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비련속의 자유
벽려혼은 열흘 동안 보이지 않던 청주사마 공천왕이 다시 입조(入朝)하자 물었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 갔었소?"
"전하, 사마는 이번에 동모성에 가서 가야공주 김란을 집에 데려다 놓았지요."
벽려혼은 가야공주 김란의 이야기를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그 암팡진 것을 청주성에 갔다 놓았다니, 청주가 시끄러워지지 않을 것인가?
"그래? 어떻게?"
"그게 이야기가 길지요."
"그것참. 사마가 고향 여자를 얻게 되서 좋겠구만. 그런데 설마하니 백제 중평제황이 잠든 사이에 동모성을 털고 보쌈해온 것은 아니겠지?"
벽려혼은 혹시라도 중평제황과 청주의 관계가 위협받을까봐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천만에요, 정식으로 하사를 받았어요. 또 나의 신물인 가야산 금물고기를 그녀에게 내보이니 그녀도 고향 말을 서로 나눌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쫓아왔지요."
벽려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천왕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해서 중평제를 설득하고 가야공주 김란을 받아왔을지 궁금했다.
"이번에 중평제에게 무슨 재주를 보여주신 것이오?"
"사실은 연나라 여자를 하나 줏어서 백제 중평제황께 진상하고 대신 가야공주를 하사받았지요."
"연나라 여자라? 미인인가?"
"전하은 잘 모를테지만 왕년에 장안제일미녀라고 소문났던 그런 여자지요."
그 말을 듣고서 벽려혼의 얼굴이 노래졌다가 다시 파래졌다. 벽려혼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물었다.
"아니 대체 장안제일미녀가 누구요? 부견의 처, 모용준의 딸 청하공주?"
"그 청하공주가 시집간 이후로 장안제일미녀라고 부른 여자는 모용용이라고 하지요."
벽려혼은 공천왕을 다그쳐 물었다.
"모용용? 그 여자라면 불기산 소천왕 여비와 이태전에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이제와서 과부된 사람을 보쌈해 왔다는 말이오?"
공천왕이 맞장구치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바로 그 여자애지요.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대호방의 형제들이 보쌈을 했지요."
"그게 그렇게 귀한 여자를 보쌈하고 후환이 없겠소? 모용용이 연나라 연왕 모용수의 딸인데 함부로 보쌈을 해버리면 연왕 모용수의 원한을 살 것인데 아마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오."
벽려혼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공천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모용용 공주는 대국으로 시집가던 도중에 동진군에게 붙들려서 건강으로 압송되던 것을 중간에 채왔으니 한두 나라 문제가 아니고, 게다가 동모성에 팔아버렸으니 그곳은 너무 멀어서 소문날 리도 없습니다. 여차하면 왜국으로 보내버리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도 모용용이 여비의 전처인데 그렇게 팔려가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청주제왕 벽려혼으로서는 모용용 공주를 아는 척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게,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팔아버렸소? 여비의 전처라면 공천왕의 며느리벌인데."
벽려혼이 사람을 팔아버렸냐는 말에 공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건 인신매매나 다름없다. 산적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했어. 하지만 가야공주 김란을 사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
"그래서 내게는 며느리벌되는 그 여자애를 잡아들였지요. 여비를 배신하고 또 시집간다고 하니 내가 나서서 막은 것이지요."
"이미 과부인데 또 시집가는 것이 뭐가 문제요?"
벽려혼이 공천왕 앞에서 혀를 찼다. 그러나 공천왕도 지지 않았다.
"맞습니다. 이미 과부인데 중평제의 첩이 되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그럼 그만 가서 일을 보시오."
벽려혼은 공천왕에게 물러가라고 하였다. 공천왕이 물러가자 벽려혼은 한때 결혼했던 모용용의 일 때문에 갑자기 무력감에 빠졌다. 그러한 무력감은 삼일 밤낮으로 지속되었다. 이제 이 일을 어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녀를 도로 구해내서 신흥성에 데려다 줄 형편도 아니고. 아니, 그럴 수도 있지. 공천왕이 한번 훔쳐낸 여자를 장천왕이라고 도로 훔쳐내지 못할까?
벽려혼은 며칠이 지나서 장천왕과 둘이서 동청주 동모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 행궁 내원의 백제황부인, 김총을 찾아갔다.
"황부인. 안녕하셨소?"
"벽려장군이 내원에는 웬일인가요?"
"모정(母情)을 못 잊어서 왔소."
"모정? 오호라. 그 모정."
벽려혼은 그녀의 산도로 기어들어가 그녀의 아들로 다시 출산하던 그 일을 말했다. 그리고 벽려혼은 김총의 몸매를 훑어보았는데 임신 중이었다. 벽려혼은 쾌재를 불렀다.
"그렇소. 하지만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마음은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것보다 못한 법이지요."
"그야, 당연하지. 모정이 워낙이 살뜰한 나이니까."
황부인 김총은 벽려혼의 의중을 모르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보고 싶었소."
벽려혼은 그녀가 임신중이니 마음 놓고 그녀에게 아부하고 희롱하였다. 김총도 거짓 아부를 눈치챘는지 말을 돌렸다.
"거짓말. 아참, 란공주는 전하의 청주에 가 있는데 이미 만나 보셨소?"
"아니요, 청주로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직 본 적 없소. 하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왔소."
벽려혼은 고개를 흔들면서 정색을 하였다. 김란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충성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그일 때문이라니 무슨 일인지 짐작할 길이 없는 김총 공주가 되물었다.
"바로 그 일이라니?"
"황부인도 함께 모셔가려고 말이오. 중평제께 황부인을 하사해달라고 주청할 것이오."
벽려혼이 정식으로 김총을 청주로 데려가겠다고 하니 김총이 너무나 놀라 얼굴이 붉어졌다.
"나를? 아니 이놈이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안됩니까? 동생은 이미 청주에 와 있는데 언니도 같이 청주에 와있으면 좋지 않겠소? 서로 좋아하는데 말이외다."
벽려혼은 태연하게 김총이 좋아서 데려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놈이 미쳤군. 내가 누구냐? 백제 황부인이야. 어디를 넘봐? 내 인생 망치려고 작정을 한 것이야?"
황부인 김총은 화를 내면서도 화를 내는 끝물에 가서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돌아가서 생각하니 그래도 모정의 추억이 좋아서 자신을 모셔가고 싶다니 벽려혼의 청혼이 기분나쁘지 않았다.
"우리 제왕부는 태후가 없소. 오셔서 태후를 하시오. 내전을 장악하고 또."
벽려혼이 거짓말 잘하는 것은 불기산의 소천왕 여비 적부터 특기였다. 김총은 거기서 벽려혼의 말을 막았다.
"청주 제왕, 말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황손을 가졌어. 황손을 곧 낳아야 한다고. 이 황손으로 백제 제황위를 이어야 하고. 그러니 끝까지 모후처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안돼."
벽려혼이 거절을 당하고 할말을 잊은 듯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매몰차게 거절하시는군요."
"그럼, 정말로 나를 못 잊어서 오셨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황부인 김총은 곧이곧대로 벽려혼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꾸만 기분이 좋아졌다. 김총은 다정하게 벽려혼의 손을 잡고 그녀의 내전으로 끌어갔다. 내전에는 중평제황의 금위장군 의도리와 시녀 하나가 다정하게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벽려혼의 머릿속에는 왜국장수 의도리도 중평제황을 속이고 이 안에서 시녀들과 관계를 갖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래도 되나? 의도리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벽려장군이시구려."
"의장군이 먼저 와 계신 줄 몰랐소."
벽려혼은 부끄러운 장소에서 서로 만난 것처럼 계면쩍었다. 하지만 의도리 장군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하하, 뭐 나도 남자니까 여자가 그리우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벽려혼은 대답을 하면서도 이게 공공연히 여자가 그립다고 제왕의 할렘에 장수들이 드나들면 기강이 어찌되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아무튼 황부인이 모든 장수들을 두루두루 살뜰하게 잘 봐주고 계시니까."
"그참 고마운 일이지요."
"벽려장군은 이 여인들 중에 누가 애인이오?"
"아직 없는데."
"그럼 얼마 전에 들여온 선비족 용소저를 한번 만나 보시오."
"선비족 용소저라?"
의도리가 먼저 모용용을 이야기하는데 벽려혼은 모르는 척하였다. 그가 말을 흐리니 의도리가 계속 말했다.
"뭐, 특별난 여자는 아닌데, 그래도 특이하게 생겼으니 한번 보시오."
"."
"그리고, 이 모두가 이역 만리에 떠나온 장수들의 외로움을 위로하려는 중평제황의 은덕이니 결코 중평제황의 은덕을 잊지 마시오."
벽려혼은 그제서 의도리가 중평제황을 배신하고 중평제황의 내전에 침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의도리나 백제 장수들은 당당하게 중평제황의 출입 허가를 받아서 내전에 들어와 중평제황의 시녀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평제황이 여러 장수에게 내리는 여분의 선물이기도 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중평제황 혼자만 여자를 취하고 나머지 외로운 장수는 오로지 술만 마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황부인의 시녀들에 대해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자유 의사대로 할 수 있도록 그의 할렘을 개방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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