었구나."
"예, 뭐 세금이 좀 심하여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도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나 항상 있는 일이고,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난 이번 심양행 장사를, 거의 나 혼자서 결정을 했거든, 물론 북경회관과 소주회관이 반반씩 합작이지만 말이지, 심양에 가볼 일이 있는 편에 장사를 한번 하자는 것이었는데, 큰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좋구나."
"그렇게 된 일이군요."
"참 그리고 이관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받거라, 여기 편지도 있으니, 읽고 답장을 꼭 빨리 하거라. 아마도 너의 혼인에 관해 말씀하신 것일 게다. 두어 달에 한번씩은 안부 서신이라도 보내어 드리거라. 장장 육천 리 길이니 자주 만날 수는 없으니 편지라도 자주 해드리는 것이 효도다. 군무에 피곤할테니, 가서 쉬고 명색(名色) 숙부가 왔다 가는데 맨입이면 되겠냐? 여기 은자 열 량으로 너의 용채도 하고, 밑에 있는 군병들 한끼라도 뭐 좀 기름진 것을 먹이도록 하거라. 자 받아.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무튼 몸 조심하고 잘 지내거라, 참 금년이 귀향 휴가가 있지? 가보거라."
"예, 숙부님 건강하게, ... 장사 잘 하고 오십시오."
'흑응회(제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027 회 호랑이 송곳니 (0) | 2015.12.16 |
---|---|
제 026 회 대보당(戴保堂) 표두 (0) | 2015.12.15 |
제 024 회 감생(監生) - 그림있음 (0) | 2015.12.14 |
제 023 회 조천표국(朝天驃局) - 그림있음 (0) | 2015.12.13 |
제 022 회 왕준서와 의형제(義兄弟)를 맺다 - 그림있음 (0) | 201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