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40. 동궁주의 비애 - 1

금박(金舶) 2015. 10. 9. 08:20


  #40. 동궁주의 비애

 

  단 십팔 일이지만 하루 열두 시간을 오로지 태조검법만 수련한 고안 왕자의 태조검법에 대한 조예는 올라웠다. 그러나 상대방인 동궁주는 같은 태조검법을 수 년간 수련했을텐데 단 십팔일을 수련한 고안왕자에게 패한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까닭은 고안왕자의 검이 일반검과 다른 보검이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고안왕자는 이 승부를 이대로 끝내도 되었는데 대호방주에게 자랑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우하하하, 대호방주, 나의 실력이 어떻소?"

 

  고안왕자가 사부에게 감히 방주라고 부르고 하대하는 것이 아니꼽기도 해서 벽려혼은 패자인 동궁주의 편을 들었다.

 

  "가히 괄목상대할만 하오. 일취월장하는 실력이오만 다시 보고 싶소."

 

  "다시?"

 

  고안왕자는 얼마든지 다시 보여줄 수 있다고 자만하였다. 그순간 벽려혼은 자신의 취운검을 빼서 동궁주에게 던졌다. 동궁주는 고안왕자에게 억울하게 져서 오늘밤 치욕을 당할 찰나에 입술만 깨물고 있다가 갑자기 날아온 벽려혼의 검이 반가웠다. 비록 적이지만 다시 기회를 준 벽려혼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리고 적으로서 벽려혼의 호의는 오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교만을 꺽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태조검법의 기수식을 다시 밟았다.

 

  고안왕자는 이미 다 이겼다고 생각했고, 또 싸워도 다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해서 벽려혼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고 벽려혼의 취운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취운검이 동궁주의 손에 들어가자 취운검은 혼자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는데, 소리없이 울었으므로 동궁주만 알 수 있었다. 취운검은 동궁주의 낯선 손으로부터 약간의 피를 빨아들이고 스스로 울고 있었다. 취운검에 남아 있던 태조대왕의 피와 그의 혈손인 동궁주의 피가 섞여들고 있었다. 동궁주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저절로 피가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을 느끼자 처음에는 독검인 줄 알았다.

 

  검자루에 맹독이 발라진 독바늘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검을 놓아버리고 고안 왕자에게 항복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포기해도 죽는 인생이니 싸워나 보고 죽어야지. 그런데 취운검이 점점 그녀의 손바닥에 맞는 것처럼 저절로 붙어오는 느낌이더니 손목으로 취운검의 진기가 타고 올라왔다. 검자루를 쥔 손을 살짝 펴보았지만 손바닥에 붙은 검이 땅에 떨어져 내리지도 않았다. 저절로 그녀의 손에  붙어 있는 것이다. 이게 신검(神劍)인가?

 

  고안왕자가 다시 태조검법 사초식인 [덕이제인]을 펼쳐 동궁주에게 쳐들어갔는데 동궁주는 자기도 모르게 일초식인 [허이청교]로 맞섰다. 그것은 검이 스스로 검보를 외워서 그녀에게 시키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허이청교]를 시전하면서 동궁주의 팔끝까지 검의 진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이결구] 이초식으로 바뀐 동궁주의 취운검은 위력이 배로 늘었다. 고안왕자의 보검과 동궁주의 취운검이 부딪치면서 고안왕자의 보검이 퉁겨 나가기 시작했다. 동궁주가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한 내공을 느끼면서 삼초식인 [지이이물]을 펼폈다. 어느새 고안왕자의 검은 취운검에 휘감겨버리더니 달라붙더니 그녀가 떨쳐버리자 고안왕자의 손을 벗어나 보검이 하늘로 날아갔다.

 

  "앗."

 

  고안왕자는 검을 놓치고 뒤로 철판교 초식으로 넘어지면서 위험한 자리를 벗어났다. 고안왕자가 기이한 표정을 지었는데 갈루 장군이 말했다.

 

  "원자 전하, 다시 하십시오. 아까처럼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갈루 장군은 고안왕자가 실수한 것으로 생각하고 고안왕자의 보검을 다시 줏어다가 두 손으로 받쳤다. 동궁주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 신검이라면 고안왕자를 죽이고 태령태왕도 죽이고 자신이 고구려 태왕이 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궁주는 취운검을 치켜들어 도대체 어떤 신검인가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취운검의 검신에 핏빛으로 구름 무늬가 비쳤다. 자신의 손이귀에 들어오자 혼자 소리없이 울던 이 검이 세상에 구하기 힘든 신검인 것은 이미 알았지만 두 눈으로 막상 살펴보자 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칼이었다.

 

  "다시 하자."

 

  고안왕자가 다시 보검을 들고 [허이청교]부터 시전하여 들어갔다. 그러나 동궁주는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여유만만하였다.

 

  "하룻강아지야, 무공이 하루 아침에 된다더냐?"

 

  동궁주가 약을 올리자 고안왕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받아라, 암탉."

 

  그들은 검을 부딫치면서 말로 싸웠는데 고안왕자는 처음보다 신중하였다. 그러나 암탉은 심계에서도 고안왕자보다 한 수 위였다.

 

  "햇병아리, 물 먹어라."

 

  고안왕자는 [덕이제물]로서 다시 부딪쳐갔는데 그때 느닷없이 동궁주가 "개물교화"를 외쳤다. 동궁주는 새로운 신검이 자꾸 진기에 의하여 요동하자 태조검법 최후의 초식인 [개물교화]를 생각해내고 시험삼아 펼쳤다. 그녀는 아직 [개물교화]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외쳐댄 것이다. 사실 동궁주도 [개물교화]를 익히기만 하고 한 번도 펼쳐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취운검이 요동하여 [개물교화]를 스스로 불렀고 취운검이 [개물교화] 소리를 듣자 먼저 신나서 검이 간직했던 벽력진기를 쏟아내었다. 벽려혼이 짧게 "안돼" 하고 외쳤으나 취운검의 벼락 소리에 묻혀버렸다. 이 좁은 마당에서 서로 넘어지면 맞닿을 거리에서 벽력검을 펼치면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다.

 

  "쾅"

 

  어두운 저녁 하늘에 마른 벼락 소리가 울려퍼졌다. 취운검에서 검 속에 숨어 있던 무서운 벽력진기가 벼락처럼 폭출하였다. 쏟아져나온 벽력검기는 고안왕자의 보검을 타고 들어가 고안왕자의 보검을 검게 그을리게 만들고 보검의 검자루마저도 순간적으로 숯가루처럼 타버렸다. 고안왕자의 손아귀가 불에 덴 것처럼 화상을 입었다. 고안왕자의 검이 보검이 아니면 검신조차 녹아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고안왕자도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은 동궁주의 내공 수준이 한치만 더 높았어도 고안왕자는 즉사했을 것이었다.

 

  "앗"

 

  고안왕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자루가 불타 없어진 보검을 놓치고서 그 자리 실신하였다. 좌장군 갈루는 너무나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자 어쩔 줄을 몰랐다. 벽려혼이 먼저 달려가서 고안왕자의 멈춰진 심장을 주먹으로 쳐서 다시 심장이 뛰게 하고 고안왕자의 인중혈을 쳐서 정신이 들게 하였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고안 왕자는  뭣에 홀린 사람처럼 초점이 없었다. 좌장군 갈루가 말을 붙였다.

 

  "원자 전하, 원자 전하. 정신 차리옵소서."

 

  "내 팔이."

 

  고안왕자는 검을 쥐었던 바른팔이 아파왔다. 고안왕자의 바른팔은 순간적으로 고목나무처럼 말라비틀어졌다. 벽력검기가 경혈을 모두 말려버린 것이다.

 

  "내 팔이 이게 뭐야? 내 팔이 병신이 되었어."

 

  고안왕자는 다시 정신을 차리자 무척 아파오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감싸고 어쩔 줄을 모르며 절규하였다. 고안왕자가 썩은 것처럼 말라버린 자신의 팔을 바라보더니 다시한번 눈을 감고 신음하였다. 고안왕자는 아픈 팔도 팔이지만 벽력진기를 내뿜는 [개물교화]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벽려혼에게 물었다.

 

  "개물교화라니?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고안왕자는 원망하는 눈빛으로 벽려혼을 바라보았다. 동궁주가 의기양양하게 벽려혼 대신 가르쳐주었다.

 

  "개물교화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덤비느냐? 개물교화는 치우검법 오초식이다."

 

  고안왕자는 눈을 껌벅거리고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휘두르더니 다시 벽려혼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부가 왜 안 나한테는 오초식을 안 가르쳐주었지? 사부도 몰랐나? 아니면 사부가 나를 속였나? 도대체 왜 나한테 오초식을 안가르쳐 주었지?"

 

  고안왕자가 사부인 벽려혼을 신하 다루듯이 심하게 책망하였다. 벽려혼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네 머리 밑에 있는 사부가 아니었느니라. 또한 고구려 신하가 아니다. 한때 너의 거짓에 속아서 몇초식 가르쳐 주었지만 지금은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사람이 겸양을 모르면 조금 배운 얄팍한 것으로 자신을 망치느니라."

 

  고안왕자가 그 말을 듣고 실망하여 다시 눈을 감았는데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동궁주를 꺽으려다가 바른팔을 잃고서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한 눈물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동궁주에게 마구 덤빈 것이 실수였다. 사부. 사부를 기망하고 왕자랍시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 데 대한 천벌이었다. 고안왕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 말라비틀어져 생명을 잃어버린 바른 팔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면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직도 고안왕자는 이 불행이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너무 성급했구나, 너무 성급했어."

 

  벽려혼은 훈계를 주었다.

 

  "네가 너무 교만한 탓이다. 하늘 높은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벽려혼은 고안왕자의 경솔함을 징계하고 싶었는데 결과가 너무나 가혹하게 되었다. 보다못한 좌장군 갈루가 자신의 검을 빼들고 말했다.

 

  "병사들은 저 두 사람을 감시해라. 절대로 성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좌장군 갈루는 고안왕자에게 말했다.

 

  "원자 전하, 일단은 의원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으십시오."

 

  "너희들은 여기를 철통같이 포위하고 저 년놈들을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해라."

 

  갈루 장군은 왕자의 호위병들에게 동궁주를 잡아두라는 당부를 하고, 바른팔을 감싸안고 비틀거리며 나간 고안왕자를 뒤쫓아 갔다. 병사들이 마당을 하나 가득 에워싸니 동궁주는 그녀의 거소로 들어가고 그녀와 같은 포로 처지가 된 벽려혼도 따라들어갔다. 동궁주의 처소에 남은 벽려혼은 동궁주의 뇌쇄적인 자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부여족 백제공주 사비, 가야공주 김란, 저족 친나라 부림, 선비족 연나라 모용용 공주, 다 보았지만 북방 미녀인 고구려 동궁주의 관능미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벽려혼은 요물에 홀린 것처럼 눈에 총기를 잃고 그녀의 자태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동궁주는 두 손으로 취운검을 매만지면서 다시 눈 앞에 들어서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내력의 보검이었는데 그녀로서 짐작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수림태왕도 결코 펼치지 못하던 [개물교화]를 스스로 펼쳐서 뇌성벽력을 낼 수 있는 검이니 보검이 아니라 신검이 틀림 없었고 게다가 그녀의 손에서 스스로 울고 피를 빨아먹으니 그녀와 피가 통하는 검으로서 바로 태조검법을 만든 태조대왕의 신검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