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공주는 그녀의 강한 느낌을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의 등에 업힌 김에 그의 왼쪽 어깨를 들여다 보기로 했다. 사비공주는 일부러 비명을 지르고 그의 왼쪽 어깨를 깨물었다. 벽려혼은 그녀가 아픔을 참기 위해 그의 옷을 깨무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녀가 자꾸 한자리만 계속 깨물어대니 옷이 찢어지고 마침내 숨겨졌던 상처가 드러났다.
거기에는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불기현의 황금장에서 청주 교위였던 왕통의 부하에게 도끼를 맞아서, 수박처럼 쩍 벌어졌던 상처가 반흔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녀가 백제 배로 끌고 가서 기름을 바르고 소독하고 싸매주었던 그 상처였다. 그 상처 때문에 용의 날개를 보았다고 해서 강제 결혼까지 당했던 그녀였다. 불기산 산채에서 신혼을 치르고 난 다음날도 그 상처를 다시 살펴주었는데 사비공주가 잊을 수 없는 상흔이었다.
너이놈, 여비. 그런데 이렇게 나를 속여? 왜지? 누이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러냐? 사비공주가 순간적으로 분노했으나 그녀를 업고 앞으로 뛰는 벽려혼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렸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을 당장 세워놓고 그동안 속인 것을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벽려혼이 되었어도 그녀를 잊지 않고 찾아온 것만으로도 절반은 용서가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죄값을 치러야 되는데. 사비공주는 그의 등에 업힌 채로 다시 상념에 잡혔다.
그래, 맞아. 벽려혼 그가 바로 여비이기 때문에 친자인 부림의 아기를 도로 찾으려고 청주성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본 부림과 결혼한 것이고 또한 그가 여비이기 때문에 기왕 결혼했던 모용용에게도 관심이 지대했던 것이다. 벽려혼 등에 업혀 묘향산을 올라오면서 사비공주는 다시 행복을 찾았다. 첫 번 결혼했던 그 남자를 다시 찾은 것이고, 또 이미 부림과 결혼했어도 사비공주가 부림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여비와 먼저 결혼한 것은 바로 사비공주이고 두 사람 사이에 부림이 새치기한 셈이니까. 그렇지만 벽려혼의 그 치기어린 바람기만은 결코 이대로 그냥 놓아둘 수 없고 어떻게든 틀어잡아야 되었다.
사비공주는 벽려혼에게 뱃속의 아기가 그의 씨라는 사실, 그가 그토록 바래오던 백제 여인의 몸으로 대를 잇는다는 소원의 결과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기로 했다. 이제까지 조강지처를 우습게 보고 바람핀 데 대한 형벌로서 벽려혼은 자기 친자식을 남의 자식인줄 알고 자기 앞에서 키우게 하는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천년에 벽려혼이 철이 들어서 스스로 여비라고 털어놓으면 그때는 내 아이가 자기 친자식인 줄 가르쳐주자. 사비공주가 단호하게 말하였다.
"아무튼 이제 벽려혼이 나와 결혼한다고 부처님한테 맹세했으니 이 아이까지 벽려혼이 책임지고 길러야 돼. 그렇게 할 것이면 같이 결혼하고 그렇게 못한다면 아예 결혼하자고 하지 말아."
벽려혼도 사비공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 사비공주의 아이를 위해서 청주 북해군에 불고궁을 지어주지. 사비공주의 법명이 불고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이 아이가 부족한 것이 없게 크도록 해주지. 사비공주도 불고궁에 살고 말이야."
"좋았어. 당연히 그래야지."
사비공주는 그날밤부터 다리를 쭉 뻗고 잤다. 부목을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쭉 뻗고 자야만 했지만. 그리고 때때로 무릎에서 통증이 오면 자고 있는 벽려혼의 팔뚝 안쪽살을 꽉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면 꼬집히다시피 한 벽려혼이 얼른 깨서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또 아파오나 보지?"
사비공주는 낮에도 활동을 못하니 별 수 없이 잠자는 시간이 많았고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아서 심심했다. 그래서 다리에서 통증이 오지 않아도 가끔씩 재미 삼아서 벽려혼의 팔을 꽉잡고 힘을 주었다. 특히 한번 꽉 잡아서 손자국이 난 데를 골라서 다시 또 꽉 잡았다. 그중에도 제일 미운 곳 벽려혼의 왼쪽 어깨 상흔 부위가 사비공주의 집중 공격으로 가장 불쌍한 곳이었다.
진가모는 대성산성에 잡혀있던 사비공주가 동진에서 온 이상한 도적들과 무역선을 타고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무역선이 한수를 내려가서 서해바다로 나간 것으로 알고 추적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칠일후에 벽려혼의 배가 한산성 앞에 나타나서 벽려(?閭)와 맹(?)이라는 두 개의 깃발을 흔들고는 하류로 내려갔다. 뒤늦게 백제에서 처음보는 벽려장군과 맹장군의 배가 출현했었다는 보고를 들은 진가모는 진작에 수색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이제 다시 벽려혼의 배를 뒤쫒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들은 흥평제가 진가모에게 물었다.
"사비공주는 동진 배를 타고 도망가고 또 뒤늦게 벽려군 배가 한산에 들어왔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뭣들 하는거야?"
"그게 따로따로가 아니고 벽려혼과 맹탕이란 자가 나타나서 사비공주를 구해서 한수 북쪽으로 올라가 숨었다가 다시 내려와 중국으로 데려간 것같습니다."
진가모의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니 사비공주가 아직 백제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참 매루성이나 대성산성의 경비가 그렇게 허술해서야 되겠나? 자객이 들어왔다가도 모르겠구만."
흥평제가 짜증을 내니 진가모가 몸둘 바를 몰랐다.
"죄송합니다."
"벽려혼? 그자가 왜 사비공주를 구해갔을까? 난 그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놈이 대체 누구야?"
흥평제가 벽려혼에 대해 물으니 진가모는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벽려혼이라는 자는 지난 9월에 단 오천의 병사로서 이만 병사가 지키는 청주성을 함락시켜서 청주자사겸 전하가 되고 동진의 이만대병이 쳐들어오는 것도 하룻만에 분쇄하였고 그후 동진으로부터 유주자사라는 책봉을 받은 인물입니다."
근초고제황은 백제왕겸 낙랑태수로 책봉을 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놈이 동진에서 자사로 책봉을 받다니 뭔가 한가락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놈이 유주자사 책봉을? 그럼 백제제황보다 못지 않은데 그래? 하지만 그런 녀석이 왜 한산성에 들어와서 사비공주를 낚아갔을까?"
"전에 사비공주에게 청혼한 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야? 사비공주와 정혼을 한 사이야? 그렇다면 그 연놈이 나한테 보복을 하려들지 않을까?"
흥평제는 사비공주가 날아가서 혹시라도 그에게 다시 보복을 가해올 것이 걱정되었다.
"사비공주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불구인걸요."
"그럴까?"
"하지만 벽려혼이라는 놈은 벽력검을 장기로 하는데 칼을 휘두를 때에 벼락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 근처에 가까이가면 그대로 벼락을 맞아 죽습니다. 제가 당해봐서 아는데 지나가는 솔개도 그 벼락에 맞으면 불고기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하마터면 제가 당할 뻔했는데 살짝 피하니까 하늘에 떠있던 솔개가 대신 죽었습니다."
진가모는 벽려혼에 대해서 아주 약간 과장을 하였다.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면 보통 놈이 아니군."
흥평제가 겁을 먹고 점점 걱정하는 빛이 되니 진가모는 더 떠들었다.
"그러니 대궐 담 밖에서도 언제든지 날벼락을 날려서 암살할 수 있는 무서운 놈입니다. 아참, 또 그 맹탕이라는 놈은 교주군 성양태수인데 벽려혼의 부하입니다. 성벽을 그냥 한걸음에 뛰어넘는다고 하지요. 별명이 장천왕인데 항상 긴 장창을 쓰고 그 장창의 길이가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십팔척입니다."
"십팔척? 거짓말이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장창으로 성벽을 홱 뛰어넘지요."
흥평제황은 금위대장인 두찌 장군에게 안학궁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고 자신은 햇볕이 비치는 노천으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내전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놈의 벼락이 언제 어디서 날라올지를 모른다니. 진가모는 흥평제가 궁밖에 나돌아다니지 않음으로서 궁밖의 대신들을 모두 자기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묘향산 신수선생의 집에서 삼일이 지나자 사비공주는 목발을 집고 걸어다닐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벽려혼에게 안겨서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은 모두 다 돌아보았다. 그들에게 진정한 밀월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바로 이 때였다. 그리고 열흘만에 신수선생이 산중에서 돌아오자 신혼의 단꿈도 끝이 났다.
"전하,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사비공주가 치하하자 벽려혼이 불만이었다.
"도대체 군사가 위야? 전하가 위야?"
"여기는 청주가 아니야. 또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그런 것 따지지 말아. 그딴 것을 따진다고 꾸벅 고개 숙일 사람이 여기 어딨냐?"
사비공주가 청주 제왕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벽려혼의 본색이 여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비의 상누이로 돌아간 것이었다.
"공자 말씀이 다 맞군. 가까이 해주니 기어오르고 있어."
벽려혼이 투덜거리자 사비공주가 오히려 노기를 띄었다. 이런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하나?
"더 까불면 수염을 잡고 메다 꽂을 거야."
벽려혼은 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사비공주에게 계속 당하는지 자기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태아 때문인가? 아무튼 그녀의 임신을 알게 된 그 이후로 사비공주는 늘 호령하고 벽려혼은 따르는 식이었다. 애 가진 여자는 두 사람이고, 두 사람의 머리는 한 사람 머리보다 낫다. 그러니 한 사람 머리가 그 아래로 굽혀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고놈의 태아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벽려혼이 근본적으로 사비공주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랑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을 백제 본토로 찾아오면서 두 사람이 서로 확인한 것이었다.
"이제 나 혼자서도 요양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 요양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다음에 천천이 중국으로 찾아갈테니까 먼저 가."
"나보고 혼자 중국으로 가라고?"
벽려혼은 사비공주가 중국으로 떠나라고 하는 말이 본심인지 아닌지 몰라서 다시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같이 갈 수 없으니 혼자라도 가야지. 제왕은 청주를 비워서는 안되는 것이야. 게다가 곧 전쟁이 벌어질텐데. 전에 올 5월이 되면 동진이 연나라를 치고 그때 대륙 백제군이 협공하기로 했었잖아. 그러니 벽려혼이 여기 마냥 있을 수는 없지."
벽려혼은 열흘을 묘향산에서 쉬면서 청주에서 골치아프게 제왕 전하 노릇하는 것보다도 신수선생처럼 신선 생활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좋아보였다. 아직 제왕이라는 큰 그릇 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난 말이지, 여기서 그냥 이대로 늙어 죽어도 좋겠어. 복잡한 청주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니, 청주 제왕이 싫어?"
사비공주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싫고 말고."
벽려혼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영변의 묘향산 기슭이 평화롭고 좋았다. 여기에 한 평생 묻혀 산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인가? 아무런 욕심 없이 사는데 걱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사비공주는 어린 여비를 바라보듯이 제왕 벽려혼을 보았다. 그래, 불기현 현령도 못하겠다고 하룻만에 그만두었는데 청주 제왕은 더 힘들겠지. 하지만 넌 이 다음에 백제 제황도 맡아야 돼. 그러니 무수히 단련을 해야지.
"가서 불고궁을 지어놓고 기다린다던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사비공주는 벽려혼을 달랬다. 어린 여비를 누이처럼 다정하게 달래는 것이었다.
"물론 잊지 않았지."
벽려혼이 까닭없이 시무룩해져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사비공주에게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이 하나가 아니라 둘 쯤 낳고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럼 빨리가서 불고궁을 지어놓고 기다려. 곧 쫓아갈테니까"
사비공주는 떠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벽려혼을 달래서 그만 중국으로 떠밀어 보내었다.
'비류혼(沸流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39. 고구려 왕자와의 결투 - 2 (0) | 2015.10.07 |
---|---|
#39. 고구려 왕자와의 결투 - 1 (0) | 2015.10.06 |
#38. 명의를 찾아서 - 4 (0) | 2015.10.03 |
#38. 명의를 찾아서 - 3 (0) | 2015.10.03 |
#38. 명의를 찾아서 - 2 (0) | 201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