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풍승상의 외손주인 여비가 바로 금발이 아니었을까요?"
"글세, 여비가 금발인지는 나도 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풍승상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지만 벽려혼은 자기의 전신인 여비가 금발이 아니었던 것을 분명히 알고서도 일부러 해본 소리였다. 그러나 여비의 이름을 들은 부림은 그제서 정신이 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여기에 찾아온 풍승상이라는 자가 여비의 외조부라고? 부림이 다급한 마음에 제 아기인 여도수를 살리기 위해 자백을 하였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 아이는 여만의 동생이라는 여비의 아이가 맞습니다. 저기 계신 분이 과연 여비의 외조부시라면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풍패가 달려왔다.
"뭣이라고? 지금 네가 한 말이 사실이냐? 여비의 아들이라면 물론 금발머리가 나올 수 있지. 게다가 풍한이 곱슬이었으니 곱슬 금발도 나오게 되어 있어. 어디 보자. 전하, 아기씨를 제게 보여주소서."
"보시오."
벽려혼은 여도수를 풍패에게 넘기고 이제 부림의 처리를 고민하였다. 그 사이에 풍패가 아이를 받아 둘러보더니 벽려혼에게 간청하였다.
"제왕 전하, 소신이 늘그막에 유일한 혈손인 증손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만은 목숨을 살려주옵소서."
"글쎄올시다."
벽려혼이 여도수를 살려준다는 확답을 피하고 부림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벽려혼이 다시 쳐다보자 부림은 그때까지도 허연 털복숭이 무뢰한 같은 벽려혼을 오로지 애처롭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림은 벽려혼이 여도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데 어째서인지 살려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벽려혼의 눈길이 살인마같지도 않고 어쩌면 말로만 애비라고 하던 여만보다도 더욱 다정하였다.
"제발 아이만 살려주세요,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부림이 다시 애원하였다. 벽려혼이 부림의 말꼬투리를 잡고 말했다.
"그것참, 너는 이 아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 네 목숨을 바쳐서 죽을 수는 있다면서도 너의 일가 부씨들을 모조리 다 살리기 위해 네 목숨을 바칠 수는 없다는 말이냐?"
"무슨 뜻인지?"
부림은 벽려혼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림이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벽려혼이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나라가 바뀌어서 새로 청주 제왕이 된 벽려흥의 수청 들기를 감히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너의 부씨 일가가 모두 여기 잡혀와서 이제 곧 단체로 저승길을 가게 만들지 않았느냐?"
부림은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부림에게 목숨만은 살려줄테니 공주의 자존심을 버리고 새로운 제왕의 수청을 들라는 것이구나. 좋게 말하면 공주보고 정복자의 희첩이 되라는 것이고 가혹하게 말하면 실제로는 단 며칠만에 내동댕이쳐지고 죽임을 당할질지도 모르면서 제왕이 쫓아낼 그순간까지 봉사하라는 것이었다. 부림은 아직도 제왕이 벽려흥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들은 단지 사형을 집행하러온 무리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림아, 네가 쓸데없는 지조를 버리고 이제라도 수청을 든다면 너의 목숨은 물론 너의 일가의 목숨도 구할 수가 있다."
벽려혼이 무릎을 구부리고 나즈막하게 말하였다. 벽려혼의 목소리가 나즈막하여 여러사람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한가닥 살길을 발견한 부씨 일가들이 짐작을 하고서 먼저 소리를 질렀다.
"부림아, 우리를 살려줘라."
"우리 목숨이 모두 너 하나에 달렸다."
그들은 간절하게 부림에게 애걸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협박을 하였다.
"부림, 너로 인해 우리가 몰살되어 같이 죽으면 우리가 귀신이 되어서도 저승 끝까지 너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겠다."
"부림, 원래 지조도 없는 년이 새 제왕의 수청은 왜 거절해서 우리까지 죽이려 하느냐?"
이 말은 지아비였던 여만뿐아니라 여비와 사통하여 금발머리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이제와서 무슨 지조를 지킨다고 수청을 거부하냐는 책망겸 한탄이었다.
"부림, 일단 살고 보자. 그래야 밝은 날이 온다. 지금 죽으면 뒷날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는 부림의 외가 친척인 모두지(毛豆之)가 하는 말이었다. 모두지는 부씨도 아니었지만 부림의 어머니 가계이므로 해서 붙들려와 있었다. 부림은 이제서 모두지의 목소리를 듣고서 부씨 일족뿐 아니라 그녀의 삼족이 끌려와 죽게 된 것을 알았다. 부림은 막상 내일 죽는다고 하니, 아니 이제 곧 부랑배들에게 끌려가 죽게 생겼는데 자기 하나 죽는 것도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일가친척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림은 처음에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하나 죽는 일로 생각하여 벽려흥의 수청과 왕씨 형제의 잡다한 요구를 거절하였는데, 막상 감옥에 들어와 보고서야 자기 귀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게다가 이게 온 일가친척의 죽음으로까지 확대된 것을 깨닫고 몹시 당황하였었다. 부림은 숱한 일가친척들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한가지라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부림은 다시 생각했다. 외팔이 팔병신 벽려흥의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부림은 기껏해야 옷이나 입혀주고 벗겨주고 술상 대령이나 하면 그만이지 싶었다. 하지만 수청을 든다면 당연히 몸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외팔이라면 자기자신이 힘들고 부림이 요령껏 위기마다 몸을 내빼기가 쉬울 것으로 생각도 되었다.
"좋다. 네놈들이 저들 모두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새 제왕이 본궁주를 얼마든지 희롱하고 다시 내치던지 죽이던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들의 생명을 누가 보장할 것이냐?"
부림이 마침내 수청들기를 응낙하였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벽려혼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확실하게 뒷일을 보장한다."
그러나 부림은 아직도 벽려흥이 제왕이라 생각했고 왕통의 일개 하수인이라고 생각한 벽려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네놈 말을 믿을 수 없다. 실권자인 왕통을 이리 오라고 해라. 왕통이 저들을 모두 방면하여 광고성 밖으로 내보내주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다."
벽려혼이 자기 말을 못믿는다는 부림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왕통? 그는 벌써 죽었다."
부림이 깜작놀라 물었다. 부림 그녀를 이 신세로 만들어 놓은 것이 모두 왕통 그놈의 흉칙한 게략 때문인데 그가 죽었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왕통이 언제 왜 죽었다는 말이냐?"
"방금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너무나 패악하기 때문이다."
부림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왕통이 죽었다면 이들은 또 누구인가? 왕통은 권력다툼으로 혼자 죽었는가? 아니면 왕륭과 벽려흥도 죽었는가?
"그는 천벌을 받아 당연히 죽을 목숨이었다. 그러면 세상이 다시 바뀌었느냐?"
"물론 세상이 바뀌었다. 청구국왕의 아들이 태산으로부터 청주에 들어와서 새로 청구국을 세웠느니라."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부씨 충신들이 청주를 탈환한 것이 아니라서 부림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태산의 산도적들 세상이라니 아직도 그녀의 고초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로 본왕이 태산의 대호방을 이끌고 내려온 청주의 새로운 제왕이다. 그러니 부림, 너는 내가 하는 약속을 믿으면 된다."
"뭣이? 네놈이 새 제왕이란 말이냐?"
부림은 엉겁결에 욕을 하고 입을 닫았다. 벽려혼은 욕을 못들은 척하고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그럼 부씨 일가를 모두 방면하여 정청으로 데려가서 다른 신료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성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라. 그리고 부림공주는 제왕부 내원으로 모셔가도록 하라."
벽려혼은 풍패로부터 아기 여도수를 돌려받아 부림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따가 청주성이 정리되면 내원에서 다시 보자."
부림을 따르던 늙은 시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림은 너무나 고맙게 아이를 돌려받았지만 신세가 한심하였다. 일국의 공주가 이제 산도적의 희첩이 되는 것인가? 아무튼 제왕부 내원으로 돌아오고보니 사람 살 곳이 아닌 감옥을 벗어나서 몸은 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쉬지도 못하고 새로운 청주 제왕을 위해 술상을 차리고 신방(?)을 차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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