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혼(沸流魂)

#21. 재결합의 꿈은 사라지고 - 1

금박(金舶) 2015. 7. 16. 12:46

  #21. 재결합의 꿈은 사라지고

 

  바야흐로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백제의 세 무사는 품(品)자로 벽려혼을 향해 걸어왔다. 천의 무사가 먼저 언월도를 들고 달려드니 벽려혼은 먼저 언월도를 피했다. 그러나 어느틈에 발밑에 파고든 지의무사가 휘두르는 쌍도끼가 있어서 펄쩍 뛰어 피했는데 다시 인의무사가 목을 향해 찔러오는 검을 피해야 했다. 벽려혼은 마지막 인의무사의 검이 끝까지 그의 몸을 파고 들어서 겨드랑이 치우손으로 겨우 막아내자 화가 치솟았다. 삼인의 협격은 과연 위력적으로 단 한차례의 맛배기에서 벽려혼을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삼인은 자신감을 얻은 듯이 낄낄 웃었다.

 

  "이놈들, [개물교화] 맛좀 봐라."

 

  벽려혼은 취운검을 높이 쳐들었다.

 

  "무라구모"

 

  무라는 모여라(聚)의 고어이고 구모는 구름(雲)의 고어였는데 취운검에게 벽력진기를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 무라구모라는 구호였다. 벽려혼이 [무라구모]를 외치자 마른 하늘에 점점이 떠있던 하얀 구름이 검은 구름으로 변하면서 벽려혼의 머리 위에 모이는 것 같았다. 서서히 취운검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취운검에 간직된 벽력진기가 발동을 하는 것이었다.

 

  "개물교화!"

 

  마침내 벽려혼은 세 무사를 향하여 몸을 한바퀴 돌리면서 수평으로 검을 그어갔다. 진동하는 취운검에 인의무사가 먼저 검을 부디쳤고 그다음에는 천의무사가 내지른 언월도의 도면을 스쳤다. 지의무사는 쌍도끼가 짧아서 미처 벽려혼의 취운검과 부딪치지 않았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부딪친 인의무사는 검을 하늘로 날리고 그 자리에서 뒤로 나자빠져 죽어버렸는데 칼을 쥐었던 오른팔이 새까맣게 타버렸고 얼굴의 칠공으로 피를 흘렸다. 그 옆에 있던 천의무사도 언월도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엎어졌는데 콧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버렸다. 지의무사는 취운검과 직접 부딪치지 않았지만 두 자루의 쌍도기를 들고서 두 팔을 부르르르 떨다가 땅에 쓰러졌다.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한참만에 일어나기는 했는데 똑바로 서지를 못했다. 고개를 쳐든 그의 얼굴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봉두난발이었고 인의무사나 천의무사처럼처럼 직접 벽력진기를 맞은 것이 아니라서 목숨은 붙어 있었다.

 

  대방왕의 얼굴이 다시 찌푸러졌다. 아까운 두 무사만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백제 고수로 이루어진 삼인 합격은 허물어지고 혼자 살아남은 지의무사는 쌍도끼를 버려둔 채로 비틀거리면서 대방왕에게 돌아갔다. 그가 땅바닥에 내버려둔 두 개의 도끼는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직도 부르르르 떨며 땅 위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꿈틀거렸고 그 옆에 먼저 떨어진 천의무사의 언월도도 마치 딸국질하는 것처럼 이따금씩 요동을 치며 저절로 도면을 뒤집었다. 가장 먼저 취운검에 부딪친 인의무사의 검은 뒤에 있던 버드나무에 날아가서 꽂혔는데 버드나무가 세 번씩이나 부르르르 떨면서 무수한 나무 이파리를 세 차례 떨구었다. 그 모습을 끝까지 구경하던 동모군의 많은 사람들이 입이 벌어졌다.

 

  "벼락검이다."

 

  "전설의 벽력검이다."

 

  "치우신이 현신했다."

 

  벽려혼은 취운검의 진동이 가라앉아 그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죽은 두 백제 무사는 결코 악인도 아니었는데 공연한 살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벽려혼은 필요없이 취운검을 시험하여 두 사람을 죽인 것이 되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치우신이 현신했다고 몹시 좋아들하며 흥분하였다. 대방왕 여계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이게 복인가, 화인가? 백제는 용장을 얻어서 복이 되지만 대방왕 자신에게는 화가 될 수도 있었다.

 

  이날 동모성에서 열린 무술 과거 시합으로 보졸 5000명, 기마병 300명이 충원되었고 인관을 통과한 사람은 500명,  지관을 통과한 사람은 100명, 천관을 통과한 사람은 벽려혼과 청운검 장영까지 5명이었다. 그날밤은 동모군 사람들 모두에게 벽려혼이 삼화취정의 내공고수라는 것이 화제였다. 드디어 동모군이 새나라의 왕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동모군 백성들 사이에 은근하게 부풀어나는 것이었다. 동청주자사 대방왕 여계는 그날 저녁 여러 신료들과 신임 장군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었다.

 

  "오늘 무술 과거의 성과 중에서 백미는 바로 벽려혼 장군이오."

 

  연회 자리에서 대방왕이 벽려혼을 불렀다. 벽려혼은 말석에 있었지만 오늘의 천관을 통과한 5명 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좌중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대방왕 앞에 벽려혼이 가까이 섰다. 그러나 대방왕에 대한 인사의 포권을 생략하였다.

 

  "그대 이름이 벽려혼인가?"

 

  "그렇습니다."

 

  벽려혼이 인사를 깍듯이 하지 않아 조금 분위기가 이상하지만 대방왕은 계속 질문을 하였다.

 

  "어디서 태어났는가?"

 

  "소제는 중국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제?"

 

  대방왕은 벽려혼이 처음부터 예를 차리지 않자 황당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벽려혼은 스스로 소제(小弟)라고 대방왕과 형제라 칭하니 완전히 맞먹는 것이었다. 옆에서 석성왕 여귀가 노기를 띠었다.

 

  "이놈, 벽촌에서 막 굴러먹던 놈이라 예를 모르는구나. 마굿간에서 말먹이부터 시작해서 예를 배워야 할 놈인데 처음부터 장군이라니."

 

  석성왕이 호통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벽려혼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벽려혼의 다음말은 석성왕을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어린 것은 가만 있거라. 너는 내 조카벌이다."

 

  "뭣이라고?"

 

  "나를 당숙이라고 부르라."

 

  벽려혼이 점잖게 손을 내저으며 여귀를 만류하고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소제는 비류제황의 적손자이고 대방왕과 사촌 형제입니다."

 

  그 말을 듣고 대방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뭣이? 과인과 사촌이라고 했느냐?"

 

  "백제 13대 비류대왕의 장자 비류왕 여자강자의 아들이 바로 나, 벽려혼이오. 그러니 대방왕과는 사촌 형제이고 석성왕의 오촌 당숙이 맞지 않소?"

 

  대방왕 여계가 다시 한번 벽려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이냐?"

 

  석성왕 여귀가 다시 나섰다.

 

  "부왕, 잘 따져 보십시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류왕 여강은 이미 사십 년전에 연나라로 끌려와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까?"

 

  "어린 조카는 가만 있거라."

 

  벽려혼이 석성왕 여귀를 야단치면서 족보를 말했다.

 

  "나의 부왕은 38 년전에 백제에서 중원으로 끌려와서 28 년전에 백제 유민군으로 청주에 청구국을 세우셨다가 백일천하로 물러나셨소이다. 그때부터 부왕은 존성대명을 바꾸어 벽자려자울자를 쓰셨지요."

 

  "청구국왕 벽려울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분이 과인의 백부님 여강이셨다 이런 말이냐?"

 

  대방왕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대방왕은 겨우 네살까지 백부인 여강을 보았으니 기억도 가물가물하였다.

 

  "그분이 아직 살아계시냐?"

 

  "이미 돌아가셨소이다. 17 년전에."

 

  대방왕이 염두를 굴리며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과인이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벽려왕이 과인의 백부시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느냐? 너 또한 이제 와서 비류제황의 손자인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느냐는 말이다."

 

  벽려혼은 옥피리를 꺼내었다.

 

  "여기 보면 선왕의 이름자가 적혀 있소."

 

  대방왕이 옥피리를 받아보니 "비류왕강(康)"이라고 적혔는데 비류왕은 백제 비류왕이고 강은 왕성인 여씨를 생략한 것이니 여강(餘康)의 신물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옥피리가 백제 본토에서 나는 붉은 옥으로 만들어졌고 모양새도 백제 것이었다. 대방왕은 다시 물었다.

 

  "이 물건은 분명 백부님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너를 그분의 혈손이라고 단정하기는 이르구나."

 

  이때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것은 이 외숙부가 증명하지요."

 

  뒤쪽에서 외팔이 노인이 걸어나왔는데 그는 풍패였다. 풍패는 며칠 사이에 아무도 없는 불기산에 가서  풍한의 가짜 무덤을 찾아보고 이제야 동모성에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대방왕이 물었다. 풍패가 앞으로 나와서 대답했다.

 

  "대방왕 전하. 본인은 외숙이외다. 모후이신 풍황비의 오라비요."

 

  대방왕은 풍패의 여동생 풍황비의 소생으로서 국난을 당하여 풍패가 연나라로 끌려갈 때에는 겨우 네살이었다. 그러니 외숙의 얼굴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럼 풍외숙이라는 말씀이시오? 모후께 말씀은 들어서 성함은 알지만 얼굴을 기억할 수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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